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워 킬링 문 리뷰 둘

2023.11.16 17:39

daviddain 조회 수:247

80대에 접어든 노장이 ‘플라워 킬링 문’을 선택한 동기는 우선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미국의 역사를 알리기 위해서일 터다. 잊혀진 것을 재현하고 투명 인간들을 가시화하는 작업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처음부터 관객이 범인과 동기, 과정을 알고 지켜보는 이 영화는 누가, 왜, 언제 죄를 범했나를 묻는 스릴러가 아니다. 보다 긴요한 의문은 “어떻게?”에 가깝다. 어니스트는 몰리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동시에 밤이 되면 오세이지족을 린치하고 처가 식구를 살해하는 일에 가담한다. 그는 삼촌의 권위에 눈멀어 제가 하는 일의 의미를 몰랐을까? 아니면 바보이거나 분열증을 앓았을까? ‘플라워 킬링 문’은 현대인의 시각에서 설명하기 힘든 어니스트의 모순된 정신 상태가 개인의 특수한 병리 현상이 아니라 백인 우월주의의 핵심임을 보여준다. 이 기괴한 의식에 이름을 붙인다면 ‘미필적 고의에 의한 무지’ 정도가 아닐까. 한 사람을 사랑하는 동시에 그의 안위를 위협하는 모순이 가능한 것은 상대를 나와 동등한 권리와 필요를 가진 인간으로 인지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인간은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여기는 다른 존재도 사랑할 수 있다. 혹은 사랑한다고 믿는다. 극중 백인들은 오세이지족과 함께 식사하고 친교를 맺지만 그들의 목숨이 백인의 그것보다 무게가 덜하다는 전제를 틈나는 대로 피력한다. 살인만은 금기라던 청부업자도 대상이 원주민이라는 말에 입장을 바꾸고, 오세이지족 아내가 낳은 의붓자식들이 죽으면 자신에게 상속권이 오냐고 공공연히 법률가에게 상담한다. 윌리엄 헤일의 대사가 잘 요약하듯 그들은 오세이지족의 부를 백인에게 넘기는 것은 자연적 질서의 회복이고 적자생존 원칙의 실현이라고 내심 믿는다. ‘플라워 킬링 문’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24명 이상을 희생시킨 살인 음모가 아니라 그것을 묵과한 ‘공모’의 공기다.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 인종주의는 현대에도 여전히 미국의 거대한 그늘이며 사회적 약점이다. 그리고 이 불합리한 집단적 의식을 명제화하지 않고 복잡한 그대로 우리에게 체험시킬 수 있는 예술은 영화다. ‘플라워 킬링 문’의 결말부는 매우 독특하다. 스코세이지는 어니스트와 몰리의 이야기를 마무리한 다음 갑자기 관객과 영화 사이 제4의 벽을 무너뜨리고 라디오 라이브 쇼 무대로 이동한다. 전원 백인 성우들이 재연하는 오세이지족 살인 사건은, 그제껏 3시간 넘게 우리가 지켜본 이야기와 내용은 동일하나 관점은 판이하다. 범죄 실화 엔터테인먼트가 들려주는 역사의 비극은 FBI의 영웅적 활극이고 납작한 권선징악 스토리에 불과하다. 이 대비는 ‘플라워 킬링 문’이 추체험의 예술인 시네마여야만 했던 이유에 대한 스코세이지의 답변으로 보인다. 거기 그치지 않고 스코세이지는 성우 중 한 명으로 에필로그에 직접 카메오 출연한다. “하지만 나 역시 백인 스토리텔러일 뿐.”이라고 한계를 인정하듯.



집단 기억으로서의 역사에 대한 ‘플라워 킬링 문’의 또 다른 기여가 있다면 박해받는 희생자의 모습으로 각인된 아메리카 원주민이 백인의 고용주로서 부를 향유하고 미국 자본주의 안에서 공동체의 풍요로운 전통을 지켜가는 이미지를 스크린에 새겨넣었다는 점이다. 스코세이지와 미술감독 잭 피스크, 의상감독 재클린 웨스트는, 본래 뛰어난 미감을 지닌 부족으로 유명했고 획득한 부에 힘입어 초상화와 사진, 홈 무비까지 남긴 오세이지족의 생활상을 재현하는 데에 2억 달러 예산의 큰 부분과 노력을 쏟았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목은 어떤 현실 장면보다 담담하고 고요하게 연출된 오세이지족의 죽음에 관한 심상들이다. 예술가들은 각기 다른 말년의 양식에 도달한다. ‘사일런스’부터 ‘플라워 킬링 문’까지 이어지는 후기 대작 시대는, 평생 명장으로 공인받으면서도 독소적 남성성과 폭력을 매혹적으로 스펙터클화한다는 비판을 받았던 스코세이지의 원숙한 응답이 되기에 손색이 없다.


https://magazine.weverse.io/article/view?lang=ko&colca=2&artist=&searchword=&num=936


<플라워 킬링 문>에서 스코세이지가 증언하는 대상은 20세기 초반 서부에서 연쇄살인의 표적이 되었던 오세이지족 원주민이다. 몰리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스코세이지는 살인에 의해 희생되었지만 수사 기록에 등재되지 않은 원주민들의 얼굴과 이름을 일일이 스크린에 적시한다. 주지하다시피, 스코세이지는 동명의 논픽션 원작을 각색하면서 FBI 요원을 주인공으로 삼은 원작의 선택을 그대로 따르는 대신, 가해자인 어니스트와 헤일의 시점을 택한다. 외부에서 사건을 해결하는 구조가 아니라 내부로부터 벌어진 욕망과 균열을 탐색하는 서사를 선택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지평선 멀리서 기차가 도착하는 존 포드의 풍경으로부터 출발해 부부의 풍경이 가혹한 파국으로 치닫는 더글러스 서크풍의 결혼 실내극에 도착한다.

