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들리 스콧 영화를 볼 때마다 그가 신앙을 가지지는 않아도 창조자, 조물주의 존재는 인정하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다만 그 창조자가 기존 종교들이 숭배할 만큼의 '신급'이냐, 글쎄, 수명 3년 짜리 레플리칸트, 
남자도 임신시키고 죽이는 에일리언 만든 걸 보면 아닌 것 같은데~하고 항상 발 빼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리 심금을 울리는 음악이 깔리며 홍해가 갈라지고 블랙호크 헬기가 추락하고 화성에서 미아가 되는 절체절명의 스토리가 펼쳐져도 
그의 영화는 묘하게 초연함을 유지합니다.
저는 리들리 스콧의 관점이 밑의 클립에 나오는 고양이의 시선과 일치한다고 생각합니다.

'흠... 흥미롭군'

그는 창조자의 장엄한 실패=대차게 말아먹기를 조롱하지도 않고, 창조물에 대한 낙관적 믿음이 파열돼도 절망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저 지켜볼 뿐입니다.
그래도 그가 십자군이나 성경 소재 영화들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어쨌든 창조자로서의 '신'을 그려나가려는 건가 하고 생각하고 
그가 자신만의 관점을 더욱 구체적으로 제시해줄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프로메테우스>가 나왔을 때 상당히 흥분했습니다. 드디어 리들리 스콧이 창조물로서 관조적인 자세에서 벗어나서, 
성경과 인간 역사를 넘어서서, 자신만의 '창조자', '신'을 창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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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톤의 근육맨, 체크남방 안 입은 엔지니어!

마지막에 쇼 박사가 창조자들을 찾아가서 '우리를 왜 만들었냐고 물어볼거야'라고 했을 때는 진짜 기대감 대폭발! 
그래, 스코트옹!  80년 동안 영화 여정을 거쳐 왔으니 이제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나왔겠지! 
그래, 엔지니어가 뭐라고 말할 것 같아! 하면서 <에일리언 Covenant >를 어엄청 기다렸는데-
-o-

진짜 사는 곳 찾아 가서 싸다구 올려붙이는 패륜을 저지를 뻔.
그래서 저는 그의 영화를 챙겨보되 팬은 되지 않는 것으로 치명적인 복수를 하고 있습니다.
하하, 이역만리에서 동양인 한 명이 절대 팬으로 자처하지 않는다고 하니 맛이 어떠냐!
-_-

일관되게 관심은 갖되 결국 끝까지 밀어 붙이지는 않고, 추구하는 주제와 거리를 유지하는 그의 태도에 좀 짜증이 납니다.
너무 좋아하는 영화지만 이제 언급하기 껄끄러운 우디 앨런 영화를 인용하자면 리들리 스콧도 딱 이런 관점인 것 같습니다.

 Boris : If it turns out that there IS a God, I don't think that he's evil. 
I think that the worst you can say about him is that basically he's an underachiever.
Love And Death (1975)

덜 떨어진 창조물을 내놓는 창조자를 조롱하지는 않고, 그런 창조자에게 질척이며 매달리지도 않는 
(매달리는 감독은 폴 슈레이더?) 듯한 그의 영화들을 보면 광고를 많이 찍은 감독답게 영화를 광고처럼 만드는 것 아닌가 싶어요. 
단점은 감추고 화려한 모델과 음악으로 장점을 최대한 부각하는 상업 광고와는 정 반대로. 
아 네, 로마 황제인데 누나를 짝사랑하고 있고요, 안드로이드는 발명해도 노화는 못 막았고요, 
억만장자이긴 한데 납치된 아들 몸값 내기는 좀 아깝-- 뭐 인간들이 이렇습니다.
상품을 너무나 정직하게 소개하는 쇼호스트라고나 할까요.
실제로는 흥행에 매우 신경쓰는 것 같습니다. <올 더 머니>도 윤리, 도덕적 책임에서 보다는
케빈 스페이시로 인한 흥행 실패 시 손해보다 재촬영 비용이 더 싸다고 하며 제작사를 설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혼자서 이러저러한 생각만 하다가 리들리 스콧이 직접 종교에 대해 얘기한 적 있나해서 검색했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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뙇-!
이럴 때 킹받는다고 하나요. 저 고집스러운 표정을 보세요. 
그래도 성경을 소재로 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성경은 얼렁뚱땅 창조자와 엉망진창 피조물의 천방지축 생난리
=장엄한 스펙타클의 무궁무진한 소재집이죠.

