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의 변화.

2020.04.22 21:00

잔인한오후 조회 수:950

왜 어떤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구루 같은 말을 하고 싶어할까 궁금하고, 제 자신도 그걸 원할까봐 경계하는데도 거기에 서서히 빨려들어갑니다. 조리있고 간결한 글이 주는 아름다움에 홀리는게 아닌가 싶어요. 지인의 말로는, 제가 허세와 진실을 잘 분간하지 못한데요. 그 사람은 허세를 떨고 있는 건데, 그걸 진지하게 읽어준다나요. 허세인지 알려면 내용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라고 하더군요. 뭘 아는 체하면서 실제 뭘 아는지는 말하지 않고 눙치면 의심하라구요.


최근 정의당 비례대표 1번의 대리랭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댓글을 쓴 후에 그 내용을 꼼꼼히 되씹어보게 되더군요. 첫번째로는 제 자신이 해왔던 그러한 행위들을 되짚는 것이죠. 어떤 게임의 1대 1 플레이를 끝까지 (끝이라는건 3번 지거나 12번 이길 때까지) 대리로 해 준 적이 있어요. 그것은 게임 내 재화나, 현금을 들여 구매한 입장권으로만 들어갈 수 있어요. 즉 제가 여러 번 이길수록 참여한 다른 사람들은 기회를 계속 잃는 것이죠. 어떤 게임의 계정을 지인에게 빌려준 적이 있어요. 게임에서 2인 이상 함께 플레이해야 가능한 부분들이 있고, 그런 부분들을 혼자하기 위해 빌려달라고 했었죠. 계정 양도는 약관으로 금지되어 있고, 이런 방법으로 컨텐츠에 빨리 접근할 경우 원칙에 맞춰 1인 플레이를 하는 사람들에게 상대적으로 피해를 주는 행위죠. 타인의 계정으로 한 게임을 상당히 오래하기도 했어요. 초기에 어쩌다가 그런 모양새가 된 지 모르겠는데, 제가 게임 내에서 어떤 불법적 행동을 할 경우 그 타인이 책임을 지게 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겠죠. (계정 양도 자체가 이미 문제고.)


페미니즘 이야기를 할 때, 지인과 언제나 동일한 논쟁을 하게 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 시점에 그 문제는 문화적으로 용납되는 일이었고, 도덕이나 윤리적인 문제도 아니었으며, 자신이 그것을 문제로 자각하지도 못했다', '과거 사람의 과거 일은 과거의 준칙으로 판단하여야 한다'는 주장이에요. 여기서 두 가지 방향이 있어요. 첫째로는 훈고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이죠. 가정 내 폭력은 언제부터 이미 법적으로 처벌 가능했으며, 강간도 마찬가지다. 성추행, 성폭행에 대한 사람들의 관점은 그 당시 발간된 신문과 소설 등에서 충분히 비난 받아 마땅한 일이었으며, 당시 이뤄진 설문조사에 의하면 이와 같이 잘못된 행위임을 대부분이 인지하고 있었다 블라블라. 두번째로는 어떤 년도, 어떤 세기든 상관 없이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16세기에도, 기원전 4세기에도 잘못된 일은 잘못된 일이고 특히 현재 시점에서 재해석하며 잘못된 일이라고 (적어도 살아있는 사람에 한해서는) 받아들이고 시인하고 사과해야 한다는 관점입니다.


저는 전자, 후자 둘 다 필요로 해서, 오래된 책들과 최신 책들 둘 다를 모으거나 읽습니다. 하지만 알면 알수록 입은 다물어지고, 아는 걸 바탕으로 말하려 할수록 실상과 멀어지게 됩니다. 아는 걸로 말하려면 마지막에는 학문이 기다리고 있고, 논문을 내거나 학계에서 인정받을 건 아니니 모호한 상태가 되거나 하죠. 그러다 보면 처음에 뭘 하려고 했는지 잘 모르게 되고 쉬게 됩니다. (지금부터 윤리학을 읽는다거나 하는 별 의미없을 행동 같은 것.)


부모님께서 종교에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고, 제가 그런 신념을 가지지 않게 된 것에 궁금해하고 안타까워 합니다. 그래서 거의 매번 만날 때마다 언제 다시 그런 신념을 가지게 되겠니라고 물어요. 최근에는 거의 포기하다시피 한 것 같은데, 아버지가 묻더군요. '지금에서 가장 궁금한게 있다. 자식의 입장에서, 부모가 어떤 강한 신념을 가지고 그게 사실이라고 말하는데, 그걸 거짓이라고 생각하면 부모는 거짓말쟁이가 되고, 사실이라고 생각하면 신념을 버릴 수 없는데 부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저는 조금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을 했어요. '저는 그게 사실인지 거짓인지 자체에 아무런 관심이 없어요. 그러니까 그건 그런 상태로 관심 밖에 있는 것이죠. 그런 신념을 가지거나 가지지 않거나 부모님에 대해 어떤 그러한 판단을 내리고 있지도 않고, 그런 부분으로는 관심이 없어요.'


