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 버스 안에서

2011.05.26 05:49

차가운 달 조회 수:1973

 

 

 

 

자주 꾸는 꿈이 있나요.

어떤 꿈들은 기억에 오래도록 남아 있죠.

저는 자주 꾸는 꿈이 있어요.

길을 잃고 헤매는 꿈,

잠에서 깰 때까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어딘가에서 헤매는 꿈인데

그런 꿈들은 시간이 지난 뒤에도 가끔 떠올라요.

 

악몽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은 아니에요.

단지 길을 잃었을 때의 무기력한 기분이 꿈을 꾸고 난 후에도 남아 있을 뿐,

악몽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은 아니죠.

일어나 움직이다 보면 잊어요.

마음에 담아둘 필요도 없는 꿈들이죠.

 

하지만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 때 가끔 그런 꿈들에 대해서 생각해요.

퇴근길의 지하철 2호선 같은 곳,

전동차가 터널을 지나 사람들로 가득한 플랫폼으로 들어설 때 말이에요.

아니면,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잠들었다 깨어났는데 도로가 꽉 막혀 있을 때.

 

남자는 눈을 뜨고 문득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어요.

어둠 속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죠.

버스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어요.

몇 달 전의 일이에요.

겨울이 끝나가고 있었고, 그날 내린 눈이 마지막으로 내린 눈이었죠.

토요일이었는지 일요일이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아무튼 그날 이후로는 눈이 내리지 않았어요.

 

심야의 좌석버스 뒷자리에 혼자 앉아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짧은 잠에서 깨어난 뒤에도 남자는 자신의 삶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알았죠.

사람이 잠든 시간, 

그건 어쩌면 삶보다는 죽음에 가까운 공백이겠지만 눈을 뜨면 모두 돌아오죠.

기억도, 단절되었던 삶도,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가슴을 문지르던 어떤 감정도.

 

남자는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어요.

아주 친한 친구였고, 많은 것을 함께 한 친구였죠.

하지만 둘 사이는 언젠가부터 조금씩 서먹해지기 시작했어요.

친구가 유학을 가 있는 몇 년 동안은 거의 연락도 하지 않고 지낼 정도였어요.

그렇다고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죠.

 

테헤란로의 어느 빌딩 연회장이었는데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다가 한 여자와 만났어요.

여자는 남자를 보고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고, 이내 반갑게 인사를 했죠.

한때 남자가 좋아했던 여자였어요.

두 사람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고 서로의 안부를 물었어요.

흔하디 흔한 재회였죠, 두 사람 사이에는 특별한 감정도 특별한 추억도 남아 있지 않았어요.

 

대성리로 모꼬지를 갔을 때 함께 보트를 탄 적이 있긴 했죠.

잔잔한 강 건너에 흐릿한 그림자처럼 보이는 산들이 있었고,

남자가 노를 젓다가 중단하자 물 위를 미끄러지던 보트도 곧 멈췄어요.

그냥 조용히 얘기를 나누다 남자는 문득 여자에게 고백을 하려고 마음먹었어요.

두 사람은 종로에서 영화를 본 적도 있었고, 대학로에서 술을 마신 적도 있었죠.

남자는 두 사람만 있던 노래방에서 여자가 불렀던 인순이의 노래도 기억하고 있었어요.

외로운 밤이면 밤마다.

단순한 선후배 사이라기보다는 좀 더 친한 사이라고 생각했어요.

고백을 하기에는 아주 좋은 분위기였어요.

순간 어디선가 괴성을 지르며 다가오는, 남자 후배들이 잔뜩 탄 보트 몇 척만 없었으면 말이에요.

 

결혼식이 끝나고 지하철역 근처의 호프집에서 사람들과 함께 맥주를 마시면서도

남자는 더 이상 기억에 남을 만한 일들이 있었는지 떠올리지 못했어요.

그날 함께 탄 보트가 멈췄고, 남자의 기억도 거기서 멈췄죠.

여자는 결혼식이 끝나고 바로 떠났지만 남자는 남은 사람들을 통해 여자가 곧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별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킬 만한 얘기도 아니었어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맥주나 마셨죠.

