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보낸 메시지

2019.07.10 06:20

어디로갈까 조회 수:562

마음 졸이던 프로젝트 매듭이 풀려서인지 어제 오후부터 80%로 진전된 몸살을 앓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플러그를 뽑은 사람'이 되어 침대에 누워 집중해서 몸과 싸웠어요. 혈관을 타고 피로와 냉기가 돌아다녀서 몸으로부터 몸을 구출해야 한다는 비장한 기분이 들곤 했습니다.  
평소보다 세 시간쯤 더 잤는데, 중간에 깜짝 정신이 들 때면, 잠이 이토록 좋은 건데 부족했던 모양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고 또 잤어요. 세상도, 사람도, 일도, 무엇도 궁금하지 않았고. 그저 제 안에 떠 있는 가장 작고 밝은 불빛 하나를 가만히 응시하는 게 좋았습니다. 먼 곳으로부터 건너와 잠시 빛나던 저녁 철길의 흰 등 같던 그 불빛.
약 기운으로 들어간 잠 속인데도 이런저런 꿈들이 이어지더군요. 그 중 두 개의 꿈이 기억에 남습니다.

# 신림동 녹두거리에서 저까지 여덟 사람이 모여 소주를 마셨어요. 격식 없이 온갖 모습 다 보여주며 지내던 친구들이 모인 자리였으나, 이상하게 진정으로 친밀한 느낌이 들지는 않았어요. 모두 자로 재듯 어김없는 세상에서 흔히 마주치는 그런 얼굴들을 하고 있었죠. 저 역시 그랬을 거예요.
자리가 편치 않아서 소주 한 병을 비우고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슬며시 일어나 먼저 나왔습니다. 계산을 하려고 식당 주인에게 얼마냐고 묻자, 십만원인데 여덟명이니 당신에겐 만이천오백원만 받겠노라며 단호한 태도를 보이더군요. (이런 디테일까지 선명한 꿈이란 굉장히 우스꽝스러워요. - -)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오니 캄캄한 어둠이었습니다. 순간이동으로 저는 낯선 언덕에 서 있었어요. 취기는 있었지만 피곤하지는 않았고, 어떤 위급도 없는데 어딘지 황량했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불안정하고 빠른 걸음으로 비탈진 언덕 한쪽의 골목으로 들어가거나, 골목에서 나오고 있었어요. 그 어둠, 그 언덕에서 저는 순간 어디로 가야할지를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가야할 곳과 목표가 분명한 사람이었는데, 그 점을 꿈 속의 저는 잊어버린 것 같았어요. 제가 모르는 또 하나의 생명이 제 안에서 지고 있었습니다. 밖도 안도 다 같이 어두웠어요.

목표와 목적은 다른 것이죠. 목표는 몇 번이고 바뀔 수 있지만 목적은 개안 없이는 변하지 않습니다. 또한 목적은 그 전모를 알기도 어려워요. 그 점이 마음에 들기도 합니다. 어쨌든 다음 꿈에서는 목표 뿐만 아니라 목적도 명확히 아는 사람이 되어 있고 싶어요. 이래서 아직 살 날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 (이건 초현실주의 부조리극 같은 꿈.)

저는 사람들이 가득 찬 극장 안 객석에 앉아 있습니다. 무대에선 제가 아는 남자가 바이얼린을 연주하고 있고, 어머니는 객석의 제 곁에서 하프를 뜯고 있어요. 그런데 마지막 현에 팔이 잘 미치지 않아 힘겨워 하시는 표정입니다.
그때 어디선가 갑자기 커다란 양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검고 슬픈 목소리로 제게 무슨 말인가를 건네요. 그러나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잘 들리지 않아요. 저는 울먹이는 양의 꿈 속으로 들어가 그 말을 듣습니다. "어디로갈까야, 나는 못을 가졌단다." 양은 제게 천천히 못질을 가했습니다
다시 극장. 눈매가 날카로운 여자가 노래를 하고 있습니다. 그때 책을 싸게 판다는 광고가 극장 밖에서 들려오고, 순식간에 객석의 절반이 비어버려요. 성악가는 노래를 멈추고, 바이얼린을 연주하던 남자가 무대에서 달려 내려와요. 그리고 그는 양의 못질로 인해 피로 물든 제 몸을 안고 울기 시작합니다. 남자의 눈물 속에서 연푸른 새의 뼈가 깨지는 우두둑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아요. 어머닌  다른 곳을 바라볼 뿐, 제가 불러도 대답하지 않습니다.

바이얼린 남자의 눈물로 제 옷깃이 젖고 발목까지 흘러내린 슬픔에 극장 바닥이 흥건히 부푸는데도, 가로등엔 하얀 방전의 불꽃이 튀는데도, 그는 울고만 있습니다. 극장 밖에서는 지나던 버스 한 대가 뒤집히고, 바닷새들은 허공에 비명을 흩뿌리는데, 남자는 하염없이 울고 있을 뿐이었어요.
음악이 멈춘 차갑고 넓은 극장 대합실. 저는 막막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봅니다. 왜 내가 이런 꿈 속에 있는 걸까, 의아해 하면서.
(다행히 어떤 꿈도 반드시 끝이 납니다.)

제가 잠들어 있던 동안에도 세상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움직였겠죠. 그 속에서 몇 사람이 슬픔으로 쓰러져 죽고, 몇 사람이 사랑에 빠져 정신을 잃었으며, 또 몇 사람이 집에서 쫓겨나거나 통째로 삶을 잃었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잠에서 깰 때마다 새로운 것을 납득한 듯한 기분이 들어요. 
이해와 납득은 다른 거죠. 저는 이해하지는 못해도 납득하는 기분으로 이 세상을 받아들입니다. 문을 엽니다. 여름숲이 보이고 동산 같은 건물들이 보이고 첨탑이 보이고 철길 같은 도로가 보이고 햇살과 구름이 보일락말락합니다. 그러나 저는 납득해요. 바람이 나무와 사랑에 빠져 철길을 낳았다고 해도 납득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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