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2년작입니다. 장르를 뭐라 해야 하나... 그냥 사극이고요. 사무라이가 나오고 칼 싸움도 나오는 '드라마'라고 해두겠습니다. 런닝타임은 2시간 5분. 스포일러는 없을 거에요.


?scode=mtistory2&fname=https%3A%2F%2Fblo

 (빨갛고 굵고도 큰 폰트로 적힌 저 말... 영화에 안 나옵니다. 그런 영화 아니에요. ㅋㅋㅋ)



 - 전 역사를 잘 모르고 일본 역사는 더더욱 모릅니다만. 대략 사무라이의 시대가 끝나가던 시절의 일본입니다.

 이 '사무라이'라는 존재의 실체가 전세계적으로 펴져 인기를 끌고 있는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속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다는 건 저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습니다만. 암튼 우리의 주인공인 사무라이 '이구치'씨는 그냥 공무원입니다. 업무는 창고 관리이고 다만 검술을 익혔고 칼을 차고 다닌다 뿐이죠. 이 영화의 간지나는 제목인 '황혼의 사무라이'는 이 분의 별명인데, 이런 별명이 붙은 이유는 그저 매일매일 칼퇴를 해서 '황혼'에 집에 가기 때문... ㅋㅋㅋ

 그런데 이 분의 칼퇴에는 슬픈 사연이 있어요. 아내가 폐병으로 얼마 전에 죽었는데, 몇 년을 앓던 통에 집안 재산 다 털고 빚까지 엄청 져버렸거든요. 가뜩이나 박봉의 하급 사무라이인데 이런 일까지 치렀으니 당연히 돈이 없겠죠. 근데 집에는 치매를 앓는 어머니와 토끼 같은 어린 딸 둘이 있단 말입니다. 도저히 하급 사무라이 월급만으론 생계 유지가 안 되어서 얼른 퇴근해 집에 가서 부업을 해야 합니다. 아아 눈물. ㅠㅜ

 그러던 어느 날, 자기보단 훨 잘 나가는 절친 사무라이의 미야자와 리에를 꼭 닮은 미모의 여동생 때문에 뭔가 일이 꼬여서 지체 높으신 분과 결투를 벌이게 되고. 이 결투에서 보여준 압도적 실력이 소문나면서 우리 생계형 사무라이 '황혼' 이구치 선생의 소소한 일상은 위기를 맞게 됩니다...



?scode=mtistory2&fname=https%3A%2F%2Fblo

 (착한 아빠와 착한 큰 딸과 착한 작은 딸)



 - 가끔은 보고 나서 정말 할 말이 없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너무 못 만든 영화는 여기에 해당이 안 되죠. 그런 걸 보고 나면 신나게 A4 몇 페이지 분량으로 떠들 수 있어요. 제 글을 자주 보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전 그런 영화를 보면 늘 신나서 장문의 후기를... ㅋㅋ 

 그냥 지나치게 무난하기만한 영화... 들이 일단 여기에 해당이 됩니다. 딱히 단점은 없는데 크게 칭찬할 만한 것도 없고, 뭔가 포인트가 될만한 게 없으면 수다 떨기가 힘들어요. 

 마지막으로, 평이한 스토리와 설정을 깔고 있는데 되게 흠 잡을 데 없이 잘 만든 영화... 를 봐도 비슷한 증상이 나타납니다. 저같이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흠 없이 깨끗하게 잘 만들어 버리면 그 '잘 만듦'을 풀어서 설명할 방법이 없거든요. 그저 '와... 재밌네. 영화 좋네.' 라고 말하고 나면 할 말 종료. 그래서 뭐가 좋은데? 라고 물으면 꿀 먹은 벙어리. 뭐 그렇습니다. 예전에는 스필버그의 '더 포스트'를 보고 나서 그런 기분이었구요. 오늘 본 이 영화를 보고 난 지금도 비슷한 기분입니다. 참 좋은데, 뭐라고 설명을 못 하겠네요. ㅋㅋㅋㅋ


?scode=mtistory2&fname=https%3A%2F%2Fblo

 (미야자와 리에를 꼭 닮으신... 은 그만두겠습니다. 그냥 미야자와 리에 맞습니다. 당시 30세였네요.)



