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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핀처는 자신의 영화적 책임을 스필버그의 [죠스]와 연관된 경험으로 풀었다. 자신은 [죠스]를 본 이후 해변에 가질 못하고 있으며 그 영화는 자신에게 엄청난 상처를 주었다고. 그리고 자신도 그런 상처를 사람들에게 주고 싶다고. 영화를 보는 것은 결국 상처를 주려는 사람과 상처를 받으려는 사람 사이의 합의된 학대일지도 모른다. 어떤 영화가 재미있다거나 잘 만들었다는 건 별로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다. 어떤 영화를 본 사람에게 얼마나 크고 깊은 상처를 남겼는지 그것이 제일 중대한 과제일 수도 있다.


고백하건데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데드 링거]는 내게 엄청난 상처를 입혔다. 살을 째는 아픔, 그리고 살을 째는 듯이 느껴지는 동질한 존재와의 이별, 이 모든 언어적 수사를 수술행위로 직역해서 보여주는 그 영상의 폭력까지 내가 잊을 수 없는 무엇이 되었다. 이전부터도 그의 악명은 들어왔고 악취미적인 재미를 기대는 했지만 이 정도로 나를 찢어내는 뭔가를 보여줄 줄은 몰랐다. 어떤 영화들은 보고나면 너무 좋아서 다시 보고 싶지 않아진다지만 나는 [데드링거]의 그 고통이 다시 볼 때 희미해질까봐 또 보고 싶지 않다. 그 고통을 다시 겪고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최초의 고통이 경감되는 것이 싫은 것이다. 정확히 왜 그러는지는 나도 모른다. 미학적 단위로 환산했을 때 그 엄청난 감동을 잃어버리기 싫다는 자기분석은 할 수 있겠지만, 아무튼 그 고통은 내게 소중한 무엇이다.


이 최초의 상처가 크로넨버그의 영화들로 나를 이끌지만 동시에 후대의 다른 영화들이 그의 작품 세계로 문을 열어주기도 한다. 사실 [데드링거]는 작품 자체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내가 이 전에 보고 경악했던 프랑수아 오종의 [두 개의 사랑] 때문에 본 것이기도 했다. 많은 평론가들이 이 영화를 [데드링거]의 리메이크이자 자식같은 작품이라고 언급해서 언젠가는 봐야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2년전 한국에서 개봉한 [티탄]은 많은 사람들이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크래시]와 연관지어 이야기했다. 도대체 [크래시]는 어떤 영화길래 이렇게 끔찍하고 인간같지도 않은 [티탄]을 내놓을 수 있단 말인가? 2년간 묵혀놓은 호기심이 서울아트시네마의 캐나다 영화제와 연결되었다. 어제 나는 [크래시]를 볼 수 있었고 몇년만에 강렬한 영화적 미로를 겪었다.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끝날지 아무 것도 짐작이 되지 않는 와중에 극악한 신체훼손과 성욕의 파괴적 이미지들이 계속 관객들에게 충돌하고 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다른 관객들이 어버버거리며 당황과 혼란을 떠들어대는 걸 엿들으면서 괜히 웃기도 했다.


[크래시]는 도입부부터 사람을 질리게 만든다. 어떤 부부가 있는데 이 부부는 각자 불륜을 저지른 경험담을 공유하며 성적 흥분을 느낀다. 이 설정을 풀어내는데만 작품 한편은 넉넉히 나올 것 같다. 영화는 그런데 이 부부에게... 하며 다른 사건을 일으킨다. 주인공이 탄 차가 다른 차와 부딪혀 사고가 났고 그 차에 탄 사람 한명이 죽었는데 주인공이 점점 교통사고 자체에 흥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고 이들 모임은 일부러 차 사고를 내며 쾌락을 탐닉한다. 영화는 이걸 블랙코메디나 상징으로 풀어낼 생각이 전혀 없다. 이 말도 안되는 미친 짓을 카메라는 진지하게 담아낸다. 


크로넨버그가 안찍었다고 할까봐 영화는 어김없이 쇳덩어리와 살덩이의 결합을 보여준다. 교통사고가 난 환자를 보여주려면 붕대나 깁스를 멘 환자를 잠깐 보여주면 그만이다. 그런데 크로넨버그는 뼈를 고정시키는 철심 고정장치가 다리에 박혀있는 걸 천천히 흝어간다. 이미 기계는 사람의 육체를 침식해있고 계속해서 불편한 공존을 하는 상태다. [비디오드롬]에서 이미 텔레비전 안으로 들어갔으니 사실 더 넘어갈 영역이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어쨌든 크로넨버그는 그렇게 쇠를 인간의 몸에 집어넣는다. 어쩌면 이와 같은 이미지는 기계문명의 대표적 이미지를 새하얗고 이음새가 보이지 않게끔 처리한 애플의 아이폰 시리즈가 나오기 전이라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영화에서 쇠는 언제나 인간의 몸을 헤집고 들어가있다. 그것은 기계와 인간의 자연스러운 결합이 아니라 손실된 인체를 부자연스러운 금속으로 떼우거나 끼워넣은 불안정한 무엇이다. 그 결합은 언제나 통증을 상기시킨다. 실제로 인간이 쇠와 육체를 결합하는 것은 수술이 필요할만큼 신체가 훼손되었을 때 뿐이니까. 


