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ease find me...

2020.03.07 18:45

어디로갈까 조회 수:917

그날 새벽엔 레너드 코헨의 노래가 흘렀습니다. 그 카페에서 팝 음악을 들은 건 처음이었어요. 주인이 수입 오디오 기기 판매를 병행하던 클래식 마니아였거든요.
불밝혀진 바 안쪽에 주인은 자신의 발끝을 내려다보는 자세로 정물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깊은 우물을 들여다보는 듯한 순전한 집중이었어요. 다른 세계에 속해 있는 듯한 낯선 분위기 때문에 평소처럼 바에 마주앉기가 거북했죠. 인사도 안 건네고  캄캄한 구석 테이블로 가서 낮게 중얼거리는 코헨의 메시지를 피하지 못하고 들었습니다.
노랫말이 마음을 파고 들어와 오래 닫혀 있던 제 안의 어떤 문들을 하나 하나 여는 듯했어요. 한마디의 설명도 없는데 그의 슬픔이 고스란히 이해되는 것 같던 감정 전이. 몇년 전 이른 봄, 비 내리던 새벽이었습니다.

그 카페는 경복궁 근처 한적한 골목, 회사에서 십 분 거리에 자리잡고 있었어요. 한옥을 개조한 집이었는데 주인이 거주하며 카페로 운영하던 공간이었습니다. 수면장애로  새벽 드라이빙 후 (주로 북악 스카이웨이) 첫 출근자로 회사에 등장하는 제가 딱했는지,  한 동료가 새벽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장소라며 그 카페를 소개했죠. 새벽엔 가까운 친구들에게만 공개되는 비밀 아지트인데 패밀리 찬스(!)를 쓰는 거라며 주인에게 소개하는 걸로 저를 가입시켜줬어요.

일주일에 사흘쯤, 다섯시 무렵이면 그 곳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한 잔 값으로 커피를 얼마든지 마실 수 있었고, 주인이 소장하고 있는 희귀 음반을 마음대로 골라 들을 수 있었으며, 패밀리 중 누군가가 가져온 빵이나 과일로 아침식사까지 해결되던 마법의 공간이었어요. 주인은 말이 없고 움직임이 조용한 사람이었습니다. 누구에게나 먼 거리를 두면서도 다 괜찮다 라는 포용의 자세를 보여서 그 점이 오만하다는 느낌을 줬어요. 

코헨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무거운 침묵이 실내를 몇 바퀴 느릿느릿 돌았는데도, 비 때문인지 새벽 패밀리 중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한순간, 다른 음악을 얹는 대신 실내 전체에 불을 밝히더니 주인이 내실 쪽으로 사라져버리더군요. 그러자 단순하고도 막연한 갈등이 시작됐죠. 자, 어떻게 할까. 그대로 나가버릴 것인가, 머물러 있을 것인가. 그에게 말을 건네볼 것인가, 책이나 펴서 읽을 것인가. 

그러나 주인이 금세 커다란 박스 하나를 들고 나타나더니 제가 앉은 테이블로 다가왔습니다. 박스 속에 든 건 램브란트의 화집이었어요.
"코헨의 시를 읽어본 적 있어요?"
없다고 고개를 젓자 그가 화집 맨 뒷장을 펼치더니 제게 디밀었습니다.  붉은 잉크로 휘갈겨쓴 커다란 글씨.     
 Maritha, please find me,
 I'm almost thirty.

코헨의 <서른살>이라는 시의 전문이었어요. 짧고도 애절한 연애시였죠. 그 글을 대하노라니  가끔 장미나 튤립 같은 꽃을 한아름 안고 나타나던 주인의 연인이 저절로 떠오르더군요. 제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가 중얼거렸습니다.
" 그 시는 내가 그림에게 바쳤던 마음을 대변하고 있어요.  램브란트처럼 무서운 초상을 그리는 화가가 되는 게 꿈이었습니다."
자신이 해볼 수 있는 노력이나 선택이 더 이상 없어서 상대방이 자신을 발견해주기만을 바라고 기다리는  'find' 에 담긴 갈증과 무력감. 그림에 걸고 있는 한 사랑의 무게를 알 것 같았고, 이제 그 염원을 접고 떠나려는 거구나, 라는 짐작이 뒤를 따랐습니다.

그날 주인에게서 램브란트의 화집 세트를 선물로 받았어요. 왜 내게? 라는 의문에도 불구하고 끝내 거절하지 못했던 건, 그가 의미 없는 사람에게 그 화집을 버.리.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그것은 지대한 슬픔에 대한 저의 예의이자 존중이기도 했어요.

두어 달 뒤 카페는 문을 닫았습니다. '어디를 향해 떠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디로부터 떠나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라고 존 스타인벡이 말했던가요. 새로운 출발을 하는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이 말을 마지막 인사를 나눌 때에도 마음이 깜빡거려서 그에게 하지 못했습니다. 
......
# 어제 모 방송국에 일보러 갔다가 몇 년만에 그와 마주쳤답니다. 뜻밖의 조우였죠. 음향 파트에서 일하고 있더군요.  악수와 전화번호만 나누고 헤어졌는데, 잠들 무렵 이 궁금증이 마음을 문질렀어요.
'이제 그는 이 시를 잊었을까. 잊고 행복한가. Maritha, please find me, I'm almost thirty.'

#  서로 연락하며 살까 싶었는데, 두어 시간 전쯤 그에게서 이런 문자가 왔습니다.
"궁금해도 소식 알길 없어 아쉬웠는데 반가웠음. 이런 메모 보내는 게 잘못하는 짓인지 몰라도 띵똥 벨 눌러봄. 몰랐겠지만 당신에게서 받은 위안이 있었음. 추운 겨울 어린 나무 곁에서 군불 때는 기분이었음. 고마웠음. 소식 전하며 지내고 싶으니 문자 씹지 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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