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낭] 과자 워스트 '산도'

2021.11.01 20:55

chu-um 조회 수:680

즐거운 과자 이야기 생각하신다면 뒤로가주세요. 요즘 우울한 제 기분이 반영되어 글 분위기가 어둡습니다. 


산도를 제가 돈 주고 사먹은 적은 없습니다. 저에게는 가장 흔한 과자였기 때문이죠. 집에 가면 항상 있는 과자.

아버지는 자주 산도를 사오셨습니다. 퇴근하는 그 분의 한 쪽 손에 봉다리가 있다면 거의 매번 산도였습니다. 작은 실망들이 매번 쌓였죠. 왜 맨날 산도지. 산도지옥인가. 

저는 매번 확실하게 실망의 어필을 했습니다. 나는 00 좋아하는데요. 산도는 이제 그만 먹고 싶어요. 등등

그래도 그 실망이 별거 있겠습니까? 그래도 명색이 과자인데. 매번 실망했지만 매번 먹었어요. 맛이 없진 않았거든요. 저는 아이였구요. 

산도가 뭔지 아시죠? 샌드위치 쿠키인데 일본어로 산도입니다. 쿠키 두개 사이에 크림 들어있는 그 과자. 

꽤 옛날 과자라 모르시는 분들도 계실텐데 한 때 국민과자였습니다. 


몇년 전, 진열대에 놓여져 있는 산도를 보고 어린 시절 작은 실망들이 다시금 생각났고 어른이 된 시선으로 복기해보았습니다. 

아버지는 분명히 내가 싫어한다는 걸 알면서도 왜 매번 산도를 사오셨을까? 

악의없는 무관심이었을까? 실망하는 내 모습에 어느 정도는 고약한 심보로 사오신걸까?  의식하지 못하는 이기심? 아 모르겠다. 그 사람은. 정말 어떤 사람인건지...

어른의 시선으로도 잘 모르겠더군요. 어쨌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진열대의 산도를 사서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아버지 좋아하는 산도 사왔어요.'


굉장히 당황스런 얼굴로 저를 한참을 쳐다보다가 나직하게 말하더군요. 


'....네가 좋아하는거지. 난 산도 싫어해. 가져가라'


별로 충격적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기억이 잘못된건지,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한건지. 서로의 역사를 되짚어 부질없는 과거의 진실을 찾고 싶지 않았어요.

단지 그 말을 듣는 순간에 유일한 진실은 지금 이 순간, 우리 두 사람은 산도를 싫어하고 있구나. 였어요. 그게 유일한 진실이었죠. 

관계가 잘못되는 것은 인과적이지 않습니다. 운명적이고 직시적입니다. 우리 둘의 운명이 가리키는 것은 우리 둘 다 싫어하는 그 산도였습니다. 


집으로 가던 중, 들고 있는 산도를 버리려고 했다가 문득 한 봉지를 뜯어서 먹어보았습니다. 

미묘한 맛이었어요. 리뉴얼을 한 건지 맛이 세련되졌다고 해야하나. 먹을만 하더군요. 



편안하고 싶어요. 요즘에는 특히. 힘들군요. 이렇게 한가득 내뱉으면 조금 나아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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