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문 잡담

2023.12.10 20:27

돌도끼 조회 수:361


1980년대에 대초능력자 유리 겔러가 내한했습니다.
지금이야 이 유리 겔러라는 인물은 사기꾼인 것으로 판별되었다고 합니다만 그때만 해도 진짜 초능력자 신분으로 활약하던 중이었죠

(무려 초능력으로 북한 땅굴을 찾아달라는 정부 초대로 왔던 거니까........)

유리 겔러는 황금시간대 TV에 출연해서 갖가지 초능력들을 보여주었고 그로인해 대한민국은 쇼크상태에 빠집니다.
유리 겔러의 초능력이란 게 다 트릭이었다지만 당시에 직접 봤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기적을 본 거라고 믿었죠.


그해 말쯤인가... 소설 『단』이 출간되어서 공전의 대히트를 칩니다.

이 『단』이라는 소설은 간단히 말하자면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무협지였어요.

그런데 때마침 불고있던 초능력에 대한 관심 속에서, 이 소설은 무협지 속의 갖가지 놀라운 무공들이

실제로 있는 초능력-그것도 누구든 열심히 수련만 하면 얻을 수 있는-이라고 주장했던 겁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거기 넘어갔죠.

평상시였다면 그런 헛소리에 사람들이 쉽게 현혹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막 유리 겔러의 기적을 목격한 직후였단 말입니다.

놀라 정신이 혼미해져있는 사람들에게는 『단』에서 이야기하는 온갖 구라들이 진짜인것 같았고 그덕에 거기 빠져든 사람들이 무수히 나왔죠.

『단』은 잘팔린 소설에서 멈추지 않고 일대 사회현상을 일으키고 그 후의 대한민국에 크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환빠'라는 사람들의 시발점도 『단』입니다.)

지금이야 잊혀진 옛날 소설책일 뿐이지만요.


얼마 후에 고려원이라는 출판사(지금은 망하고 없음)에서 중국 문단이 자랑하는 신필 김용이 쓴 역사소설 『영웅문』을 출간합니다.

'중국문단이 자랑하는 신필 김용? 생전 처음 듣는 사람인데 그게 대체 누구람?'

뭐... 상관 없었어요. 『영웅문』 또한 공전의 대히트를 합니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영웅문』은 무협소설입니다.

그것도 대한민국에 본격적인 무협소설의 전성시대를 끌어낸 기념비적인 작품이죠.
무협소설이 국내에 처음 인기를 끌기 시작한 건 60년대. 초기 몇년간은 국민적인 관심을 끄는 열풍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곧 시들해졌고 얼마 지나지않아 좋아하는 사람들만 좋아하는 서브컬쳐가 됩니다.

그것도 '만화방'이라고 하는, 사회적 시선이 곱지 않은 장소에서만 접할 수 있는 아주 하위의 서브컬처로 전락했죠.

그랬던 무협지가 『영웅문』을 시작으로 해서 만화방을 벗어나 다시 주류에 진출한 겁니다.

이때는 60년대처럼 그렇게 반짝하고 끝난 것도 아니었어요.

그 후로 무협소설은 서점에서 꾸준히 한자리를 차지하는 단골코너가 되었죠.

그렇게 무협지가 다시 양지에 나올수 있게 되는데 유리 겔러가 바람잡이 역할을 톡톡히 했다고 볼수 있을겁니다.
유리 겔러가 초능력에 대한 관심을 최대치로 끌어올렸고,

『단』이 나와서 기존에 무협지라고 알려져 있는 책들이 사실은 진짜로 존재하는 초능력자들의 이야기였다는 썰을 풀어,

사람들이 거기 솔깃해 있던 와중이니 밥상은 차려졌고,

거기 짠하고 나타나서 숟가락만 걸치면 되는 상황이 된겁니다.

단, 무협지라는 명칭은 곤란했을 겁니다.

『단』이 장풍이니 경공이니 하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초능력이며 다 진짜라고 한창 분위기를 잡아놨으니

무협지측에서도 뭔가 진짜처럼 보이게 만들 허울이 필요하겠죠.

그래서 역사소설이라는 타이틀을 선택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영웅문』은 만화방에서나 돌아다니는 허무맹랑한 무협지가 아니라 사실을 바탕으로 쓴 역사소설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또 거기 넘어갔죠ㅎㅎ

역사소설인줄 알고 책을 손에 들었다 하더라도,  일단 책을 읽기 시작하면 이미 늦은겁니다.

