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전 단편인 "재희"는 영과 누군가와의 만남을 처음과 끝으로 온전하게 그려놓았습니다. 재희가 결혼한 뒤의 짤막한 에필로그까지요. 그에 반해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은 이미 끝나버린 두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과거를 회상하는 식으로 짚어나갑니다. 영의 어머니는 영이 게이라는 사실을 알고 영을 정신병자로 몰아넣었던 과거가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암에 걸린 상태입니다. 동시에 영은 5년 전에 헤어졌던 옛 연인으로부터 편지 비슷한 글을 받습니다. 재희에 대한 여러 감정이 결혼식을 기점으로 시원섭섭하게 정리가 되어버렸다면, 이 둘에 대한 감정은 영영 풀리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회상형의 시제는 늘 미처 다 해결하지 못한 숙제를 전제하잖아요.

영의 엄마와 그 사람은 갈라진 두 세계의 대표자들입니다. 한 명은 정상 가족 테두리 안의 동반자, 한 명은 정상 가족 테두리 바깥의 동반자입니다. 접점은 커녕 완전히 멀리 떨어져있는 이 둘은 영에게 공통된 기억을 일으킵니다. 너무나 사랑하고 싶었고,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인간으로 남았습니다.

영의 엄마는 암에 걸려있습니다. 영이 엄마를 간병할 때 그 사람과의 사랑이 시작됩니다. 자전적이라는 점을 감안해야겠지만, 영에게 동시에 일어나는 이 변화가 서로 비유되는 거라고 보면 너무 무리한 해석일까요. 영이 그 사람을 만났던 것은 간병에 전념하느라 병들어있던 자신의 마음에 간병인을 하나 들인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자신의 일상에 낫지 않는 암세포를 키우기 시작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영이 좋아했던 그 사람은 우럭 한 점에 우주를 떠드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무한한 간극의 로맨스는 그날 비릿한 회맛의 첫키스를 나누며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간극이 둘의 관계를 파국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는 이상이 너무 뚜렷했고, 일상의 작은 조각에서도 타협할 수 없는 이상의 실패를 느끼는 인간이었습니다. 성조기 티셔츠, 미제 이불, 이런 것들에 그는 대놓고 염증을 표했고 그 때마다 영의 호의는 번번히 묵살됐습니다. 이상과 현실, 투쟁과 관계를 너무 합치시키려 했던 그에게 연애란 너무 어려웠던 일일지도 모릅니다. 좋아하는 사람과의 사상적 결합은 가능한 일일까요. 혹은 필요한 일일까요.

영이 게이인만큼 가장 근본적으로 맞아떨어져야 할 사상이 있습니다. 게이답게 살 것인가, 게이가 아닌 것처럼 살 것인가. 외부의 압력에 반응하는 이들의 태도 역시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자기를 입에 달고, 팔짱을 잘 끼고, 거침없이 키스를 하는 게 영이었으면 그 사람은 사람들의 눈치를 끝없이 봤습니다. 이러지 말아요. 미쳤어요? 누구에게나 연애의 애로사항은 있겠지만, 일상 속에 녹아있는 이 곤란함은 제게 조금 다르게 다가오더군요. 그냥 비밀이 아니니까. (얼마전 명동 쪽에서 손을 잡고 걷던 20대 남남커플이 생각납니다)

영의 연애를 보며 이것이 투병과정과도 닮아있다고 느꼈습니다. 영이 좋아하더 그 사람은 영보다 연상이라는 이유로 계속해서 우주 어쩌고 사회 어쩌고 하며 영에게 재미없는 소리를 늘어놨거든요. 콩깍지라고 점잖게 표현하지만, 사실은 아주 쉬운 단계의 인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시간이 쌓이고 둘의 싸움이 잦아들면서 영의 인내도 점점 힘들어집니다. 어머니의 투병도 점점 더 독해지면서, 이 전까지는 짜증일색이었지만 후에는 성경을 필사하는 식으로 바뀌었구요. 이게 또 영이 작가가 되는 식으로 글쓰기를 계승한 것 같기도 합니다.

영은 엄마를 볼 때마다 계속 생각합니다. 그 때 나한테 왜 그랬어? 그와의 과거가 현재진행형일 때, 영은 엄마와의 과거를 혼자 묻습니다. 영의 엄마는 정신병원에 그를 가둔 적이 있습니다. 어쩌면, 영과 엄마는 동시에 앓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엄마는 암을 앓고 영은 그 상처를 앓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영은 낫지 못합니다. 엄마에게 사과를 받아야겠다고 계속 결심하지만, 끝내 그 말을 하진 못합니다.

재희와의 관계가 사랑 아닌 사랑 비슷한 관계였다면, 어머니 그리고 그 사람과 영의 각 관계는 명백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하면서 너무나 힘들어합니다. 왜 어떤 과거는 잊혀지지 않는 걸까. 재희와의 관계가 계속 갱신되어가는 현재였으며 결국 정상가족으로 편입해가는 이와의 이별로 갱신이 마무리되었다면, 영은 엄마와 그 남자 각각의 관계에서 계속 과거를 향해 나아갑니다. 당신은 나한테 왜 그랬나요. 엄마에게는 이 커다란 질문이 속에 얹혀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작은 질문들이 쌓이고 쌓이다가 마침내 커다란 질문으로 응어리집니다.

이 둘과의 관계는 죽음과 아주 가까워지며 끝납니다. 죽여버리고 싶은, 죽어버리고 싶은 그 충동을 안긴 사람들과 영은 남은 시간을 힘겹게 보냅니다. 영은 괜찮아졌습니다. 하지만 이 편의 도입부인, 5년만에 그에게 다시 받은 일기를 보면서 마음은 다시 헤집어집니다. 그래도 잘 살아가겠지만, 못산 적이 없던 것처럼 연기를 해야 하는 그런 상처자국들이 있습니다. 미워하고 잊어가면서도, 영은 두 사람의 사랑과 상처를 잊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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