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RED', '데블 Devil' 잡담.

2010.11.05 01:13

mithrandir 조회 수:2651



0.
어랏, 제목을 나열해놓고보니 "레드 데블"이 되어버리는군요.
최근 바르다 여사님 영화를 즐겁게 보면서도
은근히 상업영화가 목마르던 차에, 반가웠던 두 영화.

왜 그런 영화들 있죠.
분명 "대단한 걸작, 시대의 영화, 끝내주게 근사한 연출"중 어느 쪽도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루하진 않은데, 그냥 한 번 보면 싹 잊어버릴 영화"라고 하기엔
어딘가 아깝고, 어딘가 기억에 남고, 어딘가 뿌듯한 그런 영화들.
그러니까 A+는 커녕 A-도 주기 아까운데,
그렇다고 B+를 주기엔 뭔가 더 좋은 거 같은 영화들.

어제 오늘 연달아 본 '레드'와 '데블'이 그런 영화들이었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제가 최근들어 "상업영화가 고파서" 더 후하게 본 걸 수도 있겠지만,
제가 보기엔 즐겁게 볼 수 있는 작품들이었고,
"어떤 수준"에 도달한 작품들은 아닐지라도 "그냥 인스턴트로 소비하고 휴지통에 던지기"엔 너무 맛있는 영화들.



1.
'레드'는 제가 좋아하는 종류의 영화였습니다.
귀여운 할아버지들과 근사한 여사님이 등장하는 영화.

귀여운 할머니들과 근사한 노신사가 등장하는 영화도 싫지는 않아요.
하지만 "근사한 노신사"는 어딘가 꼰대 마초들을 연상시키는 데가 있고,
"귀여운 할머니들"은 어쩐지 "남자는 늙어도 멋지지만 여자는 늙으면 끝이야"라는 이상한 선입관을 떠올리게 하는 찝찝함이 있죠.
(요즘 세상은, 슬프게도, "여자나 남자나 늙으면 끝이야"라고 주장하는 요상한 세상이 되었지만.)

근데 브루스 윌리스를 "귀여운 할아버지" 범주에 넣으려니 고민이 되는군요.
요 몇년간 브루스 윌리스가 나오는 영화마다 "난 늙었어"라고 외치고
대머리에 자글자글한 눈가 주름이 클로즈업되고 있어도,
브루스 윌리스는 그냥 "아저씨"지 아무리 봐도 "할아버지"로 인식되지는 않습니다.
거꾸로 리처드 드레퓌스나 모건 프리먼 같은 배우들은 젊을때부터 어딘가 노인같아 보였지만.
(브루스 윌리스 이야기 나온 김에 상관없는 불만 하나.
대체 브루스 윌리스 어디가 호머 심슨을 닮았다는 겁니까?
단지 대머리라서? 그런식으로 따지면 전두환도 호머 심슨이겠다!!!)

날것 느낌의 격투씬이나 만화같은 슬로우모션, 탄약을 무지막지하게 써대는 신나는 화력싸움등 다양한 볼거리를 던져줍니다.
무엇보다 캐릭터들이 매력있고 공감가죠. 어딘가 나사가 빠진 듯, 동네 아저씨 아줌마 같으면서도
그와 동시에 말도 안되게 프로페셔널하고 섹시함과 음흉함을 풍기는 등장인물들.
메리 루이즈 파커는 그 와중에 혼자 낀 "일반인"인 셈이지만
"주인공 여자친구"치고는 매력있고 개성있고 걸리적거리지 않는 좋은 배역입니다.
(허긴 요새 헐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 여자친구나 주인공 남자친구들이 쓸모없는 캐릭터인 경우는 오히려 드물었죠.
그동네 각본 쓰는 분들도 바보는 아닐테니까요.)

브루스 윌리스 잘 싸우고, 칼 어번은 프렌즈 시절 매트 르블랑 닮았는데 역시 잘 싸우고,
존 말코비치는 A특공대의 머독을 버전업시킨 거 같은 유머를 잔뜩 뿜어대는 가운데 가끔 멋있고,
헬렌 미렌은 에일리언2의 리플리 부럽지 않게 기관총을 원없이 갈겨대고…
어네스트 보그나인 아저씨는 완전 까메오.

리처드 드레퓌스가 찌질돋는 역할로 나옵니다. 의외로 큰 비중.
근데 그 찌질을 몸사리지 않고 제대로 찌질스럽게 연기하더군요. 역시 명배우.
젊을 때 약물 후유증으로 고생한다는 소문도 있던데 피라냐3D에 이어서 상업영화 조연으로 자꾸 나와주시니, 
본인은 생활비 문제로 자주 나오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왕년의 팬 입장으로서는 반가울 뿐입니다.
(차마 지금도 팬이라는 거짓말을 못하겠습니다. -_-;)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배우는 브라이언 콕스.
아, 이 아저씨 좋아서 미치는 줄 알았어요.
중반에 가슴에 상처 보여줄 때나(이때 관객들 폭소)
후반에 나 xxx 정말 죽이고 싶었는데 아이 싱나~!를 외칠때는 정말…
생각해보니 이 영화의 브라이언 콕스와 헬렌 미렌은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의 후일담같은 거였으려나요.
극중에서 보면 오랫만에 만났다는 거 같은데, 젊을때 헤어진 이후로 처음 만났다기엔 또 너무 태연하고.
수십년동안 연애하다 총질하다를 반복했던 건가 싶더군요.
아님 둘 다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서로를 몰래 스토킹했을지도 모르죠.
각자 집에 감시 카메라를 잔뜩 심어놓고 밤에 외로울 때는… 음, 내 상상력은 왜 이렇게 천박한 거지.