어쨌든 감독이 갑자기 왜 나폴레옹에게 관심을 가졌을까 궁금했는데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이런 엄청난 인물과 어마어마한 역사를 영화로 어떻게 만들었을까 기대를 많이 했는데-
어떡해, 프랑스 사람들이 못마땅해한다더니 정말 그럴만하더라고요. 
3시간에 가까워서 그 시기 프랑스 역사를 다 갈아 넣을 줄 알았는데 단촐하게 주제를 두 가지 정도로 압축했습니다.
전투 몇 개와 조세핀과의 관계. 워털루보다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 힘을 더 준 것 같습니다. 
호수 속으로 속절없이 빠져드는 병사들과 말들의 번지는 핏물을 상당히 매혹적으로 찍어 좀 죄책감이 드는데, 
<프로메테우스> 첫 장면과 <엑소더스-신들과 왕들>의 홍해와 무리하게 연결시키자면 확실히 진화론자이신 것 같기도?
생명은 물에서 나왔으니 갈 때도 흙말고 물로 돌아가라 일까요?
프랑스 군대를 정비하여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폴레옹 법전으로 전 유럽 민법에 영향을 미치는 등 (위키피디아 잠깐 봄)
어마어마한 업적들을 남긴 문제적 인간을, 부인이 바람 핀다고 허구헌날 눈물 콧물 뽑으며 울고 불고 짜고,
이혼한 뒤에도 전부인에게 질척거리고 불임의 공포에 시달리는 갱년기남으로 묘사했습니다. 
리들리 스콧 영화에서 진짜 처음 보는 적극적인 조롱인듯;;;
프랑스에 대해 영국인이 일반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순수한 악의로 봐도 될까요?
무심한 리들리 스콧에게는  스스로 황제-신이 된 영웅이라도 결국엔 실패작인 것입니다(더군다나 프랑스인).
그리고 영화는 Lulu에게 바쳤는데 감독이 키우던, 무지개 다리를 건넌 개;;;라고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아무리 봐도 이것도 좀 여엇인 것 같은데;;;

나폴레옹의 업적을 조세핀과의 관계성 하에서 재평가하고 싶었으면 차라리 전투씬을 덜고 둘의 역학 관계에 더 집중하지 그랬냐는 평이 있습니다. 

https://variety.com/2023/film/reviews/napoleon-review-ridley-scott-joaquin-phoenix-123579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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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위의 평에 공감합니다. 감독이 나폴레옹의 career 재해석 보다는 핏물이 아련하게 번지는 아우스터리츠 전투와  
초인이 눈물 닦고 콧물 닦는 궁상맞은 모습을 꼭 함께 보여주고 싶어했고, 그래서 감독 본인은 (남의 나라의) 장대한 역사를
망설이지 않고 과감하게 압축하고 만족했을 것 같습니다.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제가 리들리 스콧과 비교하면서 보는 감독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입니다.
리들리 스콧이 무신론자로 자처하면서도 허접한 피조물을 통해 상향하여 창조자의 불완전성을 펼쳐 보인다면
(또 본인이 스크린에 장엄하게 펼치고 싶은 근사한 장면을 제공한다면 소재를 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작이 가능한 거겠죠. 
오리지날 대본은 별로 없고요), 진짜 무신론자적인 크로넨버그는 주인공들 위에 창조자가 없으므로 주인공들이 복제되는 문제에
하향적으로 천착하는데, 물론 원본들에 매우 심각한 문제가 있거나, 복제 과정에 불순물이 섞이거나 해서
모든 것이 다 처참하게 멸망하고 말죠. 아멘.

그런데 아들 크로넨버그는 복제가 꽤 잘되었는지 아버지와 비슷한 분위기의 영화들로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으니
아버지 크로넨버그는 본인이 이제까지 추구해온 주제를 전복하는 영화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역시 무신론자였다가 죽을 때가 다가오니 기독교적 내세를 슬금슬금 부러워하는 우디 앨런보다는 화끈하게 말이죠. 아, 이런 또 우디 앨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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