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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가 뭔가 시간이 붕 떠서 보게 된 영화입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이지만 어째서인지 저에게는 "이동진이 뽑은 인생영화" 같은 타이틀로 더 강하게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보고 나니 이동진 평론가가 참 좋아할만한 영화구나~ 싶었습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죽으면 어떤 건물을 가고, 그곳에서 면담을 통해 인생의 제일 행복했던 순간을 선택해야한다는 게 이 영화의 기본적인 설정입니다. 왜, 어떻게 같은 질문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설정에서 2000년대의 낭만을 좀 느꼈습니다. 지금은 산 사람들이 죽지 못해 괴물로 변하거나 좀비가 되어서 이승을 방황하는 시대잖아요. 죽기 전까지 평화롭게 살았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죽은 후에도 평화롭게 뭔가를 고민하는 세계관이 견고해야 가능한 설정이죠. 이동진 평론가의 말을 빌리면 이 영화가 살짝 세월의 때를 탄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설령 평화롭게 죽은들 지금 각자도생의 지독한 경쟁 세계를 체감하는 저희에게는 저승에서 인생을 반추하는 것 자체가 좀 한가롭게 느껴지니까요.


보면서 일본 특유의 로컬한 정서도 느껴졌습니다. 일본 영화는 항상 극에서 극으로 가는 것 같아요. 요즘은 그런 게 덜하지만 한 쪽에는 아주 무자비하게 인체를 유린하고 포르노틱한 폭력이 가득찬 영화들이 있으면, 한쪽에서는 한없이 조용하고 소담한 그런 "일반인"들의 삶이 있죠. 이 영화는 딱 후자에 속하는 영화입니다. 아주 신비로울 것 같은 저승세계지만 그 안을 채우는 건 또 평범한 사람들이고 그 안에서 자기들끼리 아웅다웅하면서도 일을 해나가는거죠. '이웃'과 '노동'이라는 평소의 세계관이 그대로 묻어납니다.


면담을 하는 사람 중 유의미한 캐릭터는 이치로 와타나베라는 남성 노인입니다. 이 캐릭터가 자기의 젊은 시절부터 인생을 되돌아보고 또 한 순간을 고르고, 그 순간에 있던 상대방과 저승 공무원인 타카시와의 인연이 새로 발굴되니까요. 이 노인과 다른 사람들의 사연을 들어보면 누구나 자기 인생을 되돌아보고 또 행복한 순간을 찾아낼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혹은 인생이란 그렇게 행복한 순간을 기억하며 끝나야 한다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물론 이 설정 자체에는 함정이 있죠. 왜 여러 기억은 안되는가. 이루지 못했거나 이별했거나 뭔가를 상실했던 순간의 회한을 끝내 풀지못하고 죽을 때까지 안고 가는 사람들은 그걸 안하고 싶어서 안한 것인가 하는 등...


이렇게 면담만 하고 그 순간을 영화로 만드는 것이라면 그건 그냥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사랑고백으로 끝났을테지만 영화는 여기서 한발짝 더 나아갑니다. 이치로가 자신의 아내 쿄코와 벤치에 앉아서 담소를 나누던 게 제일 행복한 순간이라고 뽑았지만, 쿄코는 저승 공무원 타카시가 살아생전에 약혼을 했었던 사람이었죠. 그리고 쿄코가 뽑은 살아생전 제일 행복했던 순간은 자신의 남편인 이치로와의 순간이 아니라, 오히려 타카시와 함께 벤치에 앉아있던 순간입니다. 얼핏 보면 엇갈린 인연처럼 잔인해보이지만 타카시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건 또 자신이 성불할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되죠. 물론 이 부분은 어떤 여성이 남성의 행복을 증명하는 수단으로만 쓰인다는 함의가 있습니다. 특히 같은 저승공무원인 사토나카 시오리가 타카시를 내내 짝사랑하는 것까지 겹쳐본다면 남자를 향한 여자들의 사랑이 현생과 저승의 인연으로 각각 남자의 행복을 방증하는 도구로 수단화되죠.


