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스캔라인

2023.12.16 16:45

돌도끼 조회 수:108


90년대 중후반쯤 되면 시디롬이 컴퓨터 표준 장비로 보급됩니다.
그에 따라 게임 공급 매체도 시디로 바뀌게 되는데, 플로피 시절까지만 해도 가장 규모가 컸던 것도 크기가 50메가가 채 안되었었습니다. 근데 시디의 용량은 650메가... 갑작스레 너무너무 커져버린 공간을 대체 어찌 채우나... 싶었더니만 그까이거 별 일도 아니었어요.

멀티미디어 시대가 온 거죠. 영상과 소리의 데이터는 그 크기가 너무너무 커서 시디에다 그걸 넣었더니 그까짓 600메가 바로 차버린 거예요. 그래서 시디 두장세장짜리 게임들도 막 나오게 되었죠.

수퍼뷔지에이의 보급과 시피유 고속화로 320x200에서만 놀았던 게임 해상도도 640x480으로 뻥튀기 되었습니다.

그치만, 동영상은 그 덩치가 너무너무 컸기 때문에 기존 320대의 해상도로만 만들어도 시디 두어장은 가볍게 채워버렸어요.
거기다, 고해상도 동영상을 돌리기에는 아직 시퓨 파워도 모자랐고 해서 동영상은 여전히 저해상도에서 놀았습니다
본게임은 고해상도인데 중간중간 나오는 동영상이 저해상도면 폼이 안나잖아요.

그래서 게임제작사들이 애용했던 편법이 스캔라인이었습니다.
스캔라인은 화면에서 가로로 한줄씩 건너서 까만줄이 죽죽 그어져보이는 그겁니다. 원래는 티비가 인터레이스로 그림을 전송하면서 생기는 빈틈이었던 것 같은데 아날로그 시절의 상징이기도 하죠. 완전 디지탈 시대인 지금도 영화같은데서 옛날 방송 흉내를 내고싶을 때 화면에 (눈에 잘 띄도록 아~주 굵은) 가로줄을 죽죽 그어서 보여주고 그러죠.

이 스캔라인은 일종의 화면보정 필터 역할도 했습니다.
320x240짜리 동영상을 스캔라인 먹여서 640x480으로 뻥튀기해서 보여주면 바보같은 사람눈은 마치 고해상도 영상을 보고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게 되었던 거죠.

당시의 컴퓨터 동영상은 미숙한 압축기술 때문에 압축 노이즈=깍두기가 무지 심했는데, 스캔라인은 이 깍두기까지 잘 안보이게 가려주는 역할도 했습니다.
게임 용량과 시퓨 파워를 절약하고, 사람 눈에는 실제보다 더 미화되어 보이니 당시로선 썩 쓸만한 거였죠.

근데, 이 스캔라인이 21세기가 되자 세상 애물단지로 전락했어요.
90년대 중반엔 640x480이 최고 잘나가는 고해상도였는데 기술이 점점 더 발달하면서 데스크탑 해상도는 점점 더 높아져갔죠. 그래서 그런 고해상도에서 90년대 고전 게임을 실행시키면 무슨 우표딱지만한 화면이 나와서, 그시절을 회고하는 에뮬레이터들은 원본보다 확대된 화면을 보여주는 걸 기본으로 합니다.
거기에 2000년대가 되면 아날로그에서 디지탈로 전환이 일어나죠. 이게 문제였어요.
아날로그 모니터는 정해진 해상도란 게 없어서 스캔라인이 있건 없건 아무 해상도도 다 그럴듯하게 보여줬어요. 하지만 디지탈 모니터는 패널 해상도란 게 있어 거기 딱 맞았을 때만 제대로된 그림을 보여주죠.

스캔라인은 한줄 건너 하나씩 까만 줄을 표시하는 거니까 그걸 애매하게 확대하면 얼룩덜룩하고 알아보기도 힘든 그림이 되어버리는 거였어요. 스캔라인이 뭉개지지 않고 제대로 나오려면 정수배로 확대를 해야하는데, 640x480 화면을 정수배로 확대하기에는 초기의 디지털 모니터 패널 해상도가 애매했던 거예요. 아나로그 모니터라면 전체화면으로 보면 해결되지만 디지탈 모니터에서는 전체화면과 데스크탑 화면의 해상도가 똑같으니 그것도 안통했어요.
그래서 깨끗한 그림을 보려면 갑갑하더라도 조그만 원본 화면으로 봐야되고 좀 시원스레 확대해서 보려하니 아주 요상하게 뒤틀린 그림이 나오는 거였죠.