그 쇳덩어리와의 결합이 하나의 프롤로그처럼 작동하며 제임스는 자신이 부딪힌 헬렌과 점점 가까워진다. 이상한 건 이 영화가 세계관을 납득시키는 그 태도이다. 제임스와 헬렌이 왜 이런 욕망을 갖게 되었는지, 이 욕망에 대해 어떤 고뇌를 하는지 전혀 신경쓰지 않으면서 그저 이 욕망에 빠져드는 것만을 천천히 보여줄 뿐이다.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이 욕망, 다시 한번 교통사고충돌을 경험하고 싶다는 이 욕망으로 제임스와 헬렌은 카섹스를 하고 이를 통해 제임스는 같은 욕망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 모임의 우두머리격인 번을 만나면서 제임스는 점점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는 구체적인 입구로 점점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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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성욕에서 출발한다. 그 성욕은 일부일처제의 도덕적 약속을 파기한, 보다 순수한 섹스의 욕망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임스와 캐서린이 그 욕망을 해소하는 과정이다. 만약 부부간의 섹스에 질렸다면 두 사람이 알아서 다른 상대와 불륜섹스를 즐기면 그만이다. 여기서 핵심은 두 사람의 불륜섹스가 아니라 그 불륜섹스를 서로 들려주며 흥분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흥분하는 지점은 자신의 배우자가 자신이 아닌 존재와 하는 섹스를 상상하는 그 지점이다. 


이것이 정말 관음의 욕망이라면 이 부부에게는 더 리얼한 해결방법이 있었다. 자신의 배우자가 다른 사람과 성관계를 하는 장면을 (합의 하에) 엿보면 되는 일이다. 그러나 이 부부는 굳이 그런 행위를 하지 않는다. 이 둘은 재력이나 인간관계가 충분한 것으로 보이는데도 상대방에게 자신의 불륜 상황을 들려주는 것으로만 성욕해소를 즐긴다. 직접 보고 듣는 대신 상대의 언어를 통해 가공된 세계를 듣는 것의 최대 목적은 상상 그 자체다. 이 부부는 상상을 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왜 리얼한 관음보다 상상을 더 원하고 실천하는 것일까. 내 배우자의 불륜을 간접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배우자의 불륜 대상이 직접 되기 위함이다. 


이 설정은 대단히 파격적으로 보이지만 이것은 정도의 문제이지 목적의 문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부부들은 코스튬이나 역할극을 통해서 이 '낯설어지기'를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제임스와 캐서린 부부는 이미 그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르렀고 이제 그런 것들을 초월해야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상기하게 되는 것은 육신 그 자체에 관한 유물론적인 집착이다. 가면을 쓰든 다른 옷을 입든 어떤 역할을 연기하든 자신에게 이미 낯익은 상대방은 더 이상 낯설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크로넨버그스러운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 욕망이 끝간데 없이 나아간다면, 이들의 육신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육신을 벗을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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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질문이 따라붙는다. 낯설어진 상대와 섹스하는 것이 이 영화 최대의 화두라면 그 욕망은 왜 자동차 사고라는 사건으로 전환되냐는 것이다. 굳이 차 사고를 내는 미친 짓을 할 필요없이, 그냥 안전하게 같은 성욕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서 섹스만 하면 되지 않을까? 자동차 충돌과 섹스의 운동이 비슷하기에 그럴지도 모른다. 이성애자들의 섹스는 성기의 결합 이후 육체가 계속 서로 충돌하는 행위이다. 절정에 가까워질 때 몸을 움직이는 속도는 빨라지고 충돌도 격해진다. 제임스의 남성성별을 기준으로 본다면 격렬한 운동 이후 강력한 충돌로 끝나는 섹스는 자동차 사고의 운동 과정과도 유사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과연 설명이 가능한가. 이미지가 유사하다고만 해서 과연 성질이 완전히 다른 운동이 유사한 쾌락을 추구하는 행위로 동치될 수 있을까. 한 쪽은 자신의 육체를 상대방과의 합의 하에 온전히 통제하는 행위이고 다른 한 쪽은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통제불능의 사건이다. 어떤 식으로 연결지으려 해도 섹스와 자동차 사고를 유사한 쾌락행위로 간주하는 것은 이것이 영화임을 알고 보는 감상자의 독단적 권리일 것이다. 관객은 제임스가 섹스 대신 자동차 사고를 즐기는지 확신할 수 없다. 다만 그렇게 보일 뿐이다. 


