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27 15:45
친구의 다섯살짜리(그보다 어릴 수도 있는데 나이가 정확히 기억이 안남 -_-) 조카가 마블영화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눈살이 찌뿌려지면 이것은 단지 안티의 마음인걸까요? 원래도 그렇게까지 히어로영화를 좋아하진 않습니다만 마블의 히어로 영화는 정말 좋아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해마다 꼬박꼬박 나오는 마블 영화들을 보다가 <닥터 스트레인지> 때 그 혐오감이 완전히 극에 다다르고 말았거든요. 저는 사실 <캡틴 마블>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나마 좋아하는 거라면 <앤트맨> 시리즈와 <블랙 팬서> 시리즈 정도? 원래는 캡틴 아메리카를 제일 좋아했는데 이제는 그것도 시들해졌습니다. 인피니티 젬을 다 모으면서 어벤져스 열풍이 다 꺼졌으니 저 혼자의 반감도 이제 무의미해졌구요.
디시 히어로들은 아직도 좋아합니다. 이들이 마블 소속 히어로랑 다르다고 느끼는 부분은 세계에 대한 진지함과 겸허함이라고 해야할 것 같아요. 흥행에서는 망했지만 저는 <샤잠>을 굉장히 좋아하고 또 훌륭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남들이 유치하다고 하는 부분, 정치적 논의로 발전하기 전에 단순한 선의를 꾹 믿으면서 아이처럼 노는 그 모습이 좋은 거죠. 디시 소속의 히어로들은 두 파로 갈리는데 아주 유쾌하거나 꽤나 음울하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픽셔널한 초인으로서 현실과 충돌할 때 얼렁뚱땅 넘기는 대신 이상할 수 밖에 없는 괴리감을 정면으로 다루죠. <샤잠>은 그 부분에서 좋았던 것 같아요. 마블처럼 히어로가 나오는 건 당연한 게 아니라, 히어로가 되면서 생기는 슈퍼파워에 마음껏 도취되어보는 그 어린 아이같은 욕심이요. 보통 히어로영화에서는 주인공이 각성을 하면 이 힘이 생기는 부분을 한 오분정도 이것저것 실험하면서 보여준 다음에 정의구현을 하는데 초점을 맞추잖아요? 그런데 어린애라면 당장 나쁜 놈 퇴치하기보다는 그 힘이 흥미로워서 이것저것 해볼 것 같거든요. <샤잠>이 보여주는 그 동심과 대안가족으로서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방향성이 굉장히 감동적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원더우먼>이나 <맨오브스틸> 시리즈는 세계에 대한 고민을 진중하게 던지는 것 같아서 조금 더 호의적으로 될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에 반해 마블 영화는 히어로들의 자기과시가 기본적으로 깔려있습니다. 내가 대단한 사람인 건 알고 그에 대한 팬서비스를 좀 해줄게, 라는 스타로서의 자의식이 영화 전체에서 너무 많이 나옵니다. 특히 싫은 게 진지하게 싸우는 와중에 유머 하나 툭 던져주는 부분이에요. 내가 이렇게 낑낑대며 싸우지만 그래도 너희를 재밌게 해줄 여력은 아직 있다구~~ 하는 느낌이랄까요. 거의 모든 마블 영화에 이런 씬이 꼭 하나씩 나오는데 그 때마다 승질이 납니다. 파워와 센스와 유머를 모두 갖춘 위트가이~ 하는 재수털리는 느낌... 특히나 자본주의적으로 자신을 과시하는 아이언맨의 존재는 아이들에게 좀 유해한 존재인 것 같습니다. 한없이 선의와 희망만 주입해도 모자랄판에 히어로 스웨그를 열심히 펼치는 그런 캐릭터를 보여준다는게... 어른으로서의 오지랖이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꽁기꽁기합니다. 그래서 <저스티스 리그>에서도 슈퍼맨이 능글맞게 웃으면서 마지막에 등장할 때 얼마나 역겨웠는지 몰라요. 슈퍼맨은 단 한번도 그렇게 적을 앞에 두고 힘자랑을 하지 않았거든요. 자기 힘이 지구에 일으킬 파장을 늘 걱정만 했죠.
