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틀 로얄>의 초반부

2021.05.07 19:34

Sonny 조회 수:683



어렸을 때 본 <배틀로얄>을 전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반 친구들을 서로 죽여야 하는 끔찍한 이야기라고. 경쟁으로 내몰리는 10대들의 세계를 과장해서 비유한 이야기이고 그 끔찍한 상상은 우리 내부에 심어져있는 질투와 승부욕의 한 단면이라고. 다시 본 <배틀로얄>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습니다. 제가 이 전에 봤던 것은 부분에 불과했습니다. 그 때는 <배틀로얄>을 이해하는데 딱 청소년으로서의 입장밖에 없었으니까요. 다시 본 <배틀로얄>을 저는 이제 성인의 시야로 바라봅니다. 이 영화는 청소년들간의 경쟁만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경쟁을 부추긴 어른과 사회에 대한 이야기니까요. 같은 반 친구들이 죽고 죽이는 이야기는 이 영화의 진면목을 숨기기 위한 유흥에 불과합니다.


<배틀로얄>은 어른이 청소년에게 공격당할 때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즉, 기타노 선생이 자기 반의 학생에게 허벅지에 칼침을 맞을 때부터가 이 영화의 서막입니다. 정말로 이것이 아이들끼리의 이야기라면 굳이 기타노 선생이 돌아올 이유가 없습니다. 아이들이 강제로 배틀로얄 게임에 참가되었을 때 기타노 선생은 배틀로얄 관리자로 되돌아옵니다. 그는 배틀 로얄이 뭔지도 몰라서 우왕좌왕하는 아이들 중 한명을, 설명에 집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칼을 이마에 던져 죽여버립니다. 이것이 이 영화 내의 최초의 살인입니다. 같은 반 학생이 급우를 죽인 게 아닙니다. 선생이 학생을, 사회가 개인을, 법이 인간을 죽여버린 것이 폭력의 시작입니다. 얼핏 보면 학생들간의 싸움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단지 표면이고 사실은 학생들끼리 "죽이게끔" 해서 어른이 청소년을 죽여버리는 이야기입니다. 배틀 로얄이 경쟁을 은유하는 시합이라면, 참가자들의 온전한 경쟁을 보장해야하는 관리자가 왜 대뜸 자기 마음에 안든다는 이유로 참가자들을 죽여버리는 것일까요. 배틀 로얄은 사실 경쟁의 탈을 쓴 어른의 살육극이기 때문입니다. 경쟁을 하든말든 그건 상관이 없다. 이 영화에서 경쟁은 어떤 의미도 갖지 않습니다. 딱 "한명만" 살아남는 것은 경쟁을 거치고 살아남은 자의 포상 같은 게 아니라 한놈은 봐준다는 어른의 아량입니다. 한 명은 살려줄게, 그러니까 열심히들 해봐. 이 규칙 자체가 이미 이죽거리면서 말하는 어른의 지독한 폭력입니다. 이 의미를 어렸을 때는 몰랐습니다.


<배틀 로얄>의 진짜 공포는 어른이 소년소녀를 죽여버린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설정, 한 학급에서 서로 다 죽이게 해서 한명의 생존자만 뽑는다는 배틀 로얄 법은 어떤 합리를 끌어와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법은 오로지 창작자의 의도만 가지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청소년들을 다 죽여버리고 싶은 겁니다. 누가 그러냐면, 바로 어른입니다. 감히 선생을 칼로 찌르고, 수업을 할려고 하는데 무시하고, 뭘 설명하는데 자기들끼리 시시덕거리고, 어른한테 대드는 청소년들을 싸그리 다 죽여버리고 싶은 겁니다. <배틀 로얄>은 청소년의 절망에 관한 영화일까요. 청소년을 절망시킬 정도로 어른들이 화가 났고 아예 군대와 사회와 법과 폭력을 다 끌고 와서 아이들을 궁지에 몰아넣습니다. 다 큰 어른이 고등학생한테 이렇게 온힘을 다해서 화를 내는 걸 믿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벌레가 짜증난다고 화염방사기를 쏘지 않고 옆집 꼬마가 짜증난다고 야구배트를 들고 후려칠 생각을 차마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한 사회의 어른이, 사회 전체가, 청소년들이 글러먹었다면서 쓸 수 있는 모든 힘을 다 써서 아이들을 죽여버릴려고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어른이 저렇게까지.


어렸을 때 <배틀 로얄>의 공포를 몰랐던 것은 사회의 억압을 당연히 여겼던 때라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어른을 화나게 하면 안되고, 우리는 약하니까 어쨌든 사회에서 시키는대로 해야한다는 의무감이 강했습니다. 이제는 눈에 보입니다. 말도 안되는 부조리로 일단 학생들을 몰아넣고 말 안들으면 다짜고짜 죽여버리는 그 어른의 폭력이. 이 영화는 청소년을 약자로 생각하고, 청소년을 어떻게 하면 사회적 협력자로 삼아 잘 지낼 수 있을지 고민해볼만큼 나이가 들어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영화일 것입니다. 힘이 있는 자는 자신의 힘을 두려워하기 마련이고 약자들에게 그 힘을 쓰고 싶어도 차마 쓸 수 없어서 고뇌하기 마련입니다. <배틀 로얄>은 그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측은지심을 완전히 버리는데 성공했습니다.


