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찾은 혀]를 읽고.

2023.11.26 23:04

thoma 조회 수:175

엘리아스 카네티의 자서전 [자유를 찾은 혀]를 읽었어요. 인상적인 부분 위주로 생각나는 것만 써 봅니다.


카네티는 스페인계 유대인으로 불가리아에서 태어났고 국적은 튀르키예였답니다. 불가리아 루세라는 곳에서 큰 상점을 운영한 할어버지 중심의 대가족과 친인척 사이에서 6년을 산 후에 부모형제만 영국으로 이주합니다. 외삼촌이 맨체스터에서 사업을 크게 해서 일을 함께하자는 요청도 있었고 시골과 다름없는 외곽 생활을 벗어나려는 부모의 상호이해가 맞았거든요. 영국행 1년만에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죽자 부모가 사랑하였으며 어머니가 익숙한 도시인 빈으로 갔고 전쟁이 나자 다시 취리히로 옮겨가서 학교 생활을 하게 됩니다. 여기까지, 이 책에서는 카네티의 16세까지(1905-1921) 시간이 다루어집니다. 

후기 글의 상찬을 믿고 시작했는데 [군중과 권력]도 안 읽었고 카네티에 대해 특별한 관심도 없었기 때문에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지 의심이 있었습니다. 거기다 자서전이라는 갈래에 대한 불안도 있었고요. 하지만 대다수 책의 길을 따라 이 책도 뒤로 가면서 점점 기세를 얻고 흥이 더해지며 즐거운 독서를 할 수 있었습니다. 자전적 소설과는 달라서 구조적, 의미적으로 이야기의 완결성은 기대할 수 없지만 실재의 시공 속에서 한 인간이 만들어져 가는 과정을 보는 다이나믹함과 어떤 대목들은 실제로 비판이 가능한 여지를 준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이 책의 내용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부모와의 밀착된 관계였어요. 그리고 부모와의 관계는 카네티가 책과 맺는 관계로 이어져요. 카네티는 아버지와, 아버지가 죽은 후엔 어머니와 매우 친밀하게 지내는데 모든 내적, 외적 사건들을 다 공유하며 서로가 세상의 전부인 양, 카네티 본인의 경우는 진심 서로의 인정만이 전부라는 애착 관계 속에서 성장합니다. 아버지가 한 권씩 가져다 준 책은 독서 후 그 내용을 아버지에게 이야기하며 카네티 최초의 세계를 형성하고, 어머니가 가져다 주거나 좋아한 책은 어머니와 함께 독서하고 대화하면서 같이 만든 세계로서 카네티에게 말 그대로 흡수됩니다. 

십 대 초반까지 부모의 영향은 누구에게나 강력하지만 이 가족의 경우, 이 모자의 경우는 프로이드의 사례 중에서도 두드러진 예가 될 법해요.

카네티는 아버지 죽음 후 모자 사이에 무언가의 침입(어머니에게 접근하는 남자들)으로 틈이 보인다 싶으면 끈질긴 집착과 집요함으로 불순물을 제거하고 투쟁하여 복구합니다. 또한 어머니는 절대적, 독재자적 영향력을 카네티에게 행사하면서 정신적인 고문에 가까운 언사를 예사로 하며 지배합니다. 그 고문은 주로 책과 지식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키는데 쓰이고 공명심을 주입시키는데 쓰이긴 하지만 서로에 대한 극심한 기대와 압박이 이 책 이후의 시기에 다가올 이상 기운을 예감하게 만듭니다. 남동생이 둘 있는데 이들에 대한 이야기 분량이 거의 없어요. 동생들과 놀며 있었던 일, 아버지 사후 생길법한 동생들에 대한 감정, 두 동생 각각의 특징이나 주고받은 영향이 거의 표현되지 않아요. 마치 자신과 아버지, 자신과 어머니만이 가족인 것 같이 내용을 채워놓고 있었습니다. 


카네티는 이 책 분량 반을 차지하는 취리히에서의 생활을 아주 만족스럽게 회고하고 있습니다. 특히 어머니의 요양으로 가족이 떨어져 지내는 후반부 이 년의 시간 동안을요. 교사들과 급우들을 관찰하고 그들로부터 받은 영향과 그들에 대한 존경을 고백하며, 읽는 책과 더불어 그들로부터 받은 영향으로 인하여 자신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듯한 성장의 기쁨을 느꼈다는 서술이 몇 번 나옵니다. 이 부분들은 저도 특히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예전에 헤르만 헤세나 토마스 만의 성장 소설들을 읽을 때의 느낌도 나고 말이지요. 

이 부분은 처음으로 유대인에 대한 반감을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카네티는 지식욕과 더불어 과시욕이 있어 모든 수업 시간에 언제나 손을 너무 자주, 너무 빨리 드는 학생이고 학급에 있던 또 한 명 유대인 학생은 학습이 아주 쳐지는 애였어요. 둘 다 급우들에게 미움을 사고 둘을 묶는 공통점으로 욕설 쪽지(--꺼져라, 우리는 네놈들이 필요없다)를 받고 따돌림을 당합니다. 카네티는 학교 전체 유대인 학생들과 모여 탄원서를 써서 제출하고 학교는 요란스러움 없이 실질적으로 접근해서 문제를 해결합니다. 카네티는 시간이 흐른 후 학교 측의 조치를 알게 되고 원래 가졌던 스위스라는 나라에 대한 호감을 더하게 됩니다.


시기가 시기라 눈에 들어온 것도 있겠지만 책 속에서 어머니의 태도를 통해 유대인들의 이중성을 생각해 보게 되더군요. 어머니는 혈통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데 그냥 '유대인'이라서가 아닙니다. '세파라드 유대인'임을 강조하는데 15세기 스페인에서 추방된 유대인이라고 하네요. 이들은 일반 유럽계 유대인, 독일계 유대인을 차별하여 그들과는 결혼도 해선 안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세파라드 유대인 중에서도 자신의 가문에 대한 자부가 엄청나며 그 자부심의 근거는 카네티의 말에 의하면 오로지 부유함에 있다는 것입니다. 가문 내에서 친척들이 유산 문제로 마지막 한 푼까지 파산시키려고 소송을 거듭하는 추함을 보면서도 가문에 대한 자랑과 문학을 사랑하는 마음 사이에서 어머니는 아무 모순을 못 느끼더라고 카네티는 적고 있어요. 같은 유대인끼리도 구분하여 차별하며 부를 이룬 소수 유대인 가문만의 결집을 통해 자부심을 갖는 모습을 보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오래 차별 받은 세월 속에서 아무런 배움이 없었던 것일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네요. 애초에 세파라드 유대인도 스페인에서 쫓겨나서 동유럽으로 옮긴 상태였거든요. 자기 객관화가 이렇게 어려운 모양입니다.   


취리히에서 카네티가 좋아한, 하지만 카네티를 좋아하지 않았던 친구가 있는데 이 친구 소개를 좀 하고 싶지만 책 내용이 너무 들어가는 것 같으니 생략하겠습니다. 

책은 지루하지 않고 잘 읽힙니다. [군중과 권력]이 가깝게 느껴지는 효과가 생깁니다. 언젠가 읽어 봐야겠어요. 

참, '내 삶의 이야기 속에 나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없다'라고 책 뒷면에 적혀 있었으나 완전히 자신에 대한 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 왜 이런 언급을 했는지는 자서전 나머지가 번역돼 나와야 알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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