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씻지 않는 것도, 겨드랑이 냄새 조차도 다 사랑할 수 있었던 그와의 관계를 정리했습니다.

참고로 저는 현재 미국 거주하는 한국인 게이고 그는 백인 게이입니다.


어차피 10월말에 그가 다른 소도시로 이사갈 거란 걸 아는 상태로 계속 만났는데 갈수록 저는 사랑이 더 깊어졌어요.

이 사람과 함께라면 커밍아웃도 할 수 있겠다, 부모님께 말하고 미국으로 이민와서 결혼하고 싶다 싶을 정도.

그와의 섹스도 무척 좋았고 한번씩 세심하게 챙겨주는 문자가 오면 막 감동하고...

하지만 포지션이 썸남과 남친의 사이 그 어딘가쯤이었습니다.


결국 제가 I love you라고 고백을 했습니다만 돌아온 대답은 You are so wonderful 이었어요.

그쪽은 아니란 대답인 걸 알지만 그 뒤로 더더욱 다정하게 대해주길래 '그에게도 시간이 필요하겠지. 어쩌면 희망이....?' 뭐 그런 생각을...


헌데 왜 하필이면 그 도시로 이사를 가느냐고 물었을 때 전에는 직장에서 전근보내는 거라고 대답했었어요.

이상하다...화장품과 관련된 일을 하는 거 같은데 트렌디한 대도시가 아니라 조그마하고 심심한 소도시?

뭐 본사가 거기 있는 거겠지.

어제 마지막 출근길을 배웅해줄 때 다시 한번 투정 비슷하게 '왜 꼭 거기로 가야 하냐 뉴욕, LA,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많고 많은데.' 그랬더니

대답을 못하고 주저하는 거에요. "방값이 싸잖아..."

뭔가 낌새가 이상했습니다. 전근가는 사람의 느낌이 아닌 거 같은.


그래서 정말 그러기 싫었지만 그의 페이스북에 들어가봤습니다.

비공개계정이지만 친구가 누군지는 확인할 수 있었죠. 거기서 언뜻 그의 우편물에서 본 이름을 가진 아시안을 찾았습니다.

그의 프로필을 읽어보니...마침 그 소도시에 살고 있는 거에요. 게다가 사진 중에 제 썸남이 입고 있던 그 티셔츠를 입고 찍은 사진이....

문득 희미하게 그가 올여름 아프리카로 여행가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다가 왠 아시안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있어 누구냐고 물어본 기억이 났습니다.

그땐 투어에서 한 팀이었던 남자라고 그랬는데.


문자로 물어봤습니다. 그 소도시로 이사가는 이유가 이 남자 때문이냐고.

2분만에 그렇다고 답장이 오더라고요. 불행하게도 날 알기 전에 이미 같이 살기로 약속해서 어쩔 수 없다나.....

풉. 여기서도 같이 살았단 걸 아는데 뭔 개소리.

아니 이렇게 쉽게 인정할 걸 왜 여태껏 말 안하면서 싱글행세를 한 건지.

혹시나 싶어 게이들의 만남어플에 들어가봤더니....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접속을 한 상태였더라고요.


그리고나서 곰곰히 돌이켜 생각해보니...여태껏 좀 의심스러웠던 행동과 말들이 다 이해가 되는 겁니다.

왜 나랑 만나기로 한 저녁에 갑자기 다른 약속이 생겼는지, 친한 친구랑 밤 늦게까지 술마신다면서 그 친구 이름은 왜 며칠 뒤 기억을 못하는지,

왜 난 보지도 않은 넷플릭스 작품을 나랑 같이 봤다고 생각하는지, 시차가 있는 곳에 사는 친구라던 그 사람이 바로 남친이었구나 등등...

핸드폰을 늘 엎어두는 이유, 내가 '핸드폰 충전시킬께' 아니면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줏을 때마다 걱정스럽게 쳐다보던 그 눈초리..

내 침대에 누워서 만남 어플을 돌리고 있었다 생각하니 정말....

자기 직장부터 시작해서 이 엄청난 fake story를 그때그때마다 만들어 냈어야 했겠구나...오히려 쓴웃음이 나오더라구요.


내 집에 있는 본인 물건들 다 챙겨놨으니 가져가라고 문자를 날렸습니다. 그랬더니 내일 오면 안되겠냐고...

ㅎㅎㅎㅎㅎ 와....이 새퀴 아직 상황파악이....버릴거니까 오늘 꼭 가져가라 했더니 저녁에 왔더라고요.

헌데 얼굴의 느낌이 그동안 보던 것과 좀 달랐습니다.

뭐랄까...사기꾼이 자기 수법이 들킨 다음에 "어랏, 눈치챘어? 그동안 재밌었는데 안타깝네." 뭐그런 뻔뻔한 표정과 말투.

미안해하고 날 걱정해하고 그런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어요. 그게 더 화가 났습니다.


기껏 하는 말이 "나랑 대화하고 싶어?"

대화는 무슨. 어차피 다 거짓말일텐데. 여기 오는 동안 내가 할 질문에 답안지를 미리 만들어 왔을텐데. 

필요없다 말하고 돌아서는데 "Ok, take care." 끝.

이렇게 간단히. 이렇게 무심하게. 이렇게 무미건조하게.

정리되네요.


정말 게이월드에는 진정한 사랑은 없는건지...싶다가도.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던 남자를 차버린 죄값을 받는 거다...자학하고.

푹 잤다고 생각했는데 세시간 잤더라고요. 더 자야하는데. 밤이 아직 긴데.

잠은 안오고 속은 쓰리고.


네, 이건 실연이 아니에요. 그쪽은 날 엔조이 대상으로 삼았으니까.

네, 이건 배신도 아니에요. 그쪽은 어차피 날 사랑하지도 않았으니까.

그냥 저 혼자 순진하게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사랑에 빠져 바보같이 허우적대고 정신못차리고 있었던 거니.

물론 거짓말을 해리포터 책처럼 판타지로 늘어 놓은 그 순진한 얼굴의 사기꾼의 잘못이 있긴 하지만...


낸시랭 씨의 사연이 저랑 똑같진 않지만 전 이해가 되더라고요.

우린 인간이니까. 객관적일 수 없고 믿고 싶은 것만 염원하면서 본인이 옳다고 자신을 설득하는 불완전한 존재니까.

그러게 왜 남의 말을 안들어...그러게 왜 너만 몰랐어...이런 말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시간이 답이죠. 그리고 남자로 인한 상처는 남자로 치료하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란 것도 경험으로 알....쿨럭!

아직은 많이 아픕니다. 하지만 또 잊고 극복할 거에요. 정말 놀랍게도 시간이 흐르면 이런 게 잊혀지더라고요.

영화주인공이 된 거 같은 멋진 추억도 많이 선사해 줘서 고마운 점도 있긴 있죠. 그 추억은 그냥 간직하려고요.

상대는 쓰레기 같은 놈이었지만 제 감정만큼은 명품이었으니까.


일단 오늘은 정신못차릴 정도로 바쁘게 일하려고 합니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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