 - 2002년 영화이니 뭐 20년 가까이 흐르긴 했어도 그 때 역시 21세기였잖습니까. 특히나 그 때면 세계적으로 좀 장르를 꼬고 비틀고 하면서 확 튀는 컨셉을 잡는 영화들이 많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 영화의 기본 설정을 보면 딱 그런 식으로 만들기 좋은 설정이에요. 생활고에 시달리는 궁상시런 사무라이라니, 딱 개그 코드로 잡아서 전개하기 좋은 이야기 아닙니까. 혹은 사무라이가 사라져 가던 시절의 이야기이니 되게 처절하고 냉혹한 분위기로 '사무라이 느와르' 비슷한 걸 만들어도 괜찮았겠죠. 근데 이 영화엔 그런 게 전혀 없습니다. 그냥 평범하고 온화하고 선량한 톤으로 가요.


 일단 주인공의 캐릭터의 역할이 큽니다.

 우리의 이구치 선생께선 참 성실합니다. 선량합니다. 정의감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예의바르고요. 겉멋도 없고 쓸 데 없이 스케일 큰 세상 걱정 같은 것도 안 하구요. 수다쟁이는 아니지만 말도 조리 있게 잘 하죠. 자식들을 무척이나 사랑하고 아낍니다. 그리고 뭣보다 자신의 현실에 대해 큰 불만이 없어요. 가난하고 힘들지만 어쨌든 먹고 살고 있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하는 하루하루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도입부에서 이 양반의 일상을 한참 시간 들여서 보여주는데, 아니 이 가족은 진짜로 행복해 보입니다. ㅋㅋㅋㅋ 그리고 그 구경이 재밌어요. 별다른 유머 코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극적인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보고 있으면 훈훈하고 흐뭇해서 기분이 좋아져요. 뭡니까 이게. 누가 사무라이 영화에 이런 걸 기대하나요. ㅋㅋ


 그래도 두 시간 동안 이런 것만 보여주다 끝낼 순 없으니 몇 가지 갈등과 사건들이 투입됩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턴 살짝 흔한 일본 소년 만화들 비슷한 전개를 구경하게 되죠. 우리 주인공은 사실 실력을 숨긴 절정의 고수였고. 절대로 그걸 티내고 과시하고 싶지 않았지만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칼을 들고. 그랬다가 그로 인해 더 큰 일에 휘말리고. 역시나 원치 않은 임무에 강제로 끌려 나가서 실력을 발휘... 뭐 이런 패턴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사실 애들 보는 배틀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주 전형화된 장르적 전개이고 이걸 어떻게 비틀거나 변형하려는 시도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만. 초장에 진중하게 잘 잡아 놓은, 그리고 이미 정이 듬뿍 가게 된 상태의 캐릭터들과 특별한 과장 없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연출 덕에 '뻔한 장르물'을 본다는 느낌 전혀 없이 그냥 자연스럽게 몰입이 됩니다. 이게 참 훌륭한 거죠. 원래 뻔한 전개의 뻔한 장면들은 아무리 영화가 재미가 있어도 몰입이 되진 않잖아요. 근데 이 영화는 그게 돼요. 아 제발 죽지 마. 다치지 마. 가족 곁으로 돌아오라고!! 이런 생각들을 하며 봤단 얘기죠.



?scode=mtistory2&fname=https%3A%2F%2Fblo

 (이런 걸 잔뜩 보고 싶어서 영화를 틀었다가는)



 - 그런데 그러한 전개 속에서도 칼부림 액션은 메인이 되질 못해요.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흐르기 시작하면서부턴 이제 로맨스입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야 깨달았지만 결국 이 영화의 칼부림은 모두 (사실 두 번 밖에 안 나옵니다 ㅋㅋ) 둘의 로맨스를 위해 존재해요.