기타노 선생을 기타노 다케시가 연기하면서 효과가 생깁니다. 어른의 폭력을 굳이 화난 표정으로 딱히 설득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통사고 이후 가끔씩 움찔하는 얼굴 근육,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 그런 배우가 버럭 화를 내며 청소년을 죽여버리는 그 갑작스러운 폭력이 필요했기에 선생은 기타노 선생이 되었다. 저 어른은 그래도 그러지 않을 거라는, 어찌보면 어른으로서 아무 것도 못해서 불쌍하다는 그 인상을 똑같은 얼굴로 일거에 뒤집을 수 있는 배우가 바로 기타노 다케시입니다. 그의 그 흉악함이 <배틀 로얄>의 주제의식 그 자체입니다. 이 영화는 어떤 설명도 다 집어치우고 곧바로 폭력의 감각만을 리얼하게 발휘한 뒤 환상적인 게임으로 이끌고 갑니다. 이 초반부를 어찌저찌 납득하면서 아이들의 살육쇼를 보고 있다면 이미 그 자체로 <배틀 로얄>의 어른들이 저지르는 폭력에 동조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영화는 누가 누구를 보는 영화일까요. 학생이 학생을? 학생이 교사를? 이 영화의 진정한 시선은 교사가 학생을 바라보는데서 시작합니다. 맨 처음 기타노가 칼에 찔렸을 때 카메라는 학생의 시선으로 기타노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시선은 완전한 기타노의 것이 됩니다. 카메라는 내내 겁에 질린 아이들을 교실 앞쪽에 선 기타노와 군인들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렇게 시야가 종속당한 채로 영화는 진행됩니다. 아이들끼리 아무리 서로 응시하고 죽일 것처럼 노려봐도, 그 모든 아이들을 다 바라보는 전지적 시점은 기타노의 것입니다. 겁에 질린 아이들을 그대로 카메라에 담고서도 모자라 그 중 한명을 죽여버리고 아예 패닉에 빠진 아이들 전체를 영화는 계속 주시합니다. 이 영화가 정말로 잔학한 부분은 폭력의 수위가 문제가 아니라 어른의 폭력을 게임으로 바라보는 어른의 시선이다. 아이들이 그렇게 약하다는 걸 알면서도 모든 힘을 다 가진 존재로서 그걸 태연하게 보고 있습니다. 이 압도적인 시선의 점유를 느꼈을 때 배틀 로얄은 진짜로 시작된다.


아이들은 기타노와 세상이 미쳤다고 생각하지조차 못합니다. 이 상황을 이해하지도 못한 채 그저 기타노를 떨면서 바라보고 그런 아이들을 기타노는 귀찮다는 듯이 바라봅니다. 아이들을 죽여버릴 준비가 끝난 교사가 아이들을 서로 죽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배틀 로얄>은 제일 지독한 학교 폭력을 현실적 감각을 입혀 재현한다는 점에서 끔찍합니다. 폭력은 누가 죽고 다치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방향성의 문제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요. 픽션에서 일진을 묘사할 때, 일진들이 제일 약한 아이들을 서로 싸움붙이고 그걸 웃으며 관람하는 묘사가 나옵니다. 그 때의 폭력이란 누굴 때리는 게 아니라 치고 박게 싸우면서 자신은 그걸 안전하게 바라보는 그 시야의 완벽한 지배성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일진이나 할 법한 짓을 교사가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국가권력을 등에 업고서. 온 국가가 나서서 아이들을 서로 죽이게 하고 그걸 관람합니다. 제정신이 아닌 영화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런 설정이 얼마나 미쳤는지 의식하면서 찍었습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6545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5084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4408
115830 대통령 방미 성과가 좋네요. [22] Lunagazer 2021.05.22 1427
115829 [넷플릭스바낭] 잭 스나이더 각본, 촬영, 감독의 '아미 오브 더 데드'를 봤습니다 [24] 로이배티 2021.05.22 718
115828 이 무시무시한 결정을 어떻게 해야 하나 [4] 가끔영화 2021.05.22 424
115827 캔버스, 도박중독 [2] 여은성 2021.05.22 451
115826 한강 대학생 실종-사망 사건 [12] 메피스토 2021.05.21 1224
115825 [EBS2 클래스e] 이상욱의 <가장 인간적인 과학철학 이야기> underground 2021.05.21 344
115824 바낭) 진중권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 [27] forritz 2021.05.21 1182
115823 별 거 아닌 축구 잡담 [16] daviddain 2021.05.21 403
115822 [게임바낭] 공포 게임 하나 사시죠. '환원-디보션'이라고 좋은 물건이... [10] 로이배티 2021.05.21 807
115821 [EBS1 특집공연] 라 스칼라 갈라 콘서트 [2] underground 2021.05.21 352
115820 프렌즈 - 리유니온 트레일러 [9] 예상수 2021.05.21 601
115819 내년이면 인터넷익스플로러가 사라집니다 [11] McGuffin 2021.05.21 946
115818 민망한 유튜브 광고 [5] 가끔영화 2021.05.21 743
115817 중권사마 같은 소리하고 있네 [14] 사팍 2021.05.21 1007
115816 새벽 잡담... [1] 여은성 2021.05.21 306
115815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 (2008) [6] catgotmy 2021.05.21 494
115814 짐 카비젤 정말 한심한 인간이었네요 ㅋ [14] Lunagazer 2021.05.20 1820
115813 표범 인간 [1] daviddain 2021.05.20 340
115812 [영화바낭] 역시 쌩뚱맞게, 김기덕의 '사마리아'를 봤습니다 [22] 로이배티 2021.05.20 1689
115811 학교 선생님 [8] 메피스토 2021.05.20 666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