그래서 디시 유니버스다웠던 이번 <원더우먼 1984>도 저는 즐겁게 보았습니다. 시덥잖은 농담을 하면서 자기가 얼마나 근사한 히어로인지 뽐내는 게 아니라, 오로지 성실하고 진지하게 세상에 부딪히며 호소하는 그 모습이 좋았어요. 저는 이왕이면 그 다섯살짜리 친구 조카가 디시 유니버스의 히어로들을 더 좋아하길 바라지만, 그게 큰 대수는 아니겠죠. 저는 히어로물을 즐길 수 있는 게 결국 초인과 선인을 믿는 아이의 마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잘난 사람들끼리 서로 팀을 짜고 간간히 카메오 출연을 하면서 히어로들마저도 인맥을 만들고 올스타전으로 싸우는 게 아니라, 바보같이 우직하고 순진한 사람들이 자기 힘을 어떻게 써야할지 고민하는 그런 이야기가 더 좋습니다.
2021.01.27 15:47
2021.01.27 16:00
세번 정독했는데 어디에 옳다는 대전제가 깔려 있습니까? 그리고 이건 논리도 아니고 개취와 그 개인적 이유를 적은 거 뿐인데요. 묘하군요.
2021.01.27 16:07
2021.01.27 15:57
어떤 면을 싫어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는 알겠는데 그 논점이 마블과 디씨영화들의 차이로 나눠지는지 잘 모르겠어요. 제가 보기엔 디씨 히어로 영화들도 예전 놀란의 배트맨 삼부작이나 몇몇 빼면 다 진지한 척만 하지 결국 말씀하신 그런 과시하는 히어로물이나 마찬가지라고 보는데요.
2021.01.27 16:11
디시 영화 라인에서 놀란의 작품은 이상하게 그 라인이라고 생각을 안하게 되더군요. 아주 별도의 느낌? 그러니까 제가 디시 유니버스의 영화라고 생각하는 작품들은 <맨오브스틸>, <원더우먼>, <배트맨 VS 슈퍼맨>, <저스티스 리그>, <아쿠아맨>, <샤잠>, <원더우먼 1984>가 있는데 (빠진 게 있는지...) 마블 영화에서 보이는 어떤 균질한 분위기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듀나님이었나? 트위터에서 봤던 멘트가 딱 제가 생각하던 바였는데 마블의 히어로들은 현실에서 이런 옷을 입으면 그게 이상하다는 걸 알아서 그걸 꼭 스스로 무마하는 농담을 합니다. 자기가 히어로인걸 의식하고 관객이 그걸 현실적으로 받아들이는 어색함을 의식해서 그걸 무마하려고 한다는 거죠. 디시유니버스의 영화들은 그런 게 덜합니다. 그냥 진지하게 받아들이죠. 아니면 <샤잠>처럼 놀거나... 제가 그 두 제작사의 히어로 영화들의 공기를 정확하게 표현하기가 어렵네요.
2021.01.27 17:56
추가할 작품은 [수어사이드 스쿼드]나 [할리퀸]? [조커]는 놀란의 [배트맨] 쪽에 가까울 듯...
저도 [샤잠] 아주 재미있게 봤습니다.
2021.01.27 20:11
아하!! 그걸 빼먹었군요. 이 작품들은 기억에 남지 않았어요. 특히 수스쿼는 너무 많이 실망했습니다. 원래 촬영분은 훨씬 더 다크했다고 하던데 그걸 개봉했으면 어땠을까 싶어요. <조커>는... 음... ㅋㅋ
2021.01.27 18:38
DC코믹스의 팬으로서 (DCEU 팬은 아니지만요) 마블과 DC가 같은 슈퍼히어로 장르를 대하는 차이가 분명히 있긴 하죠. 대개 '인간적인' 히어로상을 그리는 마블과 '인간을 초월한 히어로라는 존재'를 그리는 DC로 분류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사실 마블과 DC 둘 다 적당히 즐겨보는 저로서는 한쪽 편을 들어주기 보다 그때그때 입맛에 당기는 콘텐츠가 다른 것 같아요.
말씀하신 마블의 대표적 히어로인 아이언맨 같은 경우 히어로로서 장점보다 인간으로서 단점 및 결격사유가 더 많은 위인이죠. 전형적인 슈퍼파워로서 미국을 형상화한 캐릭터라고 볼 수 있을텐데요. 실제로 원작 코믹스에서 아이언맨은 정말 상종하기 싫은 재수없는 인간처럼 묘사되는 장면들이 많습니다. 물론 그 모든 인간적 단점을 안고 가며 숭고한 히어로로 발전하는 입체적 캐릭터가 아이언맨과 비슷한 히어로들을 보유하고 있는 마블의 매력일테구요.
반면 DC 히어로들은 탄생 비화(?)를 다룬 몇몇 에피소드를 제외하면 처음부터 전형적인 슈퍼히어로로서 완성형에 가까운 캐릭터들이죠. 물론 그 탄생 비화조차도 너무 숭고하거나 고귀하거나 우리가 이상적으로 그리는 '히어로'에 가까운 모습들이긴 하지만요. '숭고한 영웅의 희생' 같은 고전적이며 동시에 비극적인 테마가 DC 히어로들의 근간을 이루고 있고, 이 같은 점이 마블과 DC의 매력을 가르는 가장 큰 지점 같습니다.
