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베크 시리즈 10 [테러리스트]

2023.12.13 09:39

thoma 조회 수:218

1. 느릿느릿 천천히 읽는다고 읽었으나 결국은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했습니다. 

[테러리스트]에서는 셰발과 발뢰, 작가들의 목소리가 이전 작품들에 비해 훨씬 직접적으로 들립니다. 

국가적인 큰 사건과 그보다는 작은 사건 두 건이 다뤄지고 있고 세 사건은 서로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당시 스웨덴 사회의 문제, 뭉뚱그려 말하자면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관료체제에 대한 염증을 이런 식으로 써도 문제 없었을까 싶은 부분도 있었습니다. 상당히 직설적으로 다룹니다.  

뭔가 작가들이 저질러 보고 싶은 일을 다 해 보는, 하고 싶은 이야기 다 해 보자는 의지가 느껴졌어요. 그러다 보니 조금 무리수를 둔다는 생각도 들었지만(국제적 테러리스트 은신처를 50줄 경찰간부 셋이?) 시리즈의 마지막이니 감안했습니다. 뒤에 역자 후기를 보니 발뢰가 이 소설 쓰던 중에 병이 깊었고 완전히 마무리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나 봅니다. 처음부터 계획했던 열 권 중 마지막 책이기도 하지만 발뢰 생전의 마지막 책이라는 것을 예감하고 썼기 때문에 작심하고 맘껏 쓴 면이 있다는 것이었어요. 

그런저런 면 때문에 시리즈 앞에 것보다 이번 소설에서 지금과는 달랐던 '그 때 그 시절'이라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소설의 배경이 60년대와 70년대라는 것을 이번 작품에서 가장 확연히 느낀 거 같아요. 침대 머리맡에 마오쩌둥의 포스터를 붙이는 어떤 인물이나 마지막 문장을 모 사상가의 인장을 찍으며 마무리한다거나 하는 것을 보면 작가들의 사상적 배경도 대놓고 드러내고요. 

 

2. 그나저나 재미있습니다. 이 시리즈가 왜 재미있을까 떠오르는 대로 써 봅니다. 

주인공 마르틴 베크 자체는 재미와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유머가 없고 스스로도 알고 있는데, 말수 적고 지루한 사람이지요. 이 시리즈가 대체로 분위기가 느릿느릿한데 주인공이 나오는 장면은 특히 시간이 느리게 가는 느낌입니다. 소설의 재미면에서 지루하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시간이 느리게 가는 기분인데 인물들은 움직이고 있고 흥미로우니까요. 소설 속의 시간이 느릿하고 차분하게 가는 느낌이 들어요. 베크가 있는 자리에서 육탄전이 벌어지고 총알이 오가는 상황임에도 분위기가 침착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마르틴 베크의 특징은 시간을 늘이는 능력을 가진 자입니다.(또는 소란을 잠재우는 자? 또는 주변 온도를 2도쯤 낮추는 자?)

 

문제와 문제 해결자가 규모 면에서 서로 알맞고, 저의 취향에 잘 맞는다는 점도 생각해 봤습니다. 경찰, 느와르, 액션 소설 중에는 문제가 너무 거대하거나 해결자가 너무 능력자이거나 한 소설들이 많잖아요. 그래서 용두사미가 되는 소설도 있고요. 베크 때와는 시대가 달라진 것이 큰 이유이긴 하지만요. 어쨌든 그런 소설들은 읽고 나면 허무할 때가 많지요. 이 시리즈는 단연 돋보이는 것이 적당한 크기로 할 얘기들을 잘 짜넣었다는 점이란 생각이 듭니다. 겉과 속이 안 맞아서 덜거덕거리는, 그런 게 안 느껴진다 할까. 다만 이번 마지막 소설은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규모가 너무 커서 어울리지 않는 대목도 있었지만 전체 시리즈를 볼 때 어떤 다른 시리즈 보다 저에게는 매 작품이 알차게 느껴졌습니다. 


베크 뿐만 아니라 다른 인물들도 매력적입니다. 군발드 얘기만 조금 하자면, [테러리스트]에서는 시리즈 초반에 비해 갈수록 점점 존재감을 키우던 군발드가 거의 주역 역할을 합니다. 거구에 몸쓰는 일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데요, 자세히 보니 머리쓰는 일도 너무나 똑 부러집니다. 말이 걸러지지 않고 거칠고 호오 표현이 노골적이라 적은 많지만요. 맞춤 양복과 이태리제 구두와 실크 잠옷을 선호하며 퇴근하면 자신이 경찰임을 잊어버리는 이 경찰은 콜베리를 이어 마르틴 베크와 좋은 짝이 될 전망이 있었으나 소설은 영영 끝이 나고...


쓰다 보니 이 시리즈가 더욱 소중합니다. 믿을 수 있는 노선의 주제. 호감가는 중심 인물들. 억지스러운 심각함과 거창함이 없으면서 촘촘하게 들어가 있는 사회 비판적인 이야기. 게다가 무뚝뚝한 인물들 사이의 대화는 은근 유머러스하고요. 어디서 이런 시리즈를 다시 볼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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