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위도우> 보고 왔습니다

2021.07.29 23:45

Sonny 조회 수:556

20210614501515.jpg


이상하게도 마블 영화는 정이 안갑니다. 그래서 여성영화의 결을 띈다 해도 그게 크게 정이 가거나 마음이 움직이지 않네요. 어쩌면 서사 속에서 히어로다움을 추구하는 그 모습이 단독자로서의 또 다른 남성주의의 결을 강하게 띄고 있어서 그런 건 아닐까 혼자 추정해봅니다만, 잘 모르겠어요. 쿨시크 유머 가이의 그 마블 기조 전체를 싫어하는 탓일지도요.


재미있게 보고 싶었지만, 별로 재미는 없었습니다. 일단 영화 전체가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의 재탕 느낌이 너무 강합니다. 도로에서의 추격전 이후 새로운 원군을 얻어 하늘 위에 숨겨진 기지를 침공해 추락시킨다는 이야기 자체가 아예 윈터 솔져의 그것입니다. 악당인 태스크마스터가 주인공의 과거의 인연과 속죄 대상인 것도 비슷하죠. 이 부분에서는 본 시리즈의 느낌이 너무 강하게 나는데 사실 속죄 드라마가 그렇게 진하게 진행되지도 않아서 큰 감흥은 없습니다. 종으로의 액션과 횡으로의 액션을 다 수행하려는 목적에서 도로 추격전이나 레드룸에서의 활공 액션을 넣어놨지만 오히려 이 영화의 컨셉이 흐릿하기 때문에 일단 액션 영화라면 다 할법한 장면들을 끼워넣은 인상이 강합니다. 톰 크루즈가 미션 임파서블을 찍을 때 맨날 이렇게 하잖아요. 주인공의 스턴트와 눈요깃거리 제공이 최우선인 엔터테인먼트 영화니까. 마블 내 수많은 히어로들과 차별점을 가져야 하는 블랙 위도우라면 조금 더 구분되는 액션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태스크마스터가 타인의 액션을 똑같이 흉내내는 부분이 블랙위도우에게 드라마적으로 갈등을 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소잃고 외양간 고치기니 뭐...


이 영화의 여성주의적인 측면도 좀 갸우뚱한 부분은 있습니다. 그러니까 레드룸의 지배자인 드레이코프는 일종의 남성주의적 독재자이자 가부장제의 권위자를 상징한다는 걸 알겠습니다. 그러나 이야기가 너무 상징적으로 흘러간단 생각을 안할 수가 없네요. 힘이 세고 여자를 괴롭히는 나이든 남자를 쓰러트리는 구도 자체가 너무 명료해서 오히려 추상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사실 이 영화를 채우고 있는 건 레드룸의 지배자인 드레이코프와 나타샤의 관계라기보다는, 잃어버린 나타샤의 가족과 그 자신의 과거에 대한 속죄가 더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물론 상업영화니까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장면 장면은 정치적 구호를 담고 있는데 그게 정치적 드라마로서 서사를 담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고민은 <캡틴 마블>을 봤을 때도 동일하게 했던 것이구요.


남성 제국의 몰락과 여성의 해방이라는 장면은 도식적으로는 메시지를 전달하지만 그게 이 영화 전체의 서사에서 어떤 감정적인 카타르시스로 이어지진 않았습니다. 여성은 이렇게 자유를 박탈당한다는, 그 어떤 위기감이나 긴장감이 없었던 것 같아요. 아마 그것은 이 영화의 주인공인 나타샤나 엘리나가 금새 각성을 하고 관찰자이자 일종의 고발자로서 사건을 해결하는 입장이라 그랬던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 때 가장 중요한 인물이 아마 태스크마스터일텐데 가장 큰 피해자로서의 고통이나 억압을 캐릭터로서 효과적으로 전달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여성억압의 고통이 생략된 채 구원자의 멋만이 더 중요하게 빛나서 제가 좀 거부감을 느꼈던 것 같기도 하구요.