이 줄거리는 우리 모두는 알게 모르게 이어졌다는 낭만과 더불어서 불행한것만 같은 인생에도 사실 누군가에게 가장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는 함의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 결론 자체가 굉장히 남성중심적인 판타지로 증명된다는 것은 꽤나 거슬립니다만. 현실적으로 어떤 여자가 젊은 시절의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오륙십년을 다른 남자와 함께 살면서도 과거의 기억을 그렇게 품고 있는 게 과연 충분히 현실적인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봐도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것과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받는 것에 대해서 남자입장의 판타지 같아요. 첫사랑을 잊지 못한다는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영화적으로 본다면, 이것은 타인의 인생을 영화로 들여다보는 게 한 사람의 가장 소중하고 행복한 순간을 훔쳐보는 것이니만큼 굉장히 소중하고 아름다운 경험이다는 주장을 하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편의 인생영화를 평생 가슴에 안고 살아가니까. 그래도 저는 영화나 예술에 대한 어떤 감흥이 그렇게까지 충격적이고 단 하나만 뽑아서 평생 간직할 수 있는 것인지는 조금 의아하긴 합니다. 그것은 내 인생의 베스트라는 기억 리스트에 대한 고집에 더 가까운 게 아닐지... 물론 저도 영화에 대한 애정이 있습니다만 그래도 이 작품이 그려내는 함의 자체는 너무 절대적이면서 평생의 무게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달까요. 두리뭉실한 추상적 낭만으로 영화가 인생을 버무리고 있습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더 의미심장하게 봤던 건 바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국으로서의 맥락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타카시는, 일본군의 2차 대전에 징집됐다가 죽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타카시의 쿄코는 전쟁 때문에 약혼자를 잃은 여자죠. 그리고 현재 시점에서 노인이 된 이치로는 전쟁으로 누군가와 이별을 했던 그 과정을 거쳐 행복을 얻은 사람입니다. 지금 이렇게 무탈하게 여생을 보내고 심심해보이는 결혼생활을 마친 사람도 전쟁이라는 불행으로부터 그 인생의 평안을 얻은 것이라는, 전쟁의 고통을 상기시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 영화가 오히려 디테일해지는 부분은 이런 전범국으로서의 성찰입니다. 전쟁이 추상적인 국가적 대결이나 약자인 개개인이 휘말리는 비극으로만 그리지 않습니다. 어떤 개인의 안정적인 생활조차도 사실 고통스러운 전쟁 뒤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라며 역사적 맥락에서 되짚어보죠.


이를 뒷받침하는 다른 캐릭터들의 대사가 있습니다. 대나무 밭에서 다른 할머니가 자신의 유년기 추억을 회상할 때, 간동대지진 당시 우물에 독을 풀었다고 조선인을 모함하고 학살한 사건을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이건 어떻게 보면 불필요한 맥락입니다. 개개인의 추억을 말하는데 왜 굳이 일본인의 역사적 과오를 영화가 되짚을까요. 이 대사로 영화가 회고하는 일본의 전쟁은 가해자로서의 행위입니다. 이걸 본다면 비행기를 타고 나는 한 젊은이의 추억도 조금은 수상쩍게 보입니다. "특공"이라는 일본군의 전법은 비행기 채로 미국의 함대에 돌격하는 자폭공격이었습니다. 외국인이 소녀를 잡아간다는 가사의 내용도 어쩐지 호러스럽고요. 


제가 만약 이 영화를 의미있게 기억한다면, 한 개인의 삶과 행복했던 기억들이 전쟁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어떻게 이어지고 재연되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타카시는 이 저승의 교차점에 몇십년이나 머물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 자신도 자신의 삶에서 행복한 기억을 찾지 못하고 있던 사람이죠. 왜냐하면 그런 기억을 만들 틈도 없이 전쟁에 이끌려가서 죽었으니까. 어떤 할머니는 자신의 행복했던 기억을 재구성하는 순간에도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사건을 회상합니다. 누군가의 가장 행복한 순간에도 집단적 폭력의 기억이 도사리고 있죠. 이 영화는 자신의 삶을 영화적으로 마무리짓는, 아름다운 이야기같지만 한편으로는 전쟁으로 인해 구천으로 떠도는 망령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타카시가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기억으로 이 저승의 낡은 건물에서 함께 영화를 만들던 경험을 꼽은 것은 영화라는 예술에 대한 찬사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쿄코의 사랑을 깨달았음에도 현세에서 뽑을만한 기억이 여전히 없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전쟁으로 죽어버린 사람들은 끝내 죽은 이후에 영화라는 경험을 뽑을 수만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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