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는 무엇인가?

2019.06.06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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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 랜덤으로 뜬 6.25 관련 다큐멘터리를 봤습니다. 저는 13살 때까지 현충일과 6.25를 같은 날로 착각했어요. 이후 구분하게  된 후에도 해마다 이 날이면 그 아픈 영상들을 보게 되곤 합니다. 마음이 슬프고 불안정해지므로 꺼야지, 돌려야지 하면서도 꾸역꾸역 끝까지 보고 말아요. 마치 거리에서 '도를 아십니까?'라며 따라붙는 사람에게 '네, 관심 있어요'라고 답하는 것 같은 잘못된 선택/고집이죠.
온갖 감정에 휘둘리며 다 보고 나니 역시 쓸쓸함만 남습니다. 워낙 익숙한 영상이라, 잔인하고 무서운 장면에서도 참 쓸쓸하구나 선에서 감정의 타협을 보게 됐습니다. 

다만 어떤 내용이 계속 질문을 던져와요. 이를테면 이런 영상입니다. 
동지섣달, 피난열차에 몸을 싣지 못한 사람들은 언 강을 걸어서 남하해야 합니다. 피난민 중에는 기르던 소를 몰며 걷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소는 사람보다 미끄러운 빙판을 걷지 못하고 자꾸만 미끄러집니다. 주인이 소를 부축해요. 소가 한 발을 내딛을 때마다 그 밑에 짚가마니를 깔아주는데, 뒷발 밑에서 짚가마니를 꺼내 얼른 앞발에다 깔아주는 식입니다. 반복, 반복, 반복. 그 장면을 볼 때마다 저절로 한숨이 나오죠. '아, 저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
 
그 한숨은 일상과 생활의 형태에 대한 의문입니다. 물론 제가 택하는 대답도 '해야 한다'예요. 그런 긍정 후에야, 걷는 소의 발밑에 짚가마니 깔아주기라는 자세가 실현되는 것이니까요.
피상적으로 보면  그 행위는 어이없는 노동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폭격을 피해 피난은 가야 하고 소도 강을 건너야만 해요. 소를 '데리고' 가는 것이죠.  소는 나중에 생계를 위해 팔 수도 있겠죠. 잡아먹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새 터전에서 밭을 갈게 할 수도 있고, 지친 아이를 태울 수도 있을 테죠. 무엇보다 식구인 소, 정들고 고마운 소를 폭탄 떨어지는 도시에 버려두고 오는 일  그 자체가 그들에겐 선택할 수 없는 야만이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소와 함께 간다>는 것. 그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소와 함께>... <소>와...

자, 그리하여 이런 화두가 머릿속 전광판에서 명멸하게 돼요. '나의 <소>는 무엇인가? 내가 끝까지 데려가려는 <소>는 무엇인가?'
다큐 영상에서의 <소>는 생존을 위한 절대수단으로서의 존재였습니다. 그런 의미가 기본에서는 바뀌지 않겠지만, 지금 저는 전쟁의 와중에 있는 게 아니므로 이런 질문으로 대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살아남기 위해서, 삶의 의미를 잃지 않기 위해서, 내가 곁에 두고 굳게 지켜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만 있으면 마음이 든든하여 혼돈을  미소로 대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소>.  현재의 내게 그 의미는 무엇이며, 또 무엇이어야 하는가?

빙판길 같은 일상에서 짚가마니를 까느라 손발이 조금씩 얼어붙더라도, 함께 가야할 <나의 소>가 곁에 있다면, 그렇다면 적잖이 든든하겠습니다. 고통 속에서도 현재와 미래를 두렵지 않은 자세와 표정으로 견딜 수 있을 듯해요. 뭐 인생이 견디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긴 합니다만. 

덧: 기분에 흠집난 김에 저녁엔 <허트 로커>나 찾아볼까 하는 충동이. -_-
 제임스의 대사: (아이에게) "너도 나이 들면 지금 좋아하는 것들은 더 이상 특별하지 않을 거야...... 니가 지금 좋아하는 것들이 그런 식으로 다가와. 그리고 내 나이쯤 되면 의미있는 건 한두 가지로 줄어들지. 내 경우엔 지금... 하나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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