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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면서 나는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를 떠올렸다. 사실 이 말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활동가들에게 실례인 표현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가시면류관을 쓰고, 채찍을 맞고, 십자가를 지고 피를 흘리면서도 걸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수난을 당하는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라서 내 멋대로 떠올렸을 따름이다. 제 아무리 성인聖人이어도 걷는 자의 고통이 걷지 않고 이동해야하는 자의 고통에 함부로 비견될 수 없을 것이다.


영화라는 매체의 사회적 의의가 있다면 시각과 청각의 감각을 동원해 특정 상황을 보다 강렬하게 간접체험을 시켜준다는 것이다. 휠체어에 앉은 이형숙 활동가의 눈높이에서 카메라가 세상을 비출 때 영화 속 세계는 조금 더 높고 무겁게 느껴진다. 걷는 사람들은 이 영화가 보여주는 장애인의 시야에서 장애인의 세계에 대한 단서를 간신히 얻어낸다. 올려다보기를 강요당한 자들의 세계에서, 내려다보는 자들을 향해 외치는 언어는 수시로 사회적 중력의 힘을 증명한다.


장애인들이 수직적 역행을 시도하는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수평으로 움직이는 지하철에서 그저 수평으로 움직이려고 할 뿐이다. 그러나 그 수평의 움직임을 한국사회가 가로막는다. 평범하고 보통에 불과한 시민들의 입을 빌어서, 정치인들의 언어를 빌려서, 경찰이라는 행정력을 빌려서. 이 세계는 두 발로 걷는 자들에게만 평평하다. 휠체어에 앉아서 바퀴를 굴리는 순간 한국이라는 세계전체는 까마득한 철폐물이 되거나 가파른 절벽으로 돌변한다. 모두가 일상적으로 오가면서 서있는 그 지하철을 누군가는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동원해야 간신히 탈 수 있다. 살아있는 인간이 일사분란하게 벽으로 둘러싸는 이 세계에서 둥근 바퀴의 가능성은 완전히 봉쇄된다.


우리는 투쟁이라는 단어의 이미지를 얼마나 오해하고 있는가. 밀어내면 버티고 쓰러트리면 일어난다는 반동의 이미지를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어떤 자들에게는 그런 투쟁조차도 사치이다. 어떤 세계는 완벽하게 진압할 준비가 되어있고 생명을 훼손할 사건들을 장전 중이다. 이 세계가 정말로 그런 폭력만을 준비하고 있다면 어떤 사람들은 기꺼이 육신과 목숨을 걸어주겠다는 극단적 피학의 투쟁법을 선택한다. 마틴 루터 킹의 셀마 몽고메리 행진은 순진한 "평화시위"가 아니라 백인들의 만행을 고발하기 위해 흑인 동지들의 생명을 내어주는 행위에 더 가까웠다. 어떤 투쟁은 자신을 옥상에 고립시키고 어떤 시위는 자신을 좁은 철제 상자에 스스로 가둬놓는다.


영화는 2022년도에 진행되었던 지하철 타기 운동의 이전에 전장연이 어떤 투쟁을 했는지를 보여준다. 리프트 때문에 장애인들이 계속해서 추락사를 겪자 전장연은 지하철에 엘리베이터 설치 의무화를 주장한다. 그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전장연은 지하철 선로에 자리를 잡는다. 정차 예정이던 지하철은 이들 앞에 멈춰있고 전장연은 그 자리를 떠나기를 거부한다. 지하철에 치여죽어도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라는 이 광기 앞에서 비장애인 사회의 광기를 뒤늦게 곱씹는다. 장애인들이 죽든 말든, 계단을 내려올 수 있든 없든, 너무나 평온한 사회의 광기를 경험한 자들의 결심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어야하지 않을까. 전장연은 수시로 쇠사슬을 몸에 두르고 차가 출발할 수 없게끔 자기 몸의 인질극을 감행한다. 그 쇠사슬보다 더한 사회적 쇠사슬이 이들을 옭아매고 있었을 테니까.


전장연은 지하철을 멈춰세웠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후 비장애인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철 역을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세계는 일방적으로 평평하다. 이제 전장연은 지하철 안으로 들어간다. 아직도 엘리베이터들은 모자라고 누군가는 지하철로 내려갈 수도 없다. 지하철 바깥에서 그 쇳덩어리를 멈춰세웠던 전장연의 투쟁은 이제 지하철 내부로 향한다. 그 안에는 지하철이라는 기계의 내부를 감싸고 있는 수많은 "보통 시민"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지하철은 그저 성실하고, 규칙적인 이 시민들로 이루어진 내벽의 세포들로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한다. "왜 시민들에게 불편을 줘요!!!"