또 하나 이상한 부분이라면 영화 전체가 결국 가족주의로 함몰된다는 점입니다. 나타샤는 가짜가족에게 버림받고 지금의 신세가 되었죠. 그렇다면 이 영화가 나아갈 길은 "진짜 가족" 찾기인가, 그런 고민을 하게 되더군요. 가부장제 자체가 어떻게 보면 가족이라는 시스템에서 생기는 문제이고 그것으로부터 여성이 개인의 독립을 도모할 수 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블랙 위도우>는 잃어버린 가족을 되찾아준뒤, 나쁜 가족과 나쁜 아버지를 혼내주면서 끝납니다. 특히나 이 과정에서 무책임했던 멜리나와 알렉세이를 흐리멍텅하게 용서합니다. 그들은 가장 적극적인 배신자이고 어린 여자를 나쁜 가족에 팔아넘긴 일원들이 아니었던가요. 이 부분에서 영화는 이상하게 과감해지질 못합니다. 그리고 더 황당한 건? 나쁜 남자의 가부장제를 물리친 다음에 좋은 남자들의 가족인 어벤져스로 나타샤가 귀환한다는 거죠. 여성 개인의 독립과 연대는 가족 혹은 (좋은) 남성적 가족으로 흡수된다는 결론이 되어버립니다. 물론 어벤져스 이 전의 이야기이니 어쩔 수 없는 시간적 구조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상했어요.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영화입니다. 강하고 센 여자, 남자를 고발하는 여자, 남자들 두들겨패는 여자들이 나온다고 과연 그게 다 정치적 메시지로 전달이 되는지 혹은 정치적 소재가 경제적 착취를 당하는 건 아닌지 그런 고민이 들었습니다. 상업영화에 너무 큰 기대를 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블랙 위도우>가 일종의 교본으로 삼았던 <한나>조차도 훨씬 더 근사하고 매력적인 여자 스파이 영화를 그리지 않았나요. 이 영화에서 좋았던 건 인물 자체가 영화적인 플로렌스 퓨밖에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배우의 아우라가 너무 강해서 영화 안에서 더 튀어보이기까지 할 정도였으니까요. 전 아직도 그의 데뷔작을 한국 극장에서 봤던 몇안되는 관객이었던 걸 자랑스레 생각하고 있습니다....


@ 원더우먼은 참 좋았는데... 별 수 없이 비교를 하게 되더라구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5420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974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2604
116707 더운데 먹고싶은 것들 [4] 메피스토 2021.08.07 437
116706 누군가 로그인을 실패했습니다. [6] Kaffesaurus 2021.08.07 683
116705 고래, 그래? [12] 어디로갈까 2021.08.07 569
116704 [영화바낭] 괴작과 명작 사이의 어딘가... 여성 복수극 '리벤지'를 봤습니다 [15] 로이배티 2021.08.07 686
116703 올림픽 농구/결승 미국 vs 프랑스 [1] daviddain 2021.08.07 310
116702 [KBS1 독립영화관] 남매의 여름밤 [3] underground 2021.08.06 415
116701 K-재난영화 [1] 사팍 2021.08.06 324
116700 부담 없이 편하게 보는 여자배구 4강 브라질전 [67] 로이배티 2021.08.06 845
116699 "일상은 사라지고 방역만 남았다... 4단계 유지, 불공정" [1] 갓파쿠 2021.08.06 657
116698 광동어 배우기 까다로운 점 [5] catgotmy 2021.08.06 594
116697 여름의 장염크리(식사 주의) [3] 메피스토 2021.08.06 802
116696 [돌발부록]내 꿈은 대통령( 민주당 대선 후보 어린시절 생활기록부) [2] 왜냐하면 2021.08.06 376
116695 그 와중에 올림픽 여자배구 브라질 선수 도핑 적발이... [5] 로이배티 2021.08.06 556
116694 맛없고 예의없는 점심들 / 지겨운 회사 / 뒤늦은 싸인들 / 미친 취미라이프 [10] Koudelka 2021.08.06 833
116693 가부장제 이론 비판 [6] 사팍 2021.08.06 516
116692 7월의 크리스마스 가끔영화 2021.08.06 206
116691 이탈리아 축구 클럽이 동양인 대하는 태도 [5] daviddain 2021.08.06 569
116690 사람이랑 같이 있는 것에 대해 [2] catgotmy 2021.08.06 347
116689 분노의 질주 : 한에 대한 이것저것 [2] skelington 2021.08.06 463
116688 글 지우기 [6] thoma 2021.08.06 40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