 그러니까 그 미야자와 리에와 똑같이 생긴 친구 여동생과 주인공이 썸을 타는데... 둘 사이엔 참 장애물도 많습니다. 집안 레벨도 다르고, 그래서 경제력 차이도 무시 못하고, 또 주인공에겐 나름 극복하기 어려운 과거지사도 있구요. 근데 두 캐릭터 다 모두 너무 예쁘(...)고 또 서로 잘 어울립니다.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사귀어라! 사귀어라!!" 이러면서 봤어요. ㅋㅋㅋ 것 참 누가 사무라이 영화를 보면서 이런 걸 기대...;; 



?scode=mtistory2&fname=https%3A%2F%2Fblo

 (이런 걸 잔뜩 보면서 당황하게 되실 겁니다. 생계를 위해 큰 딸과 함께 가내수공업으로 새장 제작 중이에요. ㅋㅋㅋ)



 - 아. 그렇다고 해서 액션이 소홀한 건 또 아닙니다.

 딱 두 번(엄밀히 말하면 2.5번 정도...) 밖에 안 나오지만 두 장면 다 공들여서 잘 연출되었어요.

 여기까지 이 글을 읽고 계시다면 쉽게 짐작하시겠지만, 액션도 대략 현실적인 스타일로 연출이 되는데. 그 '현실적인' 선 안에서 최대한 보는 재미를 뽑아낸 느낌이 듭니다. 일반적인 사무라이들과 다르게 짧은 검을 주무기로 쓰는 주인공의 검술 스타일이 디테일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잘 묘사가 되구요. 이 영화 전체가 그렇듯이 과도하게 폼을 잡지 않으면서 그냥 자연스럽게, 현실 세계에 검술 고수란 게 존재한다면 저런 느낌이겠구나... 라는 기분이 들도록 참으로 '적당히 멋지게' 잘 보여줍니다. 많이 나오질 않아서 그렇지 검술 액션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그 장면들 자체는 대부분 만족스럽게 보실 거에요. 



 - 음... '할 말이 없다'라고 서두에 적어 놓고선 또 뭘 한참 끄적거려 버렸습니다만. 이제 정말로 할 말이 떨어졌으니 마무리하겠습니다.

 소탈하면서도 의로운 사람이 역사의 격랑에 휩쓸려서도 계속해서 인간적으로 살아 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동시에 꽤 훌륭한 로맨스 영화이기도 하고, 거기에 꽤 괜찮은 검술 액션도 곁들여져 있구요.

 그냥 간단히 말해서, 저는 사극 싫어하고 특히나 현실적인 톤의 사극을 싫어하고 훈훈한 인간 드라마를 잘 안 보며 로맨스물에도 취향이 없는 사람인데도 재밌게 봤어요. 그러니 이런 장르가 취향에 맞으시는 분이라면 훨씬 재밌게 보실 거라는 생각이 들구요.

 시작에서 했던 얘기지만 '그냥 참 잘 만든 영화'입니다. 예고편이라도 한 번 보시고 어지간히 본인 취향이 아니다... 라는 느낌이 드는 게 아니라면 그냥 한 번 도전해 보시길 추천합니다. 어차피 넷플릭스에 있으니까요. 맘에 안 드시면 가볍게 제 욕 하신 후에 끄시면 됩니다. ㅋㅋㅋ




 + 미장센이 참 좋습니다. 제가 소감글에 이런 아는 척하는 용어 잘 안 쓰는 사람인데 이 영화는 보면서 계속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허투로 잡은 장면이 정말 하나도 없지 않나 싶을 정도로 화면들이 참 차분하게 예쁘고 멋져요. 제가 일본 애니메이션은 많이 봐도 일본의 전통 문화 아이템들은 별로 안 좋아하는 자기 분열적인 사람인데요, 영화 특성상 그런 전통 문화 아이템(?)이 내내 화면에 그득한데도 거부감 없이 잘 봤습니다.



