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21 13:15
2005년 여름. 경제가 어렵다고는 하나 사람들 앞다퉈 웰빙을 부르짖고, 취업이 어렵다고는 하나 어학연수 하나로 취직도 곧잘 되던 나름 호시절.
지상최대의 고민이란 것이 고작 남여상열지사였던 낭만의 끄트머리에 이 작품 있었더랬다.
평범한 노처녀를 연기하기엔 지나치게 예쁘고 섹시했던 김선아가 온 몸 내던짐에 아낌이 없었던 드라마.
이제는 다시 볼 길이 없는 김자옥, 여운계, 두 "엄마"가 아직 건강하게 웃어주시는 보배와 같은 기록물
<내 이름은 김삼순>
극 중 삼순이 신세 참 처량도 하다.
큰 언니는 일영, 작은 언니는 이영. 고로 삼영이가 되었어도 분통 터졌을 법한데,
항렬 무시, 자손의 원만한 학창시절 개무시.
그녀가 그저 또 다시 태어난 계집이라는 이유만으로 대박 삐치신 조부, 홧김에 그만 이름을 삼순이라 지어 버린 흔하고 흔한 작명 대참사
비록, 셋째 딸 가일층 어여삐 여기신 부친, 업장의 이름마저 '삼순이네 방앗간'으로 지었건만.
괴이한 이름 가진 자의 고통을 본인 아닌 그 누가 알 것이며, 그 고통 사소할수록 쪽팔린다는 사실은 또 누가 알아줄 것인가?
문득, 자대라고 더플백 메고 들어갔더니 서슬퍼런 내무반 실세의 이름이 글쎄 '아라'요. 그만 성은 '박'이더라는 내 웃픈 경험 떠오르고 말았더랬다.
이등병이 웃는다고 죽진 않는다. 다만..
사실 이 드라마.
노희경과 김은숙으로 각성하기 전, 반도를 철혈통치해 온 뻔하고 뻔한 한드의 법칙에서 자유롭지 못 하다.
남자는 준재벌의 외동에 잘생겼으나 어딘가 남모를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놈팽이.
주위에는 언제라도 그들의 사랑을 응원해줄 준비가 돼있는 박수 예비군들.
그와 잘 되기만 하면 어쨌든 에어컨 좀 틀었다고 전기료 걱정할 일은 없을 여주 앞에 놓인 꽃길까지.
허나,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랴?
우리 마땅히 주목해야 할 것은 환경 아닌 사랑 아니었던가?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와 텔레비전 틀었더니 "가난한 사랑 노래" 흐르고 있다면, 깐 데 또 까는 격 아닌가?
외롭고 지친 우리에겐 마데카솔도 좋지만, 박카스도 중요한 법.
그래도 이 드라마, 나름 한드에 하나의 큰 족적 남기셨다.
바로 삼순이의 연적 김희진을 나쁜 년은커녕, 가서 안아주고 손도 잡아주고 싶은 그저 또 하나의 사랑이 고픈 애로 묘사한 것.
괜히 학창시절 문학 시간에 졸지 않았음을 자랑하기 위해 문자 쓰자면.
예쁘고 마른 그녀,
여주에게 물을 끼얹고 저주를 퍼붓는 빌라인이 아닌, 사랑 앞에 또 하나의 아픈 손가락, 안타고니스트의 등장을 알리신 신호탄이셨다.
2005년 여름. 그때 삼순이의 나이 서른.
그 후로 13년의 시간이 흘렀으니 올 해 삼순이의 나이 어느덧 마흔 하고 넷이다.
어린 미주는 스무살 대학생, 혹은 재수생이 되었을 거고,
예비 사위를 맞은 기쁨에 노래방에서 싱글벙글 "찰랑찰랑" 부르시던 박봉숙 여사님, 필름 속의 별이 되시었다. 뿐인가?
그때 과방에 모여 앉아 과자를 깔아놓고 함께 삼순이를 보며
각자의 파릇파릇한 남여상열지사를 써내려 가던 우리들도 이제는 나이를 먹어
삼순이가 한탄하던 나이 서른을 애기라 부르는 중년이 되고 말았다.
극 중 삼순이가 희진에게 말 한다.
어쩌면 진훤은 삼순에게 찾아 온 마지막 사랑의 기회일지 모른다고. 그래서 자신도 물러설 수 없다고.
그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맞아" 라고 대꾸하는 나를 보며 삼순이를 응원하게 된다.
삼순아, 사랑은 원래 이기적인 거야. 이기적이지 않다가는 네 사랑은 영영 다른 이들의 사랑에 조연일 수밖에 없어!
이제는 설렐 기운도 점점 떨어져가는 심장을 문질러가며
나는 머리가 엄청 나쁜데, 나빠서 좋은 점이 있다면 봤던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또 봐도 늘 새롭다는 것.
왓챠에 올라 온 김삼순을 다시 보며 이제야 발견한 것이 있다.
극 중 진훤과 삼순이 처음으로 둘의 이유로 다투며 길을 걸었을 때.
카메라는 그들 가까이에서 그들이 남산 계단을 올라오는 앞모습을 담는다.
그리고, 마지막 회. 카메라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남산 계단을 올라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담는다.
마치, 인사를 건네는 것처럼.
잘 보았나요? 이렇게 싸우고, 화해하고, 사랑하고, 또 싸워가며 그들은 잘 살아갈 거랍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당신들도 그들처럼 사랑하며 살아가세요.
싸우고, 화해하면서.
그러면, 혹여 내가 놓쳐버린 사랑들, 삼순이처럼 사랑에 솔직한 적 없어 내가 함부로 흘린 상처와 무심함들에 밀려 멀어져 간 것은 아닌지.
아쉬움과 후회에 가슴에 구멍이 뚫려 그만
눈물이 나는 것이다. 아으...
사랑 앞에 한 번도 비겁한 적 없는 삼순이.
마흔 넷. 지금 삼순이는 잘 지내고 있을까?
2019.02.21 16:48
2019.02.22 11:23
2019.02.22 13:04
2019.02.22 10:59
읽으면서 어디선가 낯익어서 이 기시감은 무엇인가
기억을 더듬으며 한참 끙끙대다 생각났어요
오래전 영화 코너 추억의 부스러기에 글읽던 느낌이
글의 리듬감이 비슷하네요. 잘 읽었어요
삼순이는 어찌됐든 잘살고있겠죠. 누가 사람에겐 빵과 시만 있으면 괜찮다고 했으니
둘중 하나는 직접 잘 만들잖아요.
2019.02.22 11:28
2019.02.22 17:08
2019.02.22 19:38
잘봤습니다.
2019.02.23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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