다시 영화 얘기. 다 좋았는데 모건 프리먼은 겉돌았습니다.
다시 등장해서 위기에 처하는 부분은 완전히 사족같았어요. 왜 그래야하는지도 모르겠고, 
(거꾸로 후반에 헬렌 미렌이 위기에 처한 장면은 별 긴장감없이 어설픈 설정인데도
그 다음 장면 때문에 흐뭇하게 볼 수 있었는데 말이죠.)
별 쓸모도 없는 "여기서 감동 한 번"을 위한 의무로 넣은 억지 설정.
아마 등장인물들이 너무 해피하면 긴장감이 떨어질까봐 그랬나본데,
그럴거면 그냥 초반에 퇴장한 채로 놔둘 것이지.
게다가 그 간암 말기라는 설정은 뭐랍니까?
"하하, 얘는 간암이니까 죽어도 돼"라는 건가? 
아무리 웃고 즐기는 영화지만 인물한테 설정을 줄 때는 쪼끔만 더 고민을 하란 말이야!




2.
레드에 대해 내용없이 길기만 한 만연체의 잡담을 써놓고 생각해보니 
저는 어서 샤워를 하고 내일 아침 출근(?)을 준비해야 하는군요.
그래서 데블은 짧게 요점만. 

데블 재미있습니다.
엘레베이터에 5명을 던져놓고 그 중 하나가 악마라서 차례로 죽인다는 설정인데,
과연 이걸 가지고 러닝타임을 어떻게 채우려나 궁금했거든요.
시나리오 잘 썼어요. 80분이지만 조금 더 길었어도 될 거 같고.
중간중간 형사가 조사하는 부분들이 쓸데없어보이기도 했고
카톨릭적 세계관을 너무 당연하게 직접적으로 깔고 가는 게 좀 어색하기도 했지만,
(대사로도 언급되지만 "악마가 있다면 하느님도 있다"는 셈이죠.
어차피 허구라고는 하지만 무신론자나 냉담론자를 배려해주는 영화는 아니에요.) 
어쨌든 80분 내내 지루함 없이 인물 하나하나가 살아있어서 좋았습니다.

이런 종류 영화에서 종종 느끼는 "쟤는 왜 빨리 안죽어?"라거나
거꾸로 "쟤가 대체 왜 죽어야 하는 거지? 아무리 호러지만 사람 목숨이 장난이야?"
라는 종류의 짜증도 거의 없는 편이었구요.
상관없는 희생자도 있고 용서나 속죄도 있고…
슬래셔라기보다는 호러(에 가까운 스릴러)+교훈극에 가까운데,
최근 고문 포르노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좀 안맞을 수도 있겠네요.
슬래셔를 좋아하신다면 약간 지루할지도 모르고요.

결정적인 의문 하나가 남기는 했습니다.
쟤들이 나쁜 애들이라는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악마가 친히 나타나 데리고 놀다 죽일 정도로 나쁜 애들인가?
희생자들을 정말 죽어도 싼 캐릭터로 했더라면 감정이입하기가 힘들었을테고,
악마를 조금 더 장난스럽고 무시무시한 존재로 만들었으면 좋았을 거 같습니다.
지금 악마는 그냥 "아, 난 설정상 악마에요. 나머지는 여러분들이 알아서 상상하세요"라고 던져진 거 같아서…
근데 어떻게 보면 요새 너무 쎈 살인마들이 범람하는 와중에, 그런 소박한(?) 악마가 반갑기도 하군요.




3.
짧게 쓴다고 해놓고 또 쓸데없이 길게 썼네.

마지막으로 극장 불만 하나.
전에도 했던 말이지만, cgv가 그런 것처럼 시너스 극장에서도 이제
영화 예고편들을 tv버전의 짧은 "테레비 광고"버전으로만 틀어줍니다.
다행히 화면비도 맞고 깨끗하게 나오기는 하지만,
예전처럼 영화 보기 전에 예고편 보는 재미는 없군요.
디지털 영화를 상영할 때는 사정이 좀 다르려나요.
제 즐거움을 자꾸만 빼앗기는 거 같아 짜증이 치밉니다. 툴툴툴.





하여간 한 줄 요약.
레드랑 데블 재미있어요.
여러분들 굿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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