 ++ 깜빡했는데, 영화 내내 주인공 딸이 나이를 먹은 캐릭터의 나레이션이 흘러나옵니다. 되게 사람 좋은 할머니 같은 톤의 목소리인데, 그래서 이 영화의 훈훈하고 선량한 느낌이 더 파워업하는 느낌이더군요.

 근데... 생각해보면 좀 웃겨요. 알고보면 우리의 주인공님은 엄청 수다쟁이였던 거죠. 뭐 직접 겪은 것도 아닌 별별 일을 다 알고 있어!!! ㅋㅋㅋ



 +++ 너무 칭찬만 하고 있어서 스스로 좀 부담스러워집니다만. 암튼 참 일본 영화를 보면서 이렇게 순수하게 '훌륭하다'는 느낌을 받은 게 정말로 오랜만이에요. 그렇죠. 요즘들어 부쩍 더 잘 나가는 한국 영화들에 비해 많이 초라해진 일본 영화판입니다만. 원래는 거의 압도적이다... 싶을 정도로 거장들이 많았던 게 일본 영화판이었죠. 근데 어쩌다 이렇게 갑자기 훅 가버렸는지 참.



 ++++ 제목인 '황혼의 사무라이'는 당연히 중의적 표현이겠습니다만. 원제는 '황혼의 세이베이'라는군요. 세이베이는 주인공의 이름이구요. 근데 뭐 그래도 중의적으로 쓰인 건 맞을 거에요. 주인공은 결국 그 시대의 마지막 사무라이가 되고, 딸은 사무라이 시대의 종말을 목격하거든요. 영어 제목도 'The Twilight Samurai'이기도 하구요.



 +++++ 근데 전 이 시절 일본 영화나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이 헤어스타일이 참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됩니다.


?scode=mtistory2&fname=https%3A%2F%2Fblo


 그나마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선 늘 미끈미끈하게 그려 놓으니 차라리 나은데, 영화로 이걸 이렇게 리얼하게 보니 참... ㅋㅋㅋ

 아니 근데 영화도 마찬가지로 그냥 미끈하게 밀어주고 찍으면 되는 거였잖아요. 리얼함을 위해 일부러 이런 걸까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6438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5024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4040
116292 평일낮 잡담... [2] 여은성 2021.07.06 379
116291 몇년전 영화아카데미 성폭행사건 [4] 사팍 2021.07.06 759
116290 공군 중사 강제 추행 블랙박스 [4] 메피스토 2021.07.06 682
116289 머저리와의 카톡 14 (희비극과 플라톤) [16] 어디로갈까 2021.07.06 593
116288 건담:섬광의 하사웨이 [6] skelington 2021.07.06 571
116287 [넷플릭스바낭] '박화영' 유니버스의 청소년 낙태 오딧세이, '어른들은 몰라요'를 봤습니다 [11] 로이배티 2021.07.06 815
116286 Richard Donner 1930-2021 R.I.P. [9] 조성용 2021.07.06 439
116285 여성가족부는 해체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43] between 2021.07.06 1351
116284 이낙연과 이재명의 구도에 대한 궁금증(feat 추) [12] 해삼너구리 2021.07.05 900
116283 펩시 광고 feat 베컴,토티,카를로스,호나우지뉴/이대형 [6] daviddain 2021.07.05 466
116282 "알쓸범잡"도 끝이네요 [4] 산호초2010 2021.07.05 1003
116281 쌍둥이 연예인 [9] 가끔영화 2021.07.05 707
116280 서울극장의 죽음 [7] 사팍 2021.07.05 636
116279 연극영화과와 여성가족부 [13] 사팍 2021.07.05 723
116278 One-Minute Time Machine (2014) [4] catgotmy 2021.07.05 272
116277 책 영업 글. [6] thoma 2021.07.05 563
116276 드라마 기사의 문제점 [4] 사팍 2021.07.05 542
116275 전지현 아신전 [1] 가끔영화 2021.07.05 553
116274 화상회의를 끝낸 후 - 언어란? [14] 어디로갈까 2021.07.05 737
116273 [독서기록] 으제니 그랑데(8-끝) [7] 스누피커피 2021.07.05 311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