시에라의 가브리엘 나이트 2편은 스캔라인을 써서 만든 동영상을 잔~뜩 집어넣은 게임입니다.
가브리엘 나이트 시리즈는 시에라 게임들 중에서도 평판이 좋고 그중에 2편이 최고작 소리를 듣고 있죠.
그래서 나온지 한참지난 2000년대에도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붙잡고 플레이하고 있었는데, 이넘의 스캔라인 때문에 영상이 알아보기도 힘들게 나오니 사람들 불만이 쌓이게 됩니다. 거기다 또 좀 많이 나와야죠. 시디 여섯장짜리 게임이니...

그러다 어떤 사람이 게임 스크립트를 개조해서 스캔라인을 없애버리는 방법을 제시했어요.
사람들은 좋아라하고 너도나도 패치를 했죠.

그리고 다시 시간이 꽤 지난 지금.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일단 모니터 기본 해상도가 그때와는 비교도 안되게 올라가서, 스캔라인 있는 영상을 정수배로 확대해도 문제없이 커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업스케일링 기술도 발달해서 이제는 꼭 정수배가 아니더라도 스캔라인이 그렇게 크게 거슬려보이지 않게 확대할 수 있게 되었어요. 문제가 해결된 거죠.

그럼 이제 가브리엘 나이트 2도 스캔라인이 있던 원래 모습으로 다시 플레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스캔라인 싫다고 너도나도 없애는 패치를 했지만 언젠가 기술이 좋아져서 스캔라인을 다시 쓸 수 있게 될거란 생각을 아예 안한 거예요.
지금 구할 수 있는 가브리엘 나이트 2는 전부 스캔라인이 제거된 버전입니다.

과도기에 생긴 문제로 어쩔 수 없이 썼던 임시방편이 과도기가 지나 문제가 해결된 다음에도 그대로 남아버린 거죠.


스캔라인은 깍두기를 살짝 덜 두드러져 보이게 만드는 효과도 있지만, 까만 줄을 추가하는 거니까 당연히 원본보다 밝기가 어두워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스캔라인 쓰는걸 전제로 만든 영상은 그것도 감안해서 만들어야죠. 그런데서 스캔라인을 빼버리면 만든 사람들이 의도한 것보다 더 밝은 그림이 나옵니다.


시에라 게임을 요즘 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scummvm으로 돌리고 있을텐데, scummvm은 자체 옵션으로 동영상에서 스캔라인을 켜거나 끌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합니다. 이게 다른 거에선 다 잘 되는데 가브리엘 나이트 2에서만 안됩니다. 게임 스크립트 자체를 조작해버린 거라서.

스캔라인을 보는게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아서, 패치에서 추가된 파일 일부를 다시 빼버리면 된다고는 해요. 하지만 불완전합니다. 거기다 게임하는 도중에 어떤 문제를 일으킬 지 모르는 불안요소도 안고 있죠.
가장 확실한 방법은 패치가 전혀 안된 원본 시디 6장을 부지런히 갈아끼워가면서 하는것 밖에는...
시디 갈아끼우기 귀찮다고 하드디스크에 몽땅 다 몰아넣는 패치를 하면(현재 고전게임 판매 사이트에서도 다 이런 형태로 공급이 되죠) 스캔라인도 같이 없앱니다.
어찌어찌 스캔라인을 다시 살렸더라도, 여기다 자막 추가 패치라도 깔게되면 스캔라인이 또 영구제거 됩니다. 거기선 더이상 살리는 방법도 없는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런저런 패치 만드는 사람들이 다들 스캔라인 없애는 걸 아예 기본으로 깔고 들어간 거예요. 혹시라도 이 좋은 패치를 아직 안하신 분이 있을까하는 친절한 마음에... 그때는 정말정말 스캔라인이 미웠나봐요.

스캔라인 쓰는 시에라의 고해상도 게임들이 한둘이 아닌데 그중에 가브리엘 나이트 2만 너무 인기가 있었던건지, 혼자서 스캔라인을 제거하는 나름의 특별대우를 받았던 건데 시간이 지나니 그게 독이된 거죠.

예 뭐... 스캔라인 없이 깍두기가 더 선명하게 잘보이는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테고, 더 밝아서 디테일하게 더 잘보인다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테고 취향일 수 있지만, 게임이 나왔던 당시의 모습 그대로 플레이할 수 있는 선택권 정도는 있는게 좋겠죠.



(스캔라인 없는) 가브리엘 나이트 2 제1장 오프닝. 밤인데도 온통 훤해서 어둡다는 생각이 들질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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