우정과 정치색

2024.04.08 16:00

Sonny 조회 수:491

정치성향이 다른 친구와 과연 우정을 유지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을 지난 주 몸소 체험했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얼룩소의 이 인터뷰였습니다. https://alook.so/posts/VnteJwj/interview


 왜 젊은 공무원들이 퇴사를 하는지 공무원으로서 겪는 현장의 부조리와 월급 문제에 대한 공무원 당사자 분의 인터뷰가 있어서 이걸 단톡방에 공유했습니다. 그 단톡방에는 현직 교사인 친구와, 사기업에서 일하다가 경력직 공무원으로 전환한 후 공무원 조직에 환멸을 느껴서 기존 회사로 다시 입사한 친구가 있습니다. 모두 공무원 조직에 대한 경험이 있고 저희는 종종 사회적인 이슈들을 이야기하기에 이 이슈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눠볼 기회다 싶었습니다. 단톡방 외에도 부부 모두가 공무원인 다른 친구가 또 있습니다. 이 친구는 제작년에 공무원 연금을 정부가 멋대로 줄이거나 동결하는 것에 대해 시위를 하러 서울까지 올라왔던 적이 있습니다.


현직 교사인 친구는 이 인터뷰에 어느 정도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사기업을 다니는 친구가 엉뚱한 반응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공무원들이 철밥통이라느니, 하는 일도 없으면서 월급만 타간다느니, 전자결제만 받아서 하지도 않은 야근비를 받아간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제 온라인에서도 논쟁에 큰 의미를 못느끼고 현생에서도 어지간하면 싸움을 피하자는 기조이기 때문에 온화하게 말을 했습니다. 너가 겪은 공무원 현장이 좀 엉망이긴 했다만 다른 지역의 공무원들은 민원이나 업무량 때문에 과로사하거나 자살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 것들도 한번 생각해볼만 하지 않겠냐... 그럼에도 이 친구는 자신있게 자기 주장을 이어나갔습니다. 공무원들이 얼마나 게으르고 돈만 받아가는지요. 다른 교사 친구도 언짢음을 숨기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좋게 좋게 말하던 저도 짜증이 터져나오고 말았습니다. 첫째, 공무원들이 월급까지 오르면 '신의 직장'이 된다는 그 친구의 논리가 그랬습니다. 일도 안하고 연봉이나 각종 휴가들도 다 보장을 받으니 '월급이라도 덜 받아야한다'는 이 논리가 너무 기가 막혀서 대놓고 물어봤습니다. 도대체 공무원들의 월급이 오르면 얼마나 오른다고 그걸 신의 직장씩이나 되는 단어로 표현을 하느냐, 남의 직장이 신의 직장이 되면 안된다는 논리는 다 자기 "끕"대로 고통을 그저 쉬쉬하고 견디면서 살라는 이야기밖에 더 되냐... 공무원들은 월급을 많이 받으면 안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계속 논리를 펼쳐가는 걸 듣고 있자니 정말 성질이 나더군요. 왜 인국공의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이 실패했는지 뼈저리게 체감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이 친구는 공무원들이 다 성과제 적용해서 일 안하는 놈들을 짤라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야기가 이렇게 나오니 저도 고운 말이 안나가더군요. 성과제 적용하면 너는 무사할 것 같냐, 근무 시간에 이렇게 단톡방이나 하는 너부터 상사가 면박 주고 바로 짜른다고 쏘아줬습니다. 이 때 이 친구에게 느끼는 분노는 뭐랄까, 권력자에 대한 저항의식이라기보다는, 같은 노동자 주제에 자기 목에 칼을 들이대는 어리석음에 대한 깝깝함이랄까요. 그 때서야 그 친구도 좀 무안했는지 자기가 무슨 말을 했다고 이렇게 화를 내냐, 나는 공무원 조직을 바꾸는걸 합리적으로 하자고 했을 뿐이라고 하는데... 이후에 나도 힘들다, 왜 내가 연차도 못쓰는 건 말을 안해주냐 등등 논점이탈의 주장이 이어졌습니다. 교사 친구가 황급히 말려서 카톡에서 불이 붙은 이 논쟁은 대충 사그라들었지만 그 친구는 저와 교사 친구가 나누는 카톡에 응답을 안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삐져있는" 꼬라지가 또 한번 저를 짜증나게 하고 있구요. 


이 전에 "베프"와 느꼈던 권태가 서글픔에 가까웠다면 이번에는 정말 짜증이 솟구치고 있습니다. 평소에도 중국인을 혐오하고,(짱x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삽니다) 현재 징병되는 군인들이 핸드폰 쓰는 거에 못마땅해하고, 손흥민한테 대든 이강인이 싸가지 없다고만 하고, 문재인 욕은 그렇게 하면서 정작 윤석열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안하는 이 친구의 정치적 포지션을 마침내 확인하고 말았달까요. 어느 정당과 정치인을 지지하느냐는 둘째 문제입니다. 모든 분노가 현재 사회적으로 인식되는 서열의 위에서 아래로만 흐르는, 외부인과 사회적 약자들을 향해서만 분노하고 응징을 외칩니다. 무의식적으로 느껴오던 이 친구의 극우보수적 세계관에 제가 질려버렸습니다. 이런 세계관은 인격과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자신의 문제는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지만 남의 문제는 '누칼협'이나 '노력'으로 당연히 받아들여져야한다는 이 태도 자체에 저는 정말 염증을 느낍니다. 회사가 힘들다, 상사가 괴팍하고 부조리하다, 동료나 후배 직원들이 갑갑하다는 하소연을 제가 얼마나 많이 들어줬는데요. 단톡방에 공무원 친구가 있는데도 공무원을 후려치는 그 친구의 그 알 수 없는 자신감에 정말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공무원이란 직업을 깔아보고 자기 능력을 과평가하면 저러는 것일까. 잘나고 똑똑한데도 고생하는 사람들, 사회적 이슈에 진지한 시선을 가진 사람들을 이 친구는 얼마나 못만나고 산 것일까...


경조사가 있다면 꼭 부르기로 결심했던 그런 친구이지만 한편으로는 늘 위태로움을 느꼈습니다. 이 친구가 자신있게 비하하고 꼴보기 싫어하는 그런 사람들이 다 약자이기 때문에. 정우성과 이정재도 서로 친구라지만, 그래도 두 사람은 영화라는 공통의 직업적 교집합이 있고 서로 좋아하는 지점이 있잖아요. 저와 그 친구는 이정재도 정우성도 아니고, 서로 참아줄 수 있는 그런 지점들이 별로 없습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포기하고 넘어갔으면 좋았을 것도 같지만, 한편으로는 저나 교사 친구 눈치를 안보고 당당하게 공무원들 월급 더 받으면 안된다고 하는 그 친구의 "싸가지"를 참기 힘들었습니다.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당당함을 다른 사람들이 다 견뎌줘야 유지되는 우정이 과연 얼마나 유효한 것일까요. 정치색이 다른 채로 과연 친구가 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보통사람들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되는군요. 


저도 그 친구를 존중해서 단 한번도 단톡방에 제가 촛불시위를 나가고 어떤 정치인을 지지하는지 이런 디테일들을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괜히 불편해할까봐. (이것도 정상적인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만 이렇게 당당하게, 친구의 직업군까지 멸시하는 의견을 내는 것에 저나 다른 친구만 꾸준히 참아줘야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제가 타인에게 너무 큰 기대를 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존중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모든 정치적 사안에 성소수자 문제처럼 논쟁을 바로 포기하고 그냥 넘어가면 되는 것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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