낄낄낄

2010.06.11 23:29

차가운 달 조회 수:3959




퇴근길에 친구랑 술을 마셨어요.
사람들이 많은 거리를 걸으며 어디를 갈까 하다가 길가에 있는 어느 치킨집을 봤죠.
치킨에 생맥주나 한잔 할까?
그래, 그거 좋지.
그러고 안으로 발길을 옮기다 말고 저는 걸음을 멈췄어요.
치킨주막이라니, 아무래도 술집 이름이 이상한 거예요.
이상해, 다른 데로 가자. 난 여자들이 많은 곳이 좋더라.
그리고 다시 거리를 걷는데 친구가 그러더군요.
안에 예쁜 여자들 많던데?
정말?
응.
그래서 다시 그곳으로 돌아갔죠.
창가 자리에 앉아 잠깐 주위를 둘러보는데 건너 테이블에 아줌마 네 명이 앉아서 수다를 떨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 거예요.
야, 넌 대체 뭘 본 거야?
친구도 그쪽을 힐끔 본 다음 혼자서 낄낄 웃더라구요.

뭐, 이왕 들어온 거, 프라이드 치킨이랑 생맥주 두 잔을 시켰죠.
얌전히 앉아서 치킨을 기다리고 있는데
친구가 고갯짓으로 제 뒤쪽 벽을 가리키는 거예요.
그래서 뒤를 돌아보니 광고 문구가 붙어 있더라구요?
저희 치킨이 색깔이 검은 것은 한방 약재를 사용해서 어쩌고저쩌고...
한방 치킨? 뭐야 이건?
몰라, 몸에 좋은 거겠지.
거 봐, 내가 이상하다고 했지?
친구는 팔짱을 낀 채 또 낄낄 웃기만 했어요.

기포가 보글보글 올라오는 생맥주 두 잔이 먼저 왔어요.
날도 덥고 갈증도 나고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켰죠.
생각보다 맥주는 맛있더라구요.
맥주는 맛있네?
응, 맛있네.
그래, 맥주만 맛있으면 됐지 뭐.

잠시 후 치킨이 왔어요.
정말 색깔이 검더라구요.
기름이 살짝 흐르면서 튀김옷이 바삭바삭한 그런 치킨을 기대했는데...
그래도 손으로 쥐고 한 입 먹으니 뭐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어요.
정말 한약 냄새가 난다.
그래? 난 모르겠는데.
그리고 우리는 말없이 치킨을 좀 먹었어요.

야, 우리 그냥 마시면 심심하니까 재미있는 얘기, 좋았던 얘기나 하나씩 하면서 마실까?
제가 말했죠.
그래, 그러자?
좋아, 마셔.
그리고 우리는 잔을 부딪힌 다음 시원한 맥주를 한 모금 마셨죠.

"요즘 버스 타고 집에 갈 때마다 나도 모르게 자꾸 졸게 된다?"
제가 말했죠.
"그래?"
"뭐, 술을 마셨으니까 졸리잖아. 그런데 웃긴 게 뭐냐 하면, 계속 집을 지나쳐서 내리게 되는 거야. 졸다 보면 집에 가기 전에 깰 때도 있고 그런 건데, 정말 한 번도 안 빠지고 계속 집을 지나쳤다니까? 버스가 있으면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가고, 버스가 끊긴 시간이면 걸어서 가기도 하고, 택시를 타고 가기도 하고 그랬지."
"그랬구나."
"응, 그런데 며칠 전에 너랑 술 마시고 집에 갈 때 말이야."
"응."
"그날도 졸다가 딱 깨어났는데 바로 집 앞인 거야. 그래서 허둥지둥 기사 아저씨한테 소리치면서 버스에서 내렸지. 내려서 집으로 걸어가는데 가만 생각해보니까, 이게 얼마 만에 제대로 집 앞에서 내린 건지 모르겠더라구. 그래서 자꾸 웃음이 나더라? 정말 행복한 거야. 집으로 가는 내내 웃으며 걸었다니까?"
"행복했구나?"
"응, 정말 행복했어."
"그래, 마시자."
낄낄낄

"우리 연아 말이야, 커서 피카소가 될 것 같다?"
"무슨 말이야?"
연아는 친구의 딸 이름이었어요.
물론 가명이죠, 언젠가 그 애가 멍연아 캐릭터랑 닮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거든요.
"얘가 크레파스만 쥐면 신이 나서 그림을 막 그려. 그런데 그 그림이 꽤나 괜찮단 말이야?"
그리고 친구는 핸드폰 동영상으로 찍은 자신의 딸을 보여주더라구요.
그 조그만 영상 속에서 머리가 이따만한 여자애가 도화지를 앞에 놓고 춤을 추듯 크레파스를 마구 휘두르고 있었어요.
도대체 뭘 그리는 건지 알 수도 없는 그림이었죠.
"응, 그래, 정말 피카소가 될 것 같다."
"그치? 정말 잘 그리지?"
"응, 그래, 마시자."
"응, 마셔."
낄낄, 낄낄

창밖의 거리를 보고 있는데 문득 자전거를 탄 여자가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어요.
"요즘 자전거 타고 다니는 여자애들이 많지 않아?"
제가 말했죠.
"그래? 그런가?"
"내가 아는 여자애 중에 말이야, 30분이 넘는 거리를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애가 있어. 그것도 서울 한복판에서."
"좀 위험하지 않나?"
"위험하지, 팔꿈치를 부딪혀서 상처가 생겼더라구. 걱정되더라?"
"그래? 너 그 애 좋아하냐?"
"응, 사랑해"
"그래? 마시자."
낄낄낄