후반부의 한 장면, 헤일이 소유한 농장이 화염에 휩싸인다. 어니스트와 헤일은 서로 다른 자리에서 불타는 대지를 바라본다. 그들은 뜨거운 불 속에 내던져졌고, 불꽃을 바라보는 시선을 공유하고 있다. 카메라는 구체적인 형체를 일그러뜨린 망원렌즈의 시선으로 농장이 불타는 모습을 지켜본다. 불타고 있는 곳이 어느 쪽인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이 서 있는 좌표가 어디인지 모호해진다. 어니스트는 유리창을 통해 그 광경을 본다. 투명한 유리창은 그가 서 있는 곳이 안전한 내부인지 불타는 바깥인지 혼란스럽게 보여준다. 예정된 자리에서 정해진 운명을 마주하는 이 장면은 그들이 갖는 개별적 의지와 책임의 차이 또한 흐트러트린다. 몰리의 동생 부부를 죽이기 위해 의뢰한 폭탄 테러는 어니스트가 머무는 집의 창문마저 깨뜨리고, 헤일이 몰리의 인슐린에 섞어 넣으라고 요구한 독극물은 어니스트의 몸 안에도 투여된다. 그들은 같은 불꽃 속에 있다. 해결되지 않은 죄의 전이와 파국적 결과에 대한 공통의 책임을 시각적으로 캐묻는 이 장면은 <플라워 킬링 문>을 각인하는 대표적인 장면으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이 영화의 후반부를 지배하는 건 헤일과 어니스트의 행적을 좇는 국가기구(연방수사국)의 성실하고 명쾌한 수사와 법적 판단, 그리고 가족을 위해 또 다른 혈연관계의 가족을 저버리는 어니스트 개인의 심리 상태다. 스코세이지는 비극적인 역사의 기원과 한 부부의 복잡한 관계망을 교차하면서 이야기의 난점을 외부 집단의 개입과 가족주의에 호소하는 진부한 방식으로 해결한다. 어니스트가 헤일의 죄를 증언하는 것은 딸의 죽음이라는 손쉬운 전환점으로 설명된다. 이 과정에서 지워지는 것은 오세이지족 인디언의 얼굴과 목소리이다. 스콜세지가 어니스트의 비극을 강화하고 그의 마지막 행위로 헤일을 향한 고발을 배치할 때, 원주민에 대한 집단적 연쇄살인의 표상과 구제는 영화 바깥으로 사라진다.

스코세이지는 그동안 구축해온 통제 불가능한 남성 주체와 인디언 여성의 결합을 통해 원주민에게 가한 백인 남성 폭력의 기원을 고발하고 있지만, 목소리 없이 죽어간 인디언들을 서술자의 자리로 완전히 가져오진 않는다. 둘로 나뉜 영화의 결말은 이를 압축적으로 예시한다. 백인들이 즐기는 라디오 연극 장면에서 이 비극적 사건을 전달하고 경청하는 자들의 얼굴은 선명하게 드러나지만, 도입부와 대응을 이루는 오세이지족의 제의는 어디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시공간에서 누구의 얼굴도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형태로 재현된다. 영화의 결말에서 스크린에 새겨지는 것은 백인의 얼굴과 목소리이고, 사라진 것은 인디언들의 얼굴과 이름이다. 물론 스코세이지는 고립된 남성의 병적 증세를 탐색하는 작가이고, 이 영화의 초점은 그들의 행적에 대한 비판과 고발에 맺혀 있다. 같은 의미에서 <플라워 킬링 문>은 한쪽으로 치우쳐진 현실의 역학을 비판적으로 반영할 뿐, 가능한 현실을 영화 안에 창조하는 데 무기력한 영화다. 스코세이지는 희생된 인디언들의 군무를 하늘 위에서 바라보는 소극적인 숏을 덧붙이지만, 인디언의 승리를 보여주거나(존 포드의 <아파치 요새>) 죽은 인디언들이 팔레스타인의 폐허에서 부활하는(고다르의 <아워 뮤직>) 픽션을 구획하는 데 이르지 못한다. 현실에서 사라진 인디언들의 얼굴은 스크린에서도 기록되지 않는다. 패배한 현실의 결과를 반복하는 <플라워 킬링 문>에서 스코세이지의 시선은 선명하고 유려하지만, 거장답지 않게 어딘가 뭉뚝하다.

http://m.cine21.com/news/view/?mag_id=1037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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