잔인함이라면 그 어떤 감독도 따라가기 힘든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영화를 나는 올 해 두편 보았다. 그러나 [시민 여러분, 반갑습니다]에는 맨 정신으로 버티기 힘든 잔인한 장면들이 즐비해있다. 전장연이 휠체어를 타고 지하철을 타면 그 때부터 어떤 금속보다도 날카롭고 육중한 멸시가 쏟아져내린다. 이 시민들의 언어는 처음에는 놀랍고, 시간이 갈 수록 분노를 일으킨다. 북한으로 꺼지라는 시민의 말은 너무 황당해서 차라리 웃을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논리적이고 꽉 막힌 보통시민들의 짜증은 흘려들을 수 없을 정도로 사방군데 가시가 뻗쳐있다. 왜 우리가 너희들 때문에 출근을 못해야하느냐, 왜 지금 엄한 데에서 화를 내고 있느냐, 지금 뭐하는 거냐... 저희도 지하철을 같이 이용하고 싶어서 이러는 거라는 대답에 어떤 시민은 짜증을 억누르지 못하고 반문한다. 그럼 최선을 다하세요! 열심히 사시라고요! 시민들의 울분은 우리 사회의 공동체 의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 자리가 정상적인 토론 자리라면 그 말이 어떻게 틀린지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하철을 탄 전장연은 이물질이고, 지하철과 이 사회는 이들을 뱉어내려고 애를 쓴다. 오로지 자신의 불편만을 당위로 내세우는 보통 시민들의 절대적인 주인의식은 감히 논리적 반박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런 세계를 지하철은 압축하고 있다. 전장연이 지하철을 타면 전방위적인 비난이 쏟아진다. 그 흉흉한 소리들은 스크린 너머로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절대 영화적으로 감상할 종류의 것이 아니다. 나는 장담할 수 있다.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라면 그 누구라도 전장연에게 마음 속으로 부탁하게 될 것이다. 이제 그 시위를 멈추고 비굴하게나마 당신들의 평화를 도모하시라고. 영화를 보고 있을 뿐인 관객의 입장에서도 시민들이 언어로 찌르고 짓이기는 장면들을 견디기 힘들다고.


지하철에서는 태연한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현재 지하철 2호선 내선 구간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시위로 정상적인 열차운행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이 문장은 전장연이라는 사람들을 완전히 지워놓는다. 전장연은, 장애인은 이 문장 속에서 주어가 아니다. 오로지 비장애인만이 편하게 이용하는 열차운행만이 주어로 등장할 뿐이다. 전장연이 왜 시위를 하는지, 무슨 목적으로 시위를 하는지 지하철 안내방송은 전달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열차운행 지연'이라는 현상으로만 존재한다. 어떤 인간의 존재가 지워지면 그들은 나쁜 놈으로도 되지 못한다. 태풍이나 홍수같은, 간헐적이어야 할 하나의 현상이 되어버린다. "지금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합이 승강기 설치 확대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하철이 출발 지연이 되고 있습니다. 시민분들께서는 해당 상황을 인지하시고 정 급한 경우에는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나오지 않는다. 장애인이라는 인간은, 비장애인이라는 시민들이 이동하는데 발생해버린 사회적 장해로 취급된다. 그러니까 전장연은 온 비난을 감수하며 질문을 요구한다. 아무리 짜증이 나고 스트레스를 받아도, 그 비일상적인 감정이 근본적인 질문을 낳기를. 대체 저 사람들은 왜 저러는 거냐고.


이족보행 대신 휠체어 이동을 하는 이들에게 이미 사회는 너무 고압적이다. 장애인없이, 장애인의 존재를 없애고 작동되는 사회의 톱니바퀴 사이로 몸을 내던져 사회를 일시중지시켰던 투쟁은 더 낮은 자세로 사회의 운행을 중지시킨다. 휠체어에서 내려 두 팔과 온 몸을 써서 지하철 바닥을 기어다니며 박경석 대표는 시민들에게 말한다. "죄송합니다, 시민 여러분 출근길에 죄송합니다." 앉아있는 사람들보다도 더 낮은 자리에서 그는 신음하듯 사과한다. 그리고 앉아있던 어떤 여자시민은 흐느낌을 참지 못하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다른 어떤 맹목적인 비난이나 소음보다도, 같은 시민의 처절함을 이해하고 만 다른 시민의 눈물섞인 대답에 통증이 느껴진다. 우리는 어떤 질문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야하지 않을까. 같은 시민이지만 다른 높낮이의 격차를, 울어버린 그 시민처럼 참을 수 없어야하지 않을까.


이 영화속 다른 시민들을 반면교사로 삼는 것은 너무 편한 결론이다. 영화를 보면서 욕하기는 쉽지만 그것이 어쩌면 이 영화를 보기 전 우리를 담은 광경일 것이다. 어떤 약속이 예측불가의 변수로 어그러진다면 우리는 응당 화가 날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 약속을 할 수조차 없다. 자기 자신의 통행조차 책임질수가 없다. 멀리 돌아서, 혹은 혼자서 치르면 되는 일상적 수고가 아니라 다른 타인의 "특별대우"를 요구해야한다. 이 부조리한 세계에서 온몸을 내던져 질문을 이끌어내는 전장연의 투쟁이 이제 전혀 다르게 보인다. 나도 그 눈물을 참지 못한 시민처럼,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가 "괜찮다." 이제부터 내가 정말로 괜찮지 않은 것은 너무 무관심한 세계 그 자체다. 나는 장애인 시민 동료들의 괜찮지 않음에 함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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