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없구요.



 - 한 남매가 차를 타고 미국 캔사스 외딴 시골길을 달리고 있습니다. 동생은 임신을 했고 출산은 세 달쯤 남았나봐요. 아주아주아주 먼 곳까지 가서 애를 낳아야 하는 사연 같은 게 있는 모양인데 자세히 설명은 안 해 줍니다. 그러다 동생이 속이 안 좋아 잠깐 차를 세우는 순간 사람 키보다 높은 풀이 무성하게 자란 들판에서 "도와주세요! 길을 잃었어요!! 저를 여기서 나가게 해주세요!" 라는 어린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방금 전에 오빠에게서 '참 이타적인 녀석'이라는 평가를 받은 우리의 여동생이 이 일을 그냥 지나칠 순 없겠고, 마침 그 옆에 있던 매우 수상해 보이는 버려진 교회 앞에 차를 세운 남매는 풀숲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이건 스티븐 킹 소설이니까 당연히...



 - 아주 전형적인 스티븐 킹 스타일 단편 이야기입니다만. 나름 신선한 구석이 있습니다. '음. 이런 이야기이고 앞으로 이렇게 흘러가겠구나'라는 생각을 세 번쯤 번복하게 만들어줘요. 결국엔 전혀 놀라울 게 없는 결말로 마무리되지만 그래도 시작부터 뻔히 보이는 끝을 향해 직진만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아들과 함께 썼다는데 사실은 교대해가며 몇 페이지씩 쓴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해봤네요. 아들이 잡아 놓은 방향을 아빠가 비틀고 그걸 또 아들이 뒤집고... 뭐 이런 풍경이 떠올라서 말이죠. ㅋㅋ 설마 정말로 그랬을 린 없겠지만요.



 - 호러 이야기의 치트키 두 개를 동시에 사용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임산부와 어린애요. 사실은 삼종 셋트인데 왜냐면 개도 나오거든요(...) 요즘엔 많이 약해진 것 같지만 그래도 전통의 살생 금지 소재 셋이 동시에 출동하니 이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보게 되는 게 좀 재밌었습니다.



 - 기본적으로 '어딜 가도 다 똑같아 보이는 닫힌 공간' 속을 헤매면서 그 속에 숨겨진 흉악한 것들을 피해 살아 남고 또 탈출하려고 애쓰는 이야기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감독이 빈첸조 나탈리입니다. '큐브' 감독이요.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이 적절한 조합이랄까... ㅋㅋㅋ 그래서 그런지 보다보면 '큐브'가 생각나는 연출 같은 게 종종 있었습니다. 애초에 감독의 기획이었는지, 아님 넷플릭스에서 기획하면서 이 감독을 데려온 건진 모르겠지만 꽤 적절한 조합이었습니다. 그 '큐브'스런 분위기가 꽤 적절하게 잘 먹혔거든요.



 - 배우들은 거의가 경력이 얼마 안 되는 무명 내지는 신인급 배우들인데 딱 한 명 네임드 연기자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 양반 연기가 아주 좋아요. 딱히 스포일러랄 것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그 배우와 캐릭터에 대해선 언급을 않도록 하겠습니다.



 - 여기까지 적어 놓은 것들만 보면 상당한 수작 같은데... 안타깝게도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야기 방향을 이리저리 슬쩍 틀어대는 단계가 마무리되고 '진상은 이런 것이었다!'라고 밝혀지는 시점부터 엔딩까지는 이야기가 좀 늘어집니다. 나름 불쾌한 악몽 같은 장면들로 분위기를 잡으며 돌파해보려고 하지만 그게 그렇게 재밌지는 않은 데다가 클라이막스의 액션이 영 심심하거든요. 특히 클라이막스 장면은 이야기 속 논리와 전혀 안 맞는 부분도 있어서 좀 어처구니 없는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마지막에 중요한 선택을 하는 어떤 캐릭터의 경우엔 그 양반의 사정과 심리가 어떠했는지 별로 묘사가 되지 않기 때문에 좀 쌩뚱맞기도 했구요. 저는 원작을 읽지 않아서 작가팬이라면서 읽은 게 없네요 이게 원작의 한계인지 아님 감독의 무리수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뭐 누구 책임인지는 따질 필요 없는 거고 중요한 건 '클라이막스가 재미 없고 결말이 좀 쌩뚱맞다'라는 부분이겠죠. 결말을 미리 정해 놓고 무리하게 짜맞춘 이야기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 어쨌거나 결론은 이렇습니다.

 재밌는데 좀 아쉬운 영화일 수도 있고 좀 아쉬운 부분은 있지만 재밌는 영화일 수도 있는데 제 경우엔 후자에 가깝습니다. 

 단점은 분명하지만 매력적인 도입부와 나름 신경 많이 쓴 전개 부분에 대한 호감이 후반부와 결말의 아쉬움보다 좀 더 강하게 기억에 남아서요.

 스티븐 킹 스타일을 좋아하시고 B급 호러물을 좋아하신다면 큰 기대 없이 가볍게 즐겨볼만한 소품이라고 생각합니다. 




 - 여기부턴 이제 여담인데, 그 풀숲의 규칙 중 하나가 '이 숲은 생명이 없는 건 움직이지 않는다'거든요. 전 당연히 이 규칙을 응용한 탈출 시도 같은 게 나올 줄 알았는데 그딴 거 없어서 좀 실망했습니다. 정말 그 숲이 이런 규칙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어쨌든 규칙은 규칙이라면 걍 아무 시체나 하나 들고서 타박타박 걷다 보면 빠져나올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풀숲이라 벌레 같은 것도 엄청 많은 걸로 나오던데 파리나 한 마리 때려잡아서 손에 들고 가면(...)



 - 떡밥들을 대부분 초반에 친절하게 던져주고 또 결말에서 대부분 잘 회수하는 이야기인데 딱 한 가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귀가 안 맞는 부분이 있습니다. 스포일러라 설명은 못 하겠지만... 무슨 숨겨진 이유 같은 게 있을 것 같진 않네요. 그냥 호러 분위기 잡기 위해 애 쓰다가 한 번 삐끗한 듯한 느낌.



 - '큐브'가 어느새 22년이나 묵은 영화였더군요. 검색해보니 97년작. 제가 무려 대학생이었던 시절. ㅋㅋㅋㅋ 심지어 군대도 가기 전이었다니 이런 고전 영화를 봤나...



 - 이걸 보고 나니 넷플릭스가 같은 스티븐 킹 원작의 존 카펜터 감독작 '크리스틴'을 제게 추천하더군요. 네. 그래서 이것도 보려구요. 집에 제대로 된(?) 비디오 플레이어가 없어서 그 시절엔 보지 못 했던 영화라서요. 근데 재생을 누르고 정보를 확인해보니 놀랍게도 한국어 더빙이 들어 있습니다? 왜죠. 어떻게된 거죠. 설마 수십년 전 공중파 방영시 더빙 자료를 어디에서 구하기라도 한 걸까요. 이렇게 오래 묵었고 한국에선 크게 히트하지도 않은 B급 호러 영화를 2019년에 넷플릭스에서 더빙해주는 수고를 들였을 것 같진 않은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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