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태 살면서 경험했던 가장 충격적인 사건을 뽑으라면 저는 아마 한샘 성폭력 사건을 뽑을 것 같습니다. 이 사건은 한샘에 다니던 한 여자직원이 각기 다른 남자직원들에게 화장실 불법도촬, 성폭행, 성희롱을 순차적으로 각각 당했던 사건입니다. 성범죄자 전형으로 남자들을 뽑은 것도 아닌데 나름 이름 있는 대기업에서 어떻게 이런 성폭력 사건이 연쇄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지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충격적인 건 이 사건을 둘러싼 여론이었습니다. 남초 커뮤니티에서 여자 피해자에게 공감을 하는 대신 무고범일지 모른다며 끝까지 의심했었기 때문입니다.


한샘 성폭력 사건의 첫번째 불법 도촬 사건과 세번째 성희롱 사건은 가해자 남성들을 회사 내부에서 축출하며 어느 정도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오로지 두번째 사건만 법적 결론이 내려지지 않은 상태였고 이 사태를 호소하고자 여자 직원은 인터넷에 글을 올렸습니다. 이에 가해자 남성은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며 전혀 무의미한 맥락의 변명을 올렸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태에서 가장 확실한 입장은 하나뿐입니다. 두번째 사건에 대해서는 입장을 유보하더라도, 첫번째 도촬과 세번째 성희롱 사건의 피해자로서 이 여성의 입장을 이해하고 그에게 위로와 공감을 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놀랍게도 두번째 사건의 무고 가해자로서만 여성을 의심했습니다. 첫번째 사건과 세번째 사건은 '그건 그렇다치고', 정도로 넘어가면서 말이죠.


이번 이재명 테러 사건을 언급하면서 크게 연관이 없는 한샘성폭력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은 한 사건의 피해자와 이를 둘러싼 여론의 양태가 꽤나 흡사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오해를 방지하고자 미리 말하자면 이재명이 성폭력 사건의 피해여성과 비슷한 약자라는 건 아닙니다. 다만 어떤 사건의 명백한 피해자인데도 불구하고 피해자가 거짓말쟁이가 아니라는 것을 계속해서 증명해야하고, 일단 미움부터 받는 입장에 놓이면서 최소한의 인간적 관심과 염려를 받지 못한다는 점이 비슷합니다. 여론에서 일단 공격대상으로 지정받고 무조건적인 의심이나 비난부터 받게 되는 상황이죠.


이재명 대표를 둘러싼 여론을 봅시다. 이재명 대표가 목에 칼을 찔렸습니다. 이 사건은 가해자에 대해 아무런 비호의 여지가 없습니다. 야당 대표를 칼로 찔러서 심판해야할만큼의 죄가 있다고 사회적 합의가 전혀 구해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누군가를 싫어한다,와 누군가를 칼로 찔러서라도 응징해야한다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럼 여기부터 논의를 뻗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재명을 칼로 찌른 사람은 누구인가, 그의 정치성향이나 평소 소비하는 언론 및 sns 지형은 어떤가, 이재명에 대한 이 극도의 증오는 과연 개인적인 일탈로만 치부할 수 있는가. 이 사건은 디시인사이드 칼부림 예고 사건과 연결지으면 사태는 더 심각해집니다. 이제 상대가 누가 됐든, 칼로 찔러서 심판하자는 극단적 테러리즘이 더 확대된 결과니까요.


여론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맨 처음에는 이재명이 자작극을 했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칼이 아니라 나무젓가락으로 벌인 쇼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왜 부산대병원에서 치료를 안받았냐고 합니다. 계속해서 여론이 이재명의 잘잘못을 추궁하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이재명을 피해자의 위치에 놓지 않습니다. 이재명이 목에 칼을 찔려도 모든 책임은 이재명에게 있다는 것처럼 질문들이 쏟아집니다. 이것은 단순한 편향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재명에 대한 사회적 증오가 꽤나 심각한 수준에 다다랐다는 신호입니다. 포커스가 오로지 이재명에게만 딱 붙어있는거죠.


이렇게 악의적 포커스가 고착되면 그 자체로도 당사자에게 피해이지만 동시에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불합리한 포커스는 다른 곳에 분배되어야 할 포커스를 소모시켜 사회적 맹점을 만듭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검찰이 2년 내내 이재명 압수수색만 해오고 있었는데요. 이렇게 수사력을 낭비하니까 처리되어야 할 다른 사건들이 전부 다 수사 스톱이 됩니다. 현재 여론은 어떤가요. 이재명 암살미수범이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하는데 정작 여론에서는 짬처리를 해버립니다. 경찰에서도 비공개로 돌려버렸죠. 박근혜 암살미수범의 빠른 신상공개와 비교해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일처리입니다. 지금 우리는 공식적인 루트로는 이재명 암살미수사건의 가해자가 어떤 당적을 가졌고 어떤 사상을 가졌으며 어떻게 이 암살을 시행하려했는지 거의 모릅니다. (이재명 암살 미수사건의 가짜뉴스를 무려 국무총리실이 퍼트렸을 정도로 지금 여론의 중립성은 많이 오염된 상태입니다.)


책임은 지위에만 비례하는 게 아니라 상태에도 비례합니다. 이재명이 목에 칼을 맞은 상태에서도 한 치의 오차없이 어떤 책임을 졌어야 한다는 주장은 그 주장의 문제가 아니라 그 주장이 이재명의 책임불가상태를 삭제해버린다는 비인간적 맥락에 있습니다. 당신이 목에 칼을 맞았고 정상적인 선택이 어려웠다 해도 무엇은 잘못한 게 맞지 않느냐?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 얼마나 비인간적이며 편향적인지를 좀 돌이켜봐야합니다. 요즘 들어 유행하는 "너 T야?" 유행어가 참 절실하게 다가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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