물론 마블 보다 너무 가벼우면 DC를, DC 보다 너무 진지하면 마블을 보는 저 같은 사람들이 더 많겠지만요
2021.01.27 19:01
2021.01.27 20:23
저뿐만 아니라 전세계 사람들이 배트맨을 그토록 좋아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뉴52 저스티스리그에서 처음으로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같은 히어로들이 모여 통성명할 때 그러죠.
'배트맨, 네 능력은 뭐야?'
인간을 월등히 뛰어넘은 초인 또는 초능력을 갖춘 다른 히어로에 비해 배트맨은 그저 불굴의 노력과 의지로 스스로를 히어로로 '만든' 히어로일 뿐이죠. 그래서 마블의 아이언맨이 다른 히어로들을 통제할 수단에 집착하는 것처럼 DC의 배트맨이 자기 같은 '인간'이 아닌 다른 히어로들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에 골몰하는 것 같아요.
이 같은 '인간을 뛰어넘은 인간'으로서 배트맨이란 히어로의 약점이 그를 더 위대하고 숭고한 존재로 만드는 것 같아요. 저 같은 일반 팬들이 배트맨에 열광하는 이유도 바로 그래서일테구요.
2021.01.27 20:13
말씀하신 그 숭고미가 제가 히어로영화를 가르는 지점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부분을 너무 무겁다며 싫어할 분들도 있겠죠. 그런데 어정쩡한 건 좀 싫더라구요.
2021.01.27 20:26
네, 저도 그 점에서 DC의 히어로들에게 더 끌리는 것 같습니다. 특히 배트맨은 좋아하는 걸 뛰어넘어 사랑(?)하는 편이구요. 다만 가끔씩 특유의 그 분위기가 답답하게 느껴질때 기분전환용으로 마블코믹스의 가벼운 이슈들을 보면 또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라구요.
참 DC에서 성인독자를 겨냥해 나온 블랙라벨 시리즈는 꽤 잘나왔더라구요. 이미 아실 수도 있지만, 관심 있으시면 한 편씩 찾아보시는걸 권해드리고 싶네요!
2021.01.27 22:01
2021.01.28 15:38
마블에 비해 영화화된 디씨의 히어로들은 (배트맨을 제외하면) 신들의 고뇌이자 싸움이란 느낌입니다. 애초 그들의 출생과 배경이 남다르기도 한데, 그러한 신적 지위에 준하는 존재들인고로 인간세상을 긍휼히 여기는 느낌이랄까요. 반면 마블히어로들은 인간 베이스에서 특출난 힘을 가진 경우가 많죠. 그런 점에서 나 이런 능력있어, 대단하지? 라는 뻐김은 외려 인간적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네요. 저는 거꾸로 디씨가 완성형 히어로를 다루는 탓에 너무 폼을 잡는 건 아닌가 생각한답니다. 그 점이 디씨의 한계가 되기도 하겠구요.
하지만 아이언맨 너무 싫어하는 1인입니다. 아이언맨 자아도취가 넘 꼴보기가 시러서.... 아이언맨 시리즈는 한번도 다시 본 적이 없어요. 캡아가 제일 좋고, 윈터솔저가 히어로 영화들중엔 최고 잘 뽑힌 것 같아요.
2021.01.27 19:47
2021.01.27 20:16
개별작품의 퀄리티를 유지하면서 마블과 차별화되는 작품들을 계속 뽑아낼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죠. 동의합니다. 그래도 저는 헛된 기대나마 품고 있는 중입니다.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는 정말 대단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좋아하는 작품이에요. 그런데 그건 쏘니에서 나와서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로건>같은 작품도 마블이라는 제작사 아래 있었다면 영화로서의 독립적인 작품성을 그정도로 갖추진 못했을 것 같아요.
2021.01.28 00:40
마블 영화만 할게 아닌 이상 자기만의 영화는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토르: 라그나로크를 찍었던 타이카 와이티티가 조조래빗을 만들고 오스카 각색상을 탔듯이요.
2021.01.28 12:44
드라마 판으로 만들어진 것을 보면 마블과 디씨의 차이가 드러나고 있죠. 드라마에서 디씨는 여러 시즌을 거치며 길게 나오지만 마블 시리즈는 2~3 시즌을 못넘기는 것 같아요.(Agent of SHIELD는 오래 했네요)
2021.01.29 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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