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 세종과 조카 생각

2020.10.09 19:47

어디로갈까 조회 수:488

# 몇달 째,  런던의 조카와 하루에 한 통씩 한글로 메일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아이는 한글에 대한 이해가 높은 편이고, 또 나름 어휘도 풍부해서 문장을 작성할 때 조심하게 돼요.  온라인(듀게나 동문 게시판)에 글을 쓸 때는 감각이 흐르는 대로 그냥 막 쓰지만, 조카에게 그런 글을 보내는 건 위험한 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보내는 글은 연상이 가능하지 않은 글자들을 조합하려고 노력해요. 그래야 아이가 글자에 집중하며 몰랐던 말들을 익히는 연습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같은 단어를 전혀 다른 문장에서 다른 의미로 사용했더니, 아이가 갸우뚱하며 그 단어의 복합적 의미에 대한 질문을 해와서 설명하느라 당황했던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오늘 보낸 메일에 책과 공책이란 단어를 섞은 문장을 구사했더니,  아이가 이런 답장을 보냈더군요. "책은 작가가 쓴 글과 그림이 있는 것, 공책은 아무것도 없어서 내가 채워야 하는 것." (흠)

저도  어린시절 유럽을 떠돌며 여러 언어를 익히느라 문자와 긴장된 시간을 가져봤던 터라, 낯선 글자의 조합 가능성을 알기 시작하면 글머리가 트이면서 그 언어가 이해되는 경험이 어떤 건지 잘 압니다.
한글은 로마자 표기 방식과는 달리 모음이 아래/옆으로 종횡무진 바뀌는 상당히 특이한 언어여서,  처음 배우기 시작했을 때 적잖이 이질감을 느꼈더랬어요.  철자의 위치가 계속 변하는 게 몹시 이상하고 흥미롭고 궁금했습니다. 서양의 글자는 대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든 개별 철자들이 선적으로 나열됩니다. 그러나 한국어는 선적인 나열을 통해 표기되는 철자가 아니죠. 

받침, 종성이라는 개념도 독특했고 그걸 아래에 써야 한다는 규칙도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통상적인 선적인 진행과 수직적인 표기가 서로 겹쳐서 난감했던 기억이 있어요. 한글은 글자 모양이 불규칙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로마자식으로 나열하는 철자를 먼저 익힌 이들에겐 전혀 다른 구상에서 나온 것이라 쉽게 이해하기가 어려운 문자입니다. 하지만 음절을 정확하게 나눌 수 있다는 장점을 알게 되면서부터는 익히는데 가속도가 붙게 돼요. 매력적인 특이점이죠.

# 세종은 선지자였습니다.  모 학자가 '세종은 자연위성 달을 매개로 이미지 무한복제와 분배가 이루어지는 정신의 민주주의를 수립했'다고 정의한 글을 기억하는데 새삼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하지만 수구 세력에 의해 그의 금속활자는 구텐베르크 혁명 이전에  멈춰서고 말았죠. 그 시대의 맥락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수긍이 되기도, 안 되기도 합니다.  (오늘은 그냥 외면하는 걸로~ )

조선의 건국 이념이 '민본주의'라지만,  이는 백성을 주체화한다기보다 그 반대였죠. 정도전 무리는 보수적인 성리학자로서 혁명을 일으켰으나 "권력은 배요, 백성은 물이라.. 여차하면 물이 배를 뒤집는다"는 혁명론에 젖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맹자>의 '명'을 '혁'한다는 것은 비가 오게 하지 못한다면 사직신이라도 갈아치울 수 있다는 의미지만, 이 기우의 제식은 '천명'이라는 대의로 변형되었을 뿐 그 갈아치우는 주체는 백성이 아닌 사대부-관료-선비 족이었습니다. 백성은 그 한자 민民이 본래 갑골문에서 "눈을 찔려 맹이 되어버린 사람들"이란 의미에 불과했죠.

그 문맹의 백성들에게 "보아 살펴서 사랑하고 생각하는" 삶을 선물하고자 했던 세종은 어떤 사람일까요? 웬지 저는 그가 아들들에게 은밀한 미션을 갈라주었던 게 아닌가 하는 짐작을 해봅니다. 
1`. 수양대군은 세종과 함께 불경 언해 사업에 몰두했고, 세종의 유지 하에서 <능엄경 언해> <법화경 언해> <원각경 언해> <금강경 언해> <영가집 언해> 등의 눈부신 한글번역 사업을 이뤄냈습니다.
그렇다면  왜 15세기 언어 환경에서 <논어 언해> <맹자 언해> <대학 언해> <중용 언해>는 간행되지 않았을까요?

2. 안평대군은 세종의 브레인 집단인 집현전 학사들과 교유하면서 세종조의 헤테로토피아로서 '몽유도원'의 자각몽 차원을 개방해갔죠. 그와 안견 사이는 수십년 동안의 사귐이 있었고, 그들 사이의 대화는 단순히 하룻밤의 꿈을 그림으로 옮겨놓는 정도가 아니었어요.  <몽유도원도>는 세종이 지향했던 가능세계의 극한에 해당되는 것 같아요. 초현실적 은밀함 (隱)과 현실의 정사(政)를 연결지은 꿈꾸는 시간의 삶.

위의 1, 2는  세종의 비전 영역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종이란 군주는 단지 명민하기만 했던 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술잔 속에 달을 띄워보고 싶었던 낭만주의자가 아니었을까요? (먼산)
사람들 마음 속의 달을  자극하는 술 한 잔의 취기 속에 녹아드는 달복제의 일렁이는 빛 , 그 빛의 감각, 지각, 인식으로부터 기존의 귀족적인 문자 생활을 뛰어넘으려 했던 사람. 하늘의 달과 다를 바 없는, 그보다 더 파동적인 리듬이 슬슬 풀려나오는 물에 비친 달의 - 눈으로 볼 수는 있으나 가질 수는 없는 - 감각을 나눠 가지려 했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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