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나그네

2021.09.20 15:25

어디로갈까 조회 수:666

보스가 계획에 없던 작업 하나를 던져줘서 이 명절 휴일에 집에 못가고 책상 앞에 앉아 있습니다.
한국의 고유한 축제일을 앞두고 제대로 발목 잡아준 보스에게 감읍하며 사흘 뒤까지 끝내야 하는 일이라 맥주 마시며 작업 중이에요. 칭다오는 제 입맛에 맞아서 오르는 혈압을 내려주는군요. 몇 달째 책상에 세 시간 이상을 앉아 있지 못하는 체력이 된 터라 하루에도 몇 번씩 침대에 십분쯤 눕는 걸로 버티고 있어요. 숨소리까지 들리는 이명현상 때문에 좀 괴롭기도 하고요. 

추석과 설날은 한국의 오랜 전통으로 내려온 축제일이지만, 못 만나던 가족들이 모여 한바탕 놀아보는 축제일이 아니라 성가시고 부담스러운 날이라는 의견이 대세가 되었죠. 단지 여성들에게 부엌일이 늘어나는 날로 인식되고 있고요. 
서구사회의 축제일은 즐겁게 노는 시간으로 정의되기 때문에 대부분의 근로/노동이 정지됩니다. 평소 억압되는 상태를 사는 인간들이 일년에 한두 번은 그렇게 해소해야 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나라 명절에도 차례상 차리는 일이 점점 줄어드는 추세인 것 같아요.

우리집은 몇년 전부터 아버지가  차례상을 차리지 말고 고궁 탐방이나 하며 명절을 즐기자라는 제의를 하는데,  어머니가 단호하게 거부하십니다. 일 년에 두 번 정도는  조부모님, 시부모님에게 평소 안해 먹던 상차려서 인사드리고 싶다고요.
좀전에 아직 집에 못가고 있는 이유를 알리느라 어머니께 전화드렸더니 고자질하시네요. 아버지는 마늘 까고 쪽파 다듬느라 입이 일센티미쯤 나와 있고 막내는 다행히 이런저런 전 부치는 일을 재미있게 잘하고 있다고요. 두 남성 분이 제 몫이었을 일을 하면서 여성이 부엌에 갇히는 압박이 어떤 건지 제대로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호호

추석은 어떤 의미로든 어떤 감정으로든 어떤 성가심으로든 일년에 두 번 있는 명절의 시간입니다. 듀게님들, 집에 못 가는 제몫까지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흐르고 변하는 것들에게 치명적으로 상처받은 것들은 잠시 마음에서 내려놓으시고요. 해피 추석~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5782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4317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3014
117237 The Unholy Wife (1957) catgotmy 2021.09.26 218
117236 오징어 게임 2화를 보고(간단 줄거리 있음) 사팍 2021.09.26 340
117235 오징어 게임 배우들, 김주령, 정호연, 한국의 케이블TV계 시상식은 존재하는가? tom_of 2021.09.26 487
117234 '오징어게임'에 등장하는 게임들에 관해서...(스포일러) [23] S.S.S. 2021.09.26 851
117233 데스게임 혐오, 주디스 버틀러, 파일 보관법, MZ라는 환각 [5] 예상수 2021.09.26 498
117232 넷플릭스 카우보이 비밥 오프닝 [16] Lunagazer 2021.09.26 656
117231 자신은 오징어 게임의 말일뿐 [4] 가끔영화 2021.09.26 398
117230 [넷플릭스바낭] '오징어 게임' 덕에 덩달아 뜨고 있는, '아리스 인 보더랜드'를 봤습니다 [16] 로이배티 2021.09.26 872
117229 월급 250만원, 6년 근무, 퇴직금 50억 [10] 사팍 2021.09.26 1000
117228 오징어게임 1화를 보고 [4] 사팍 2021.09.26 554
117227 한길로 쭉 걸어보는게 소원 [2] 가끔영화 2021.09.26 273
117226 유투브에서 또 기인을 한분 발견했습니다. [1] Lunagazer 2021.09.25 765
117225 화장실 청소 잡담(더러움주의) [1] 메피스토 2021.09.25 567
117224 출생률이 마이너스인데 [3] 청색 2021.09.25 581
117223 쓸데없는 잡지식 [9] daviddain 2021.09.25 470
117222 디아블로 2가 부활했군요. [8] Lunagazer 2021.09.25 440
117221 보이스 잘만들었어요. [2] woxn3 2021.09.25 434
117220 아마존 프라임 - 거짓말(한국영화 아님) [7] 부기우기 2021.09.25 547
117219 수색자 (1956) [8] catgotmy 2021.09.25 337
117218 어제 미국에서 디어에반핸슨이 개봉했는데, 평가가 안좋네요 얃옹이 2021.09.25 325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