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영화를 보면서 노래를 잃어버린 적이 두 번 있습니다. <시계태엽 오렌지>에서 알렉스 일당이 어느 소설가 집에 처들아가 강간을 저지르고 패악질을 저지르는 장면이 나오죠. 그 때 알렉스는 싱잉인더 레인을 흥겹게 부르는데 그 중간 중간 사람을 구타하는 리듬이 너무 정확해서 소름이 끼칠 정도입니다. 운이 안좋게도 저는 <사랑은 비를 타고>를 그 때까지 안봤던 상황이었습니다. 이 명곡을 강간 장면의 브금으로 먼저 배운 셈인데... 노래는 너무 기똥찬 겁니다. 그래서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언젠가 원작을 볼 건데 그 때 괜히 그 생각이 나고 찜찜해지면 어떡하지? 다행히도 저는 <사랑은 비를 타고>를 보면서 그 생각을 하나도 하지 않았습니다. 영화가 워낙에 기똥차잖아요. 진 켈리가 가로등을 빙그르 돌 때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오히려 원작 영화로 그 잔인한 장면의 음악을 좀 정화하는 느낌이 들더군요. <시계태엽 오렌지>의 주연배우 말콤 맥도웰이 진 켈리를 실제로 보고 인사를 했더니 진 켈리가 자신을 쓰레기 보듯이 봤다는 이야기를 했었죠. 자기는 연기를 했을 뿐인데 그런 반응이 좀 당황스러웠다고. 저는 진 켈리가 좀 이해가 되더군요. 자신이 만들어낸 그 역작의 노래를 그 따위(?)로 썼으니 누군들 기가 막히지 않았겠습니까. 심지어 <시계태엽 오렌지>는 걸작이 되버렸는데! 그 노래를 그보다 기분나쁘게 망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또 한번은 <45 년 후> 입니다. 45년이란 결혼기간 동안 나름 순탄하게 관계를 유지해오던 부부가 남편의 옛사랑에 대한 충동적 회고와 갈망으로 서서히 분열되어가는 이야기입니다. 둘은 결혼 45주년 파티를 하기로 하고 춤을 출 때 이 노래가 나오는데... 거기서 이 남자를 도저히 사랑할 수 없다는 아내의 환멸에 찬 표정이 나옵니다. 사랑에 어떤 연기가 끼어들어서 도저히 눈을 뜰 수 없게 하는, 차마 볼 수도 없는 그런 파괴적 이별을 노래가 완성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샬롯 램플링의 얼굴은 소스라치면서도 끔찍할 정도로 상대를 참아줄 수 없다는 감정을 드러내는데... 그게 이 노래와 함께 나옵니다. 그래서 이 노래를 들으면 어떤 아련한 감정이 아니라 샬롯 램플링이 남편에게 느끼는 그 배신과 혐오, 한순간도 같이 있고 싶지 않다는 그 감정을 느끼게 합니다.


 


요새 들어 또 잃어버릴 것 같은 노래를 찾았습니다. <아메리칸 사이코>의 유명한 그 씬이죠. 원곡 뮤직비디오에 가면 가장 먼저 달려있는 댓글이 Hey Paul입니다. 아마 저뿐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도 똑같이 충격을 받았나봐요 ㅋㅋ 저는 이 영화를 띄엄띄엄 봤는데 이 장면만큼은 너무 충격적이라서 도저히 잊을 수가 없습니다. 크리스챤 베일이 이상하게 들떠서 이 노래를 설명하는 장면 하며... 노래는 너무 흥겨운데 속은 텅 비고 메마른 인간이 갑자기 도끼로 팍!! 그 괴리감이라고 해야할까요. 너무 신나는 노래는 오히려 공간을 을씨년스럽게 만들고 인간성의 부재를 증명하는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이 노래만 주구장창 듣고 있습니다. 노래 자체가 '힙'하고 신나니까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 장면을 떠올리게 됩니다. 유튜브 댓글 중에는 친구 집에 놀러가서 술을 같이 진탕 마시고 있는데 친구가 이 노래를 갑자기 틀길래 그 집에서 몰래 도망쳐나왔다는 댓글도 있더라구요. 현명한 선택이었던 듯...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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