'게임 윤리'라는 말을 처음 꺼내봤는데, 그게 과연 무엇이고 얼마나 지킬 이유가 있는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제게 있어, 법 테두리 바깥의 윤리는 어느 정도 느슨하고, 공동체 중심으로 생각됩니다. 어느 정도는 내적인 논리를 바탕으로 지켜야 할 원칙을 생각히고, 어느 정도는 함께하는 공동체가 어떤 것을 윤리적이라 생각하고 아니라 생각하는지가 중요하죠. 윤리가 아니었던게 윤리가 될 수도 있고, 그걸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각 공동체마다 윤리에 어긋나는 행위가 어느 정도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걸 정하는게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의미가 있다고도 생각해요. (다만, 세계 인류 전부를 공동체의 일원이라고 생각하면..)


약간 다른 이야기이지만 그런걸 생각해봅니다. 무당층인 사람들과 아닌 사람들을요. 저는 제가 지지하는 원칙을 쉽게 바꿀 수 없는 사람이고, 정반대를 지지하도록 바뀌는 경우를 상상해보라면 상상하기 힘들어요. 그와 마찬가지로 반대쪽을 강하게 지지하는 사람들이 바뀌기 힘들겠다고 어느 정도는 이입하죠. (어떤 경우, 상대는 완전히 정반대로 바뀌길 바라고 자신은 절대 바뀔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넷에서는 이 쪽을 찍었다가 저 쪽을 찍었다 했다는 사람들은 흔히 볼 수 없어요. (적어도 30% 이상이 그런 사람들일텐데.) 자신의 지지점을 유연하게 바꾸기 때문에 변화의 가능성이 가장 강한 사람들인텐데 말이죠. 아마 그런 이야기를 했을 경우 양 쪽( 40%, 40%이라해도 합하면 80%나 되니까..)에서 욕먹으니 글을 안 쓰겠죠.


거기에 꼬리를 물고, 저는 매번 제가 상대하는 반대편의 약한 고리를 포섭해야 된다고 보는 편이거든요. 아주 강하게 어떤 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소수고, 그 쪽과 이 쪽 사이에 잔잔한 그라데이션을 그리며 사람들이 위치하고 있겠죠. (심지어 여러 경우, 그건 여러 팩터로 구성된 복잡한 차원을 그릴 겁니다.) 양 쪽으로 결집시킬게 아니라면, 저 쪽(이라고 선 그어진 반대편)에서 이 쪽에 가장 가까운 쪽을 격려하면서 수용해야 하는게 아닌가 언제나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선거의 경우, 60%의 반대편 지지자보다는 40%의 우리편 지지자를 생각해요. 각각의 사람들은 하나의 표만 줄 수 있는데...


너무 돌아갔네요. 저는 이번 지역구에서는 정의당을, 비례대표에서는 녹색당을 투표했어요. 어느 쪽도 뽑히지 않았죠. 일단 범죄 사실이 있을 경우, 소명이 명확하지 않으면 탈락시키고, 젊은 사람들을 위주로 선택하고, 공약에 N번방이 들어 있나 확인했어요. (지인은 개인이 돈이 얼마나 있는지 보고 너무 많으면 표를 안 줬다고 하더군요. 그건 생각도 못 했어요! 개인이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보지도 않았거든요. 다른 분들은 어떤 것으로 후보들을 선택했는지 궁금해요, 다음에 참고할 수도 있구요.) 그러다 보니 그렇게 되었는데, 이번 비례대표 투표는 그 전에 느껴지지 않던 '사표'가 아주 강하게 느껴지더군요. 그래서 가능하다면 어떤 당에 당원으로 들어가볼까 고민 중입니다. 탈퇴했을 때도 제 개인정보가 남아 영원히 선거철마다 문자가 올까봐 겁이 나긴 하지만요.


위에서 고백했던 행위들은 앞으로는 당연히도 하지 않으렵니다. 걸려서 계정 정지가 되는게 두렵다기보다는, 그게 윤리적이지 않아서요. 윤리, 혹은 원칙을 따지는 반댓말로는 실리적이란 단어를 쓰던데 어디까지가 올바른 용법인지는 모르겠어요.


P.S. 미래의 기후 윤리가 정립된 후손들은, 현재의 무윤리적으로 탄소배출을 하는 우리들을 엄청 욕하겠죠. 그것도 조금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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