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마음이 다 닳고

2020.02.09 11:07

어디로갈까 조회 수:832

1. "자기 인생에 대한 그릇된 고정관념에 매달려 평생을 허비하는 게 인간이다."
뒤렌마트의 말이지만 꼭 그만이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죠. 대개의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이 어떤 식으로 되어가야 한다고 여기는 형태에 대한 고정관념을 갖고 있는 듯싶어요. 뿌리는 땅 속에, 줄기는 곧게, 가지와 잎과 열매는 이러저러하게 라는 식으로요.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형식이라 해도 사람들은 그것을 앞서 지각합니다. 한 개인이 그렇고 한 시대가 그렇습니다. 지각의 변동은 존재의 변동이고 시대의 변동이죠. 중세와 르네상스의 이행기, 근대와 현대의 이행기가 그랬듯 다른 삶을 꿈꾸고 결단하는 개인 또한 그렇습니다.

그러나 유행의, 유목민의, 리좀의, 파편의 사상은 그런 생각을 부정합니다. 단일자의 1과 변증법의 3을 부정하고, 2만으로도 형식이 되리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어요. (심지어는 긴장이 없는 병렬의 2만으로도 형식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 파격에 의지하므로 그들은 깊고 강합니다.

어제,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의 작업실에 가 작품들을 봤습니다.  나란히 걸려 있는 두 장의 사진이 시선을 잡았는데, 두 사진은 부딪치지 않고 나란히 닮은 모양으로, 그러나 어딘가 서로 다르게  벽에 걸려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무엇을 지향하지 않고도 나/우리는 이미 존재한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전통적인 형식감각에 비하면 일종의 비정형이었고 결말없음이었으며, 유행어로 말하자면 '탈주'였습니다.

저는 그런 사상을 거절하는 사람에 속해요. 고전과 모던에 머무는 정도가 저의 경계입니다.  형식을 이루지 못하는 '패배'라도, 그러한 패배에 정직한 편이 저에겐 낫다고 생각해요. 또한 고전과 모던을 하나의 正으로 삼아서도 비정형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의미의 결집은 의미의 소멸을 요구해요. 그것이 형식적인 아름다움이고 완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 살면서 맞는 모든 변화의 첫순간은 '갑자기' 혹은 '문득' 이라는 부사의 문을 통과합니다. 주어 없이 발생하는 '갑자기'와 '문득'이란 없을 거예요. 하지만 드물게 주어/명사가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의 '갑자기'와 '문득'의 순간들이 방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 제 시선은 안도 밖도 아닌 어떤 공간을 향하게 돼요. 고요한 긴장이 스쳐가는 순간입니다.
투명해서 세상 어느 사물과 상황도 가리거나 건드리지 않을 듯한 작은 스침, 혹은 불투명해서 어떤 사고의 노력에 의해서도 삶으로 통합되지 않을 듯한 정적의 순간. 

어제부로 저는 한 친구의 얼굴을 휩싸고 있던 침묵과 그 예민한 눈빛을 보이지 않는 生의 창고에 적립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무엇이었을까요. 그 무엇도 되지 못한, 사소하나 잊을 수는 없는, 저 흔한 순간들 중의 하나였을까요. 
이렇게 쓰고 있는 동안에도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는 걸 느낍니다.  감정도 육체를 매개로 파악되니 참 아이러니하죠. - - 이 느낌에다 여러가지 이름을 붙여봅니다. 불안, 기억, 혹은 시간... 그러다가 '낯선 음악'이라고 생각하기로 합니다. 그래요, 기쁨도 슬픔도 다 낯선 음악이죠 뭐.

자, 낯선 음악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 삶을 변화시켜야 하는 것일까요?
낯선 음악이 초래된, 혹은 솟아난 장소는 어디일까요.  답하지 못하지만,  질문하는 동안 여러 기억들이 문득 다르게 이해되고, 그 풍경의 변화를 저는 무연히 바라봅니다. 그렇게 삶은 변화하는 것이겠죠. 
삶의 변화 속에서 우연을 감지할 때,  삶이 아무 이유 없이도 어둡고 억울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 부질없는 깨달음으로 마음이 다시 환해지겠죠. 장조에서 단조로, 단조에서 장조로 바람은 휙휙 바뀌어 불고, 표정의 미동조차 없이 저는 길을 건너고 있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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