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하기.

2023.11.27 09:42

잔인한오후 조회 수:817

아무래도 현재 진행중인 이 사태에 평소보다 더 몰입하게 되는 이유는 당장 퀴브라 귀뮈샤이의 [언어와 존재]를 읽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퀴브라 귀미샤이는 독일에 사는 "히잡을 쓰는" 터키계 이민자 이슬람 여성으로서 "이름 짓는 자"들에게 이름 붙여지고, 언어의 "유리 새장"에 갖히거나 타자의 무지를 위한 "갑옷"에 입혀진다고 이야기합니다. 9.11 이후 20억 이슬람을 대표해서 언제든지 자기도 모르는 나라들의 정치 상황과 종교 신념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하며, "희잡을 쓰는" 이슬람 여성으로서의 진보성, 보수성, 이념을 설명해야만 하는 피로를 토로합니다.


최근 진행중인 일을 짧게 정리하자면, 앱 게임의 영상을 외주하는 업체에서 일하는 일러스트레이터 한 명의 1년 8개월전 글이 재조명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남자 눈에 거슬리는 말 좀 했다고 sns계정 막혀서 몸 사리고 다닌적은 있어두 페미 그만둔적은 없다 ㅇㅇ 은근슬쩍 스리슬쩍 페미 계속해줄께"라는 트윗을 '영상에 작업하면서 크기가 작다고 표현하는 손 제스쳐를 몰래 넣을께'라고 해석한 이들이 새벽 내내 손 제스쳐처럼 보이는 장면들을 프레임 단위로 찾아내어 공유하고 전시한 상황입니다. 끊임없이 "손 제스쳐를 몰래 넣겠다고 이렇게 고백하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지 않느냐"라는 이야기들이 재생산되고, 그 증거로 저 트윗의 문구를 드는데 저로서는 너무 이해하기가 힘들어서 글을 쓰게 됩니다.


이런 전개를 통해, 그와 관련된 업체들이 새벽 출근을 하고 CCTV를 통해 게임 업체들의 빌딩 창문이 밝게 빛나는 사진이나 네비게이션으로 본 그 근처 도로 상황이 막힌다거나, 혹은 실제 관계자가 블라인드에 욕두문자를 적은 (당연하게도 일요일 새벽 출근을 해서 굉장히 화가 나 있는) 사진들을 공유하며 잔치처럼 즐기고 있는 장면이 공포스럽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강력한 대응을 하겠다는 각 게임 업체들의 통보들을 공유하며 권력이 향하는 걸 즐기고 있는 상황.)


일요일 당일 그 영상을 만든 업체에서 공식 사과문을 올리고, 역시 당일 그 트윗을 썼던 당사자가 트위터에 사과문을 올리면서 일단은 첨단에 도달한 느낌입니다. (앞으로 소송 같은게 실제로 이어진다면 법적인 결론은 몇 년 후에나 나오겠지만, 영상 업체는 영상 수주가 끊겨 망하거나 개인이 퇴사로 끝난다면 그게 끝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 사과문을 읽고 더욱 이런 글을 남겨보려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페미니스트나, 페미니즘 등의 사상에 결코 동조하지 않으며 오히려 페미니즘 사상이나 행동들을 반대함을 밝힙니다." (심지어 사과문에 의하면 제가 트윗을 했다고 알고 있었던 것은 리트윗임을 방금 알게 되었네요. 할 말이 없습니다.)


아마 제가 이런 글을 쓸 필요도 없이 조금 시간만 지나면 나무위키에 낱낱하고 자세하게 모든 것이 다른 관점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제가 느낀 몇 가지 공포를 서술하고 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 오래된 사상적 글들을 끊임없이 문제로 삼고 있다는 점. 이전 번의 비슷한 사태에서는 굉장히 오래된 '이미 지워진 트윗'을 되살려 페미니즘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린치했습니다. 이는 뒤집어 언제든 어디서든 앞으로 편안히 살기 위해서는 사상에 대해 밝히지 말라는 말이 됩니다. 다른 하나, 페미-하기. 어느새 메갈이란 말도 안하고 '페미'라고 부르며 페미-하기가 "자신의 공적 업무에 남성 혐오(?)적인 기호를 숨겨넣기"가 된 건지 놀랍습니다. 심지어 저 트윗에서는 이미 페미니즘에 동조했을 때의 인터넷 린치에 대해 서술하고 그렇기 때문에 사상을 잘 드러내지 않으면서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이것은 메갈-하기가 일베-하기의 거울상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서 페미니스트로 살기까지 뒤집어 엎는 상황일 것이고 그런 사고 과정이 두렵습니다. 


P. S. 당연히 오랫동안 이 전쟁과도 같은 상태를 보아왔지만 이번 일로 수용 한계를 넘어선 것 같습니다. 전에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는 후원을 늘리는 방식으로 해소했는데 이건 뭐 어떤 방식으로 마음을 풀어야 할 지 감도 잡히지 않고 무력하네요.


P. S. 2. 그리고 구글에 검색했을 때 "이번 사태를 보는 여시들, 페미들의 반응" 같은 것으로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 되가는걸 (그리고 너희들을 그렇게 "둔감"하고 우리들은 이렇게 "민감"하다는 걸) 보는 것도 너무 힘들군요. 분명 앞으로도 '은근슬쩍', '스리슬쩍'이라는 단어를 끊임없이 남용할텐데 이미 괴로움이 느껴집니다. 매 번 이렇게 공갈빵처럼 실질적인 내용 없이 부풀어 오르는 상황에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을 때도 있고 그런데 그게 맞나 싶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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