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만남, 그의 말

2019.01.02 08:09

어디로갈까 조회 수:1338

새벽, 수산시장에 가서 청어를 샀습니다. 냉장고를 열며 '오늘은 생선이나 한 마리 먹어볼까?' 마음먹었을 땐 사실 도미를 염두에 뒀었어요.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좌판에 누워 있는 도미들이 가자미처럼 납작한 것들 뿐이었습니다. 
(저는 왜 가자미하면 항상 넙치까지 생각날까요. 이런 식의 제 연상을 그들이 기분 나빠하지 않을런지.) 
그래서 주인이 권하는 대로 청어로 바꿔 사고 말았어요. 
청은색 빛깔이 예쁜 청어를 바구니에 담고 주차장으로 걸어오는데, 갑자기 청어가 부스럭 소리를 내더니 덮고 있던 기름종이 너머로 살짝 얼굴을 내밀더군요. 그리곤 눈을 깜빡거리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어요.

" 청어로 살아간다는 게 쉽진 않았어요."
- 그, 그랬구나. 결국 이렇게 장바구니에 누워 있게 해서 미안해.
" 아니, 당신을 이해해요. '물고기나 한 마리 먹어볼까?' 생각하는 건 왠지 평화롭고 기분이 좋아지는 일일 테죠."
- 바다에서 살아서 이해가 깊구나. 
" 아, 저 파란 하늘을 보니까 바다가 생각나요. ”
- 어느 바다에서 살았는데?
" 이제와 그건 말해 뭐하겠어요..."

무안한 마음으로 청어의 시선을 따라 올려다보니, 정말 파란 하늘이었습니다. 그믐달 옆에 금성이 떠 있더군요.
그런데 하늘에 거대한 고래가 제플린 비행선처럼 헤엄쳐 가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놀라서 어어?  입을 벌리다가 그때야 제가 꿈 속인 것을 알게 됐어요. 침착해진 저는 청어에게 대담한 제안을 했습니다.

- 청어야. 꿈에서 널 먹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니? 잠깨고 나면 여전히 배가 고플 텐데. 그러니 저기 벤치에 앉아서 나하고 얘기나 나누면 어떨까?
"흠. 청어는 벤치에 앉지 않는 법이에요.” 
- 부탁이야. 거기 그렇게 누웠지 말고 사람으로 변해서 잠시 말동무가 되어줘.
" 물고기라도 상관없을 정도로 외로워요?"
- 외로워서가 아니라 이런 만남이 간지럽고 공허해서 그래.

다음 순간, '펑' 소리도 없이 회청색 양복을 입은 마른 남자가 제 앞에 나타났습니다.
- 저, 이름이...?
“ 여전히 청어라오.”
- ... 그, 그렇군요.
" 꿈에선 내러티브를 아껴야 한다오.  언제 깰지도 모르는 일 아니오?”
- 아끼다니, 내러티브란 게 연료 같은 걸까요?
" 난 그렇게 생각하오.  사람들은 연료가 있어야 내러티브가 움직인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내러티브 그 자체가 연료인 거요.”
청어의 명민함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제가 판단하고 있던 것보다 물고기는 생각이 훨씬 많은 생물인 것 같았어요. 

- 저... 손 좀 줘보세요.
" 비늘 손을 원하오? 아니면 서늘하고 깨끗한 손을 원하오?"
- 나중 것이 좋겠어요.
" 자, 잡아보시오.”

선득했지만 표정이 있는 손이었습니다. 손을 이렇게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메시지'가 있는 손이었어요. 청어도 제 손을 '느끼는' 눈치였어요.
" 당신은 세상의 모든 현상을 메타포로 읽고 있구려." 
측은지심이 묻어나는 어조로 청어가 중얼거렸습니다.
- 글쎄요. 제 주의력을 일깨우는 질 높은 불완전함들에 대해 좀 골똘한 편이기는 해요.
" 질 높은 불완전함이라....그런 것들이 세계를 다시 세워나가는 힘이기는 할 거요." 
이 세상에 대한 경험과 학습에 의한 판단으로 들리는 말이었어요. 청어라면 제가 가지고 있는 해묵은 의문들을 해결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아, 이런!  시간이 다 됐소. 그만 가봐야 하오."
청어가 갑자기 일어서더니 하늘 높이 날아올랐어요. 그리곤 하늘을 유영하고 있는 다른 물고기들 사이로 사라져버렸습니다.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살펴봤지만 더 이상 어떤 물고기가 제 청어인지 알아볼 수 없게 되고 말았죠.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라고 생각하며 저는 황황한 마음으로 두 손을 내려다 봤어요. 
창백한 손바닥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비늘도, 서늘하고 깨끗한 손도. 한 줄 메시지도, 조금 전까지 있던 장바구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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