역사소설이든 무협지이든 그딴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재미었었거든요.

앞서서 유리 겔러와 『단』이 바람을 잡아주긴 했지만 결국 『영웅문』의 콘텐츠가 뛰어났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던 거죠.

사람들은 이게 제대로된 역사소설이 아니란건 금방 눈치챘지만, 한번 빠져든 건 어쩔 수가 없죠.

지금은 유리 겔러와 『단』 둘 다 잊혀진 존재지만 『영웅문』 만큼은 아직도 사람들 기억속에 생생합니다.

『영웅문』은 『사조삼부곡』이라고 하는 김용 대표작 시리즈의 국내 번역명입니다.
당시 관행상 원작자의 허락이나 판권취득절차 없이 내놓은 해적판이라는 것이 흑역사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불티나게 팔리고 팔려서 출판사가 망할 때까지 끝없이 재판되어서 국내 출판역사에 굵은 한획을 그은 대히트작이 되었습니다.

해적출판으로 부당이익을 취하긴 했지만 그래도 무협의 중흥을 가져오게될 작품으로 『사조삼부곡』

그 중에서도 『사조영웅전』을 선택한 고려원의 안목만은 탁월했다할 수 있습니다.

소설 자체가 명작이라 이거 한번 읽으면 그 세계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는 흡인력이 있기도 했거니와,

『사조영웅전』은 『단』이 잡아놓은 분위기에 아주 적절하게 녹아들 수 있는 작품이었기 때문입니다.

무협소설의 대가라는 사람들 중에서도 무공 이론쪽으로는 김용과 양우생 이 두사람을 당해낼 사람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공전절후.

두사람은 내공이니 무공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 말하자면 '설정'이나 '고증'의 측면이 너무 정교해서 읽다보면 저도 모르게 빠져들게 만듭니다.

이 '무공 고증'이라는 것이 실은 건담에 나오는 미노프스키 물리학과 같아서, 정말로 캐고 들어가면 전부 개뻥입니다.

하지만 언뜻 보면 그럴듯하단 말입니다.

김용이 어려운 한의학 용어들을 동원해가며 묘사하는 내공의 원리에 대한 설명을 읽고 있으면 진짜로 그럴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거기다 『사조영웅전』은 김용의 소설들 중에서도 파워 밸런스가 아주 적절하게 잡혀있는 작품입니다.

작품 내내 주인공이 끊임없이 성장해 가는데,

『드래곤볼』 식으로 터무니 없는 파워인플레이션이 일어나서 이야기가 붕괴되는 것도 아니고

전체적인 등장 인물들의 무공 수준 설정이 단계별로 잘 잡혀있고

그 속에서 주인공이 착실하게 한걸음씩 위쪽 단계로 진입해갑니다.

(2부인 『신조협려』만 가도 주인공 양과가 불과 몇달만에 절정 고수가 되죠. 3부의 장무기는 단 몇시간 만에...)

무공 묘사도 (후기작들에 비하면) 지나치게 허무맹랑하지는 않은 편이고,

거기다 그럴싸해보이는 이론설명까지 붙어있고,

단계를 밟아가며 점점 강해지는 주인공의 모습까지 있으니,

『단』이 바람을 잡아놓은 '무협지 속 무공이 사실은 수련해서 얻을 수 있는 초능력'이라는 분위기에 딱 맞아떨어졌던 겁니다.

거기다 또 역사소설이라지 않습니까.

징기스칸 같은 실제 역사상의 인물들도 나오고요.

그러니 그만큼 설득력이 더해졌겠죠.

만약 『천룡팔부』 처럼 바위같은 건 우습게 가루로 만들어버리고 사람이 하늘을 날아다녀도 이상하지 않은

지나치게 황당한 내용의 작품이었다면 『사조영웅전-영웅문』 만큼의 반향을 일으키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싶어요.

『사조영웅전』이 딱 적절하게 당시 분위기에 맞았던 거죠.

그러니... 거기 홀랑 넘어가서 정말로 열나게 수련을 하면 『영웅문』에 나오는 것 같은 내공을 쌓을 수 있을거라고 믿고 단학수련원을 찾았던 초딩 젊은이들도 있었습니다.

적어도 80년대 당시에는 그런 것들이-무협지에 나온 그대로까지는 아니더라도-어느 정도 선에서는 진짜로 가능할 거라고 진지하게 믿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거죠.
뭐... 옛날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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