혹은 다른 가정을 할 수 있겠다. 제임스는 캐서린의 불륜 중계를 빌려 낯선 상황에서 낯선 사람이 되기, 즉 낯설어지기를 통해 계속 쾌락을 추구하고 있다. 아내의 불륜 상대가 된다는 것은 내가 아닌 다른 육신을 가진 존재로 변모하는 것이다. 제임스에게 쾌락의 조건이 상상을 통해서라도 다른 육신을 걸치는 것이라면, 그 육신의 범위를 금속으로 넓혔을 때 아예 다른 형태의 섹스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자동차의 몸체는 제임스의 새로운 육신이면서 성기 그 자체가 된다. 자동차 사고를 통해 제임스는 완전히 다른 몸을 아주 격하게 부딪히고, 사정하기 위해 그 누구보다 빠르게 충돌할 수 있다. (제임스가 탄 차가 헬렌의 차와 충돌했을 때 헬렌의 차는 헬렌의 옆좌석에 있던 남편을 사정하듯이 튕겨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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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넨버그의 [데드링거]를 보았을 때 제일 기이하면서도 토할 것 같은 장면이 있었다. 엘리엇은 호텔에서 창부를 불러서 섹스를 하려고 하는데 이 때 창부는 하필이면 쌍둥이 자매이다. 그는 쌍둥이 창부에게 특이한 주문을 한다. 한 쪽은 자신을 엘리엇으로, 다른 한 쪽은 자신을 베벌리로 불러주라고 한다. 쌍둥이는 단순히 닮은 몸을 가진 상태의 형제자매가 아니라 하나의 영혼에서 분열된 사람들이라는 가정을 따라간다면, 베벌리가 엘리엇과 한 여자와의 성관계를 공유하는 것은 주제의식에 부합한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베벌리는 자신이 엘리엇이기도 하면서 그 영혼이 서로 분열되면서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듯이 섹스를 하려고 한다. 즉 자신의 육체가 두 쌍둥이 자매에 의해 공유되면서 영혼 또한 분열될 수 있는 것처럼 구는 것이다. 이 장면이 왜 그렇게 역겨웠는지는 나 자신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근친상간보다 더 한 수준의 금기를 영혼의 단위에서 실험하는 것 같다고 할까.


[크래시]에서도 엇비슷한 장면이 등장한다. 제임스와 캐서린은 영화 중반쯤 서로 섹스를 하다가 기이한 대화를 시작한다. 캐서린은 계속 제임스와 번이 서로 섹스를 하는 상황을 이야기한다. 제임스는 딱히 동성애자가 아니다. 그리고 동성애에 대한 호기심이나 번에 대한 성욕도 이야기한 적이 없다. (번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캐서린은 마치 제임스가 번을 욕망하는 것처럼 상황을 꾸며내며 이야기한다. 왜? 만약 이전까지의 루틴을 따른다면 캐서린 본인이 번과 섹스를 하는 상황을 이야기했어야 한다. 그러면 제임스는 자신이 번이 되어 캐서린과 섹스를 하는 듯한 쾌락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캐서린은 누가 되어서 누구와 섹스를 하는 것인가? 


추상적인 가설을 하나 세워보게 된다. [데드링거]에서 베벌리가 엘리엇으로 호명받기를 주문하면서 두 쌍둥이 자매와 섹스를 하는 것이 쌍둥이의 개념에 대한 논리적 치환은 아닐까. 쌍둥이는 두개의 육체로 태어난 한 영혼이다. 여기서 불완전한 조건인 "두개의 육체"를 하나의 육체라는 완전한 조건으로 합친다면, 그 육체 안에서 영혼이 둘로 분열되어있는 것이 아닐까. 두개의 존재라는 조건은 육체 혹은 영혼의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혹은 그래야만 한다. 그것이 하나로 합일하고자 하는 욕망을 느낄 수 있으니까) [크래시]에서 캐서린은 왜 번과 제임스의 섹스를 상상하는 것인가. 이 장면은 캐서린의 욕망이 아니라 제임스의 욕망이 충족되는 상황이다. 제임스는 왜 번과 섹스를 하는 듯한 상상을 필요로 할까. 섹스는 자동차 사고와 같은 것이라면 자동차 사고는 섹스와 같은 것이다. 제임스는 번과 자동차 사고를 내고 싶은 것이다. 두 욕망이 상호 동질한 것이기에 지금 제임스는 자신과 번이 부딪히는 것을 섹스로 치환하고 그 욕망을 해소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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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설의 가설을 이어가다보니 영화 자체가 점점 미궁에 빠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쯤해서 영화에 대한 정리를 하기 위해 엔딩을 이야기하자면 영화는 번이 캐서린이 타고 있는 차를 뒤에서 들이받다가 번은 죽고 캐서린의 차는 전복된다. 이 상황을 자신의 차로 운전하며 목격하던 제임스는 전복된 차에서 간신히 기어나온 캐서린과 도로 아래 풀밭에서 섹스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아닌 대상과 섹스하는 상상을 간접경험하며 하던 섹스에서 섹스라는 행위만 차사고로 바뀐 것이다. 


영화는 카메라를 이 둘에서 점점 떨어트리며 막을 내린다. 내가 다시 품는 의문은, 왜 이 영화가 이렇게 뭔가 슬프고 애잔하냐는 것이다. 현대인의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계속해서 보기 때문일까. 차체라는 육신을 빌려서도, 죽음을 각오하고서도, 인간의 욕망은 채워지지 않는다. 질문이 끊이지 않지만 크로넨버그의 [크래시] 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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