 

하지만 늦게까지 이어진 술자리를 끝내고 집으로 향하는 좌석버스 안에서 생각했어요.

어쩌면 내 삶은 지금과 달라질 수도 있었을 거라고,

남자는 생각했어요.

 

어째서 친구와 그렇게 서먹한 사이가 되었는지,

한때는 밤새 술을 마시며 함께 울고 웃던 친구가 이제는 결혼식이 끝난 뒤 형식적인 축하의 말이나 건네는 사이가 되었는지,

어째서 여자와 엘리베이터 앞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것이 고작인 사이가 되었는지,

어째서 서울로 돌아온 뒤에는 두 사람 사이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지,

남자는 자신의 삶이 지나온 궤적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말하자면, 한 번 보트가 멈춘 뒤에는 다시 노를 젓지 않는 삶,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조류에 떠밀려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삶, 그런 것이라고.

왜냐하면,

 

창밖의 어둠 속에는 나무들이 온통 눈을 뒤집어쓰고 있었어요.

끝나가는 겨울에 내리는 폭설.

잠에서 깨어난 남자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오르막을 앞두고 도로는 차들로 꽉 막혀 있었죠.

버스는 아주 천천히 움직였어요.

늘 지나다니는 길인데도 눈에 덮인 풍경은 왠지 낯설었죠.

아무리 봐도 어디쯤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어요.

그리고 남자는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을 의심하기 시작했어요.

 

이 길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야,

지금 나는 내가 그토록 자주 꿨던 그 꿈속에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 꿈속에서 저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해요.

아주 똑같지는 않지만 조금씩 닮은 꿈들이에요.

지하철을 타고 있거나 버스를 타고 있거나 가끔은 직접 운전을 하기도 해요.

꿈속의 정황은 암전되었다가 갑자기 불이 켜지는 무대처럼 불쑥 던져지죠.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운전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다 보면 늘 길을 잃어요.

결코 닿을 수 없는 목적지가 있어요.

그 꿈속에서 저는 아무 것도 못하고 무기력하게 있다가 깨어나는 수밖에 없어요.

 

몇 번이고 지하철을 갈아 탔지만 끝끝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꿈을 꾼 적이 있어요.

플랫폼에 내려 노선도를 봤는데 그건 거대한 벽에 걸린 거대한 노선도였죠.

끝도 없이 복잡한 수천 개의 노선, 세계의 모든 곳으로 이어진 지하철이었어요.

그 꿈속에서 저는 길을 잃었어요.

 

넓은 콘크리트 광장처럼 황량한 항구에서 제가 타야할 배를 찾아 헤매는 꿈을 꾼 적도 있어요.

종이 티켓을 손에 쥔 채,

어디로 향하는지도 알 수 없는, 수없이 교차되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다녔죠.

티켓에 적힌 숫자를 찾아서 말이에요.

그 꿈속에는 결코 목적지로 데려다주지 않는 끝없는 길이 있어요.

악몽은 아니에요, 그런 걸 악몽이라 할 수 있나요, 하지만 저는 그 꿈속에서 지쳤어요.

 

남자는 한때 삶이란 어떤 집과도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안에서 살아가며 부지런히 손질을 하고 가꾸며 때로는 편히 쉴 수도 있는 곳.

깨진 기와에서 비가 새면 지붕에 올라 기와를 갈고,

나무기둥 아래 흰개미가 보이면 흰개미를 잡고,

칠이 벗겨진 곳에는 다시 페인트를 칠하고,

그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는 완전한 상태에 도달하리라고 믿었어요.

하지만 그런 집은 없어요.

아니, 있어도 찾아갈 수 없어요.

남자는 이제 삶이란 어떤 길과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폭설이 내린 한밤중, 집으로 돌아가는 좌석버스 안,

짧은 잠에서 깨어나 뭔가를 깨달았어요.

이 삶은 꿈이며, 이 꿈속에서 자신은 결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단지 꿈에서 깨기 전까지 길 위에서 헤매는 것뿐이죠.

왜냐하면,

 

저는 그 답을 알지만 말하지는 못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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