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촌 동생과의 만남 - 2

2021.09.22 21:46

Sonny 조회 수:474

사촌동생과 이런 저런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서도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주장들에서 남초 커뮤니티의 '쉬운 분노'가 느껴져서 조금 당황스러웠습니다. 온라인에서 키배를 뜰 때야 정론으로 반박하면 그만인데, 지인이나 가족같은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네 말이 틀릴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정면으로 하는 게 쉽지 않죠. 물론 저의 나이나 그가 제게 품고 있는 존경심을 이용하면 얼마든지 찍어누르는 것도 가능하지만, 굳이 그러고 싶진 않았습니다. 아직 그는 어리고 저는 그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고 그는 저의 논리배틀 상대편이 아니니까요.


이를테면 그는 데바데란 게임을 하면서 중국인들 욕을 엄청나게 했습니다. 그 게임에는 중국인들이 되게 접속을 많이 하더군요. 닉네임도 한자로 써져있고 프로필 소개도 다 중국어였습니다. 사촌동생 말로는 중국인들은 게임 플레이가 답답하고 제대로 할 줄도 모르고 어리버리를 많이 탄다고 합니다. 이른바 "민폐를 끼치면 안된다"는 집단 속의 역설적인 이기주의같은 거죠. 여러명이서 플레이하는만큼 당연히 타 플레이어에 대한 의존도도 높아지고 협력도 중요해집니다만 이른바 비자발적 트롤들이 구조적으로 안생길 수가 있는가 싶은 의문이 들긴 했습니다. 이를테면 저는 벌벌 떨면서 플레이를 했는데 시작하자마자 살인마한테 걸려서 바로 죽었고 그런 저를 구해주느라 다른 플레이어들이 자기가 죽을지도 모르는 리스크를 감수해야했거든요. 그 때도 저는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너무 미안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인이라고 저같은 경우가 없진 않겠지요. 승리에 집착한다기보다는 적당히 소름끼쳐하면서 좀 못할 수도 있는 거고. 한국인이 못하는 경우도 짜증이란 감정을 기준으로 중국인 게이머의 실패로 합산되진 않을지 그 집계의 공정함에 조금 더 의심을 표하게 되기도 하고...


이건 딩초(...)였을 때 제 사촌동생이 롤을 하면서 계속 보여주던 현상이기도 합니다. 타인의 실패에 유난히 민감하고 그걸 악착같이 비난하면서 짜증을 내는 문화가 게임이란 구조 안에서 이미 자연스레 자라나게끔 설정이 되어있는 거죠. 저는 1:1이 주가 되는 스타크래프트와 1:1 대전격투게임인 킹오파, 철권 같은 게임을 즐기네는 세대였습니다. 그에 반해 제 사촌동생은 다수의 타인과 협력을 해서 뭔가를 성공해야하는 구조의 게임에 훨씬 익숙하고 그걸 당연시 합니다. 롤과 오버워치 같은 게임 안에서 '존나 못하는 xx'를 가려내는 일에 익숙한 제 사촌동생 세대와 저는 뭔가 좀 다를 수 밖에 없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협력이 필수인 게임을 하면서 제 사촌동생 세대는 다수의 비난을 너무 당연시하는 것 같은 불안도 느꼈습니다. 협력을 통해 서로 보완하는 게 아니라 완벽하지 못한 개인을 쳐내고 떨궈내는데 더 익숙한 거죠. 실제로 데바데를 하면서 제 사촌동생은 끊임없이 다른 플레이어들을 평가했습니다. 누가 발전기를 더 돌렸어야 하는데, 누가 자기를 대신해 어그로를 끌어줘야 하는데 등등. 물론 자신도 잘 못할 때가 있었고 그 때는 또 자기가 못했다고 저한테 해설을 해주기도 했습니다만 중요한 건 자기를 향해 관대한만큼 타인을 향해서도 관대할 수 있냐는 것이죠. 원래 인간은 자기중심적이고 타인에게 더 엄격하기 마련이니까요.


두번째로 배달원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제 사촌동생은 과격하게 운전하는 어느 라이더가 동네 할아버지를 거의 칠 뻔한 이야기를 하면서 격분하더군요. "딸배 놈들"이란 단어를 쓰면서 그런 놈들은 정말 싸가지가 없고 다 처벌해야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배달원의 과격한 운전을 비판했다면 저도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을지 모르지만, "딸배"라는 단어를 쓰는 것에는 어쩔 수 없이 한마디 하게 되더군요. 그래서 조곤조곤 이야기했습니다. 너가 화나는 건 당연하다, 나라도 아마 그 배달원에게 화가 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 배달원들이 자기 목숨 아까운줄 모르는 미치광이들은 아니다. 업체에서, 음식점에서, 고객에게서 왜 빨리 안오냐고 닥달을 받고 소위 말해 쪼여진다. 너는 아직 현장 당사자들의 말을 안들어봐서 그렇게 말하는 거겠지만 내가 당사자들의 말을 들어본 바로는 이게 절대 개인의 인성 문제나 몇몇의 운전실력 문제가 아니더라. 그 사람들한테 화를 내면서, 그 사람들을 그렇게 운전하게끔 내모는 기업체들을 더 욕하는 게 나는 맞다고 생각한다... 정도로요. 사촌동생은 다 듣긴 들었습니다. 그래도 자긴 역시 그 배달원에게 너무 화가 난다고 하더군요. 그들이 단순한 폭주족이 아니라는 걸(설령 폭주족이라 해도 단순히 저주만 하고 끝날 일은 아니겠지만), 그리고 구조에서 생기는 폭력의 하청 문제를 완전히 납득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사촌동생과 함께 <보이스>란 영화를 같이 봤습니다. 보이스피싱 내부조직에 전직 형사가 침투해서 싸운다는 이야기인데, 저는 그 영화를 보고 사촌동생이 개인의 도덕적 실패와 구조적 유인이 얼마나 끈끈하게 엮여있는지 한번쯤 생각하길 바랬습니다. 하지만 그게 한번에 그렇게 딱 각성이 되진 않겠죠. 어쨌든 제 사촌동생은 그 영화를 즐겁게 보았고 저는 그 재미를 해칠까봐 괜한 소리를 더 하진 않았습니다. 혹시 여성인권에 대해서 펨코식의 논리를 펼쳐놓으면 정말 말로 개발살(?) 내버릴려고 했지만 그런 말은 다행히 나오지 않아서 저도 일부러 훈계를 하진 않았어요. 어찌됐든 저는 그가 그렇게 분노를 하더라도 조금 더 근본적인 주체에게 그 분노를 향했으면 좋겠고, 저를 계속 대화상대로 여겨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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