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 - 중2병류 장르에 대한 모독

2018.07.16 19:30

skelington 조회 수:1451

박훈정이 좋은 이야기꾼이 아니라는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요즘의 그의 작품들은 어느 시점에서 말문이 막히면 이야기를 멈춰버립니다. 마치 마이클 베이처럼요.
문제는 이 작품에서는 아예 처음부터 이야기를 잘 안해준다는 점입니다. 후반부의 ‘반전’을 위해서랄 수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어 보입니다.

‘중2병’, ‘세카이계’, ‘이능배틀물’.
이 작품의 일본 애니메이션스러움은 위의 ‘장르(라고 불릴수 있을지 모르겠지만)’의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거에요.
세세하게 설명하자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장르를 관통하는 정서는 ‘손발 오그라듦’일거라고 생각합니다.
인류의 혁신이나 세계의 멸망따위를 서너명의 인물들의 대사로 퉁치고 섬세한 액션묘사 대신 순간이동처럼 뻗뻗한 신체묘사만으로 가능한 액션, 돌처럼 굳은 표정의 인물이 입만 움직이는 장면들은 모두 (자본의) ‘결핍’에서 기인합니다.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의 단점에서 출발한 이러한 특징들은 태생적인 ‘결핍’으로 인해 ‘얄팍함’을 벗기 힘든 반면 그 자체로 독특한 매력을 가지며 위의 장르들은 그 ‘손발 오그라듦’을 극대화한 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박훈정은 이 장르를 진지하게 구현할 생각이 있었냐? 의 대답은 부정적으로 보입니다. 인물들이 낯간지러운 대사를 치는 건 그럴듯한 ‘이야기’가 처음부터 아예 ‘결핍’되어 있어서인건 어느 정도 부합하죠. 하지만 영화는 ‘유치하지만 진지해서 더 오그라드는’ 설명을 아예 하지 않아요. 사실 많은 사람들이 사건을 설명으로 때운다고 영화를 비판하지만 오히려 이 장르는 대사로 ‘더 공허하고 쓸데없는 설정’ 을 ‘더 많이 설명’ 했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정체불명의 조직이 정체불명의 아이들에게 정체불명의 실험을 했다는 이야기’의 정체불명을 진짜로 설명하지 않음으로서 구현합니다.
현실적인 이유로 장르를 선택했음에도 결과물인 ‘오그라듦’을 차마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는지 회피합니다. 이 허세스런 장르에서 허세를 절제하는건 오히려 더 허세스런 행위같습니다. 자신이 찍는 영화의 장르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도 없는 행위입니다. 이 영화는 ‘허세스러움’이라는 장르적 외피마저 벗겨버리면 ‘허접함’이라는 본질만이 남습니다.

“어딜 보는 겁니까? 그건 제 잔상입니다.” 같은 클리셰를 몇 장면 넣었다고 획득될 호락호락한 장르는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박훈정은 하던거나 잘 하길 바랍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6446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5030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4051
125232 홍콩느와르에 대해 생각해봤어요 [4] 돌도끼 2024.01.14 332
125231 라면 선전하는 아놀드 [2] 돌도끼 2024.01.14 318
125230 [왓챠바낭] 참 잘 했어요 왓챠. '이것이 스파이널 탭이다' 잡담입니다 [20] 로이배티 2024.01.14 381
125229 이런저런 본 것 들(카지노 스포일러) 메피스토 2024.01.13 157
125228 Children of Dune/린치의 듄 메시아 각본 [1] daviddain 2024.01.13 187
125227 누구일까요? 엄친아를 가볍게 뛰어넘는 사기캐 [4] 왜냐하면 2024.01.13 528
125226 이선균과 휴 그랜트 한국문화 [4] catgotmy 2024.01.13 598
125225 2023년 기준 세계 영화감독 흥행순위 [3] 상수 2024.01.13 434
125224 홍콩의 겨울은 참 좋군요 [2] soboo 2024.01.13 356
125223 프레임드 #673 [4] Lunagazer 2024.01.13 60
125222 [ott 간단 후기] 베니스 살인사건, 굿 닥터 시즌 6, 경성크리쳐 0.5 [14] 쏘맥 2024.01.13 353
125221 [핵바낭] 그냥 잡히는대로 일상 잡담 [17] 로이배티 2024.01.13 498
125220 이것 저것 잡담. [8] thoma 2024.01.12 289
125219 이런 영화 좋아하실 분들도 계실 듯 the loveless daviddain 2024.01.12 227
125218 프레임드 #672 [4] Lunagazer 2024.01.12 67
125217 룸 오디오 드라마 돌도끼 2024.01.12 114
125216 룸 룸 [3] 돌도끼 2024.01.12 186
125215 ▪️고 이선균 배우의 죽음을 마주하는 문화예술인들의 요구▪️ [6] soboo 2024.01.12 832
125214 또, 전투기를 샀어요 [3] 돌도끼 2024.01.12 199
125213 [넷플릭스] 초토화 [6] S.S.S. 2024.01.12 519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