"얼마 전에 훈이 만났거든?"
"응, 훈이 만났냐."
"이놈이랑 지하철을 오르는데, 앞에 가는 여자가 백으로 치마를 가리고 가는 거야. 그래서 내가 훈이한테 그랬지. 뭐, 아무 것도 안 보이는데 여자들은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구. 그랬더니 훈이 놈이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보여' 그러는 거야."
"정말?"
"응, 자기는 많이 봤다는 거야."
"뭐야, 난 한 번도 못 봤는데?"
"응, 나도 한 번도 못 봤어."
"정말 보인단 말이야?"
"응, 괜히 훈이가 부럽더라."
"그래, 부러웠구나."
"응, 부러웠어, 마시자."
낄낄낄낄

"얼마 전에 홍상수 영화 봤다, 하하하?"
"응, 나도 봤어."
"거기 남자가 세 명 나오잖아. 유준상이랑 살찐 김상경이랑 김강우."
"응, 그래."
"그런데 그 세 명이 다 다르잖아. 정말 비슷한 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 다르게 생겨먹었잖아?"
"그래, 세 명 다 다르지."
"그런데 말이야, 영화를 보고 있으니까 왠지 그 세 명이 전부 다 나랑 닮은 구석이 있는 거야. 보면서 계속 '어, 이건 내 얘긴데?' 그랬다니까? 세 명 다 말이야, 세 명 다 나랑 닮았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랬어? 그래도 가장 닮은 사람이 있을 거 아냐."
"그래, 그래도 유준상이 나랑 제일 비슷한 거 같더라."
"어떤 점이?"
"몰라, 그냥 좀 바보 같은 면이 있더라구."
"맞아, 니가 좀 바보 같지."
"그러냐? 마시자."
낄낄낄

"그런데 여자도 비슷하더라?"
"응, 뭐가?"
"어떤 여자애가 있는데, 그 애가 하루는 파스타집엘 갔어. 파스타를 먹었겠지. 그런데 거기 일하는 남자가 굉장히 멋있게 생겼더라는 거야."
"그래서?"
"그러니까 한눈에 반해서 하루 종일 히죽히죽거렸다는 거야. 그리고 내일 또 가야지, 그랬다네?"
"그래, 여자도 비슷하구나."
"그래, 그래서 좋았어."
"뭐가?"
"비슷해서 좋았다구."
"응, 그래 마시자."
낄낄낄

"어제 집에 가는데 말이야, 날도 덥고 해서 동네 슈퍼에서 하드를 하나 사먹었다? 누가바 있잖아? 포장을 벗기고 입에 넣었는데 조금 녹았더라구. 그래도 그냥 손에 들고 걸었지.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한 손은 누가바를 들고 팔을 움직였지. 그런데 갑자기 누가바 절반이 앞쪽으로 휙 날아가더니 길바닥에 데굴데굴 구르는 거야. 왜, 누가바가 동그랗잖아? 저만큼 굴러간 누가바를 보는데 아, 이거 정말 아깝더라구. 막대에 남은 누가바를 먹으면서 집으로 걸어갔지. 걸어가는 내내 떨어져나간 누가바 생각밖에 안 나더라."
"아까웠구나?"
"응, 정말 아까웠어."
"그래, 누가바 아깝지. 마시자."
낄낄

"넌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냐?"
"응? 뭐야 갑자기."
"아니, 그냥 한번 얘기해 봐. 넌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냐?"
글쎄, 하고 친구는 잠시 생각에 잠겼어요.
"사랑은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생각해."
"무슨 말이야?"
"몰라, 그냥 그런 생각이 드네. 그 사람이 너무 불쌍해서 잘해주고 싶은 마음, 그게 사랑이라고."
"그건 연민이잖아."
"그래? 연민이 사랑이 되면 안되냐?"
저는 잠시 친구를 바라보았어요.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야, 너도 얘기해 봐."
"그래, 난 말이야, 사랑이란 의지라고 생각해."
"의지? 무슨 의지?"
"그 사람을 사랑하겠다는 의지."
"그게 뭐야."
저는 고개를 돌려 창가를 바라봤어요.
해가 길어 그제야 어둑어둑해지는 거리에는 사람들이 물처럼 흐르고 있었죠.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어? 지금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보다 더 좋은 사람, 그러니까, 외모가 됐든 성격이 됐든 조건이 됐든, 비교했을 때 얼마든지 더 좋은 사람이 많이 있을 거야. 그렇지 않아? 그리고 그런 사람을 만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겠지."
"그래, 그렇지."
"그렇지만 나는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만을 사랑하겠다는 의지, 한때의 열정이 식을지라도 언제까지나 그 사람을 사랑하겠다는 의지, 그런 거라고 생각해."
"그래? 정말 그럴 수 있어?"
"그런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 그냥 나는 그런 의지를 갖고 싶다는 말이야. 말하자면, 이런 거야. 내가 20년 동안 일기를 쓰는 걸 알지?"
"그래, 알지."
"나라고 매번 일기를 쓰는 것이 즐겁기만 하겠어? 그건 그냥 일종의 의지를 가지고 하는 일이지. 알겠어? 그냥 그런 방식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다는 거야."
친구는 절 잠시 바라봤어요.
"그래, 마시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아무런 꿈도 꾸지 않은 채 버스 창가에 앉아 잠깐 졸았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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