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잡담] 천 백년 전의 취업고시생

2011.12.06 15:40

LH 조회 수:4193


살기 힘드시죠?
학생이라면 취직이 걱정이겠고고, 직장 가진 분도 언제까지 이런 일을 해야 하나 고민도 될 거여요.
한 천 백년 쯤 전에 같은 고민했던 사람 이야기를 해볼께요.

 

통일신라시대, 어떤 아버지는 이제 갓 열 두 살 먹은 아이 하나를 먼 바다 건너 유학을 보냈습니다. 10년 내에 급제 못하면 너 내 아들 아냐, 라는 말과 더불어.
요즘이야 조기 유학이다 뭐다 해서 아이를 멀리 멀리 보내는 일이 많아졌지만, 이전엔 그렇지 않았습니다. 최치원네 집안은 아버지 즈음부터 임금의 측근으로 세력을 얻었습니다만, 6두품이었기에 출세하는 데 제한이 있었지요. 그래서 당나라 유학을 결정한 겁니다.
진골 귀족들은 유학을 안 갔냐고요? 그거야 안 가는 게 당연하죠.
서라벌 남산 아래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랑, 금성의 노른자위 땅이랑, 잘 빠진 자가마도 모두 자기들 건데 뭐하러 유학은 가겠어요? 바다 건너 멀리, 될지도 안 될지도 모르는 위험한 곳으로 유학을 가는 것은 그렇게 가야만 활로가 열리는 절박한 사람들 - 6두품이나 그랬답니다.

이건 나중의 근대화 시기에도 비슷합니다. 기득권층 세도가는 - 그냥 한문 공부하고 과거를 준비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유학을 하거나 영어를 공부했거든요. 그 다음은 아시는 대로.

 

그리하여 최치원은 눈물나는 노력 끝에 6년만에 빈공과, 그러니까 외국인 전형에서 장원급제해서 벼슬길에 나아가게 됩니다만. 2년동안 무직으로 지내다가 간신히 잡은 직장이 율수현위(溧水縣尉)였으니 요즘 말하면 동사무소 직원? 그래도 그 때가 경제적으로 가장 윤택했다더군요.

그렇지만 이건 뭔가 아닌 거 같았는지, 최치원은 1년만에 벼슬을 내던지고 사법고시... 내국인 전형 과거 시험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똑 소리 나게 떨어집니다.
해서 최치원은 고시촌에서 직장도 없이 남 글 써주는 알바하며 겨우 입에 풀칠하고 살았는데,
너무너무 춥고 배고파서 힘들어하며 신세한탄 징하게 했더군요.

"가난한데다 타향살이 외로우니 너무 자주 찾아온다고 싫어하지 마세요 ㅠㅠ"

라고 옆집 사람에게 소심의 극치인 시를 써주기도 했습니다.

 

학교에서 역사를 배울 때 최치원하면 기계적으로 외웠던 계원필경 및 시무 10조가 떠오르는 분들도 있을거여요. 그리고 그는 훌륭한 학자이지만 골품제도의 높은 벽에 가로막혀 산속으로 들어갔다라는 지식이 단편적으로 떠오르지만, 정작 그의 목을 졸랐던 건 골품제도 이전에 먹고사니즘 및 취직 문제였던 것이죠.

뭐, 당시 당나라의 상황을 볼작시면 쫄딱 망하기 직전이었습니다. 이미 당 현종과 양귀비 커플이 나라를 대차게 말아먹었고, 그 즈음엔 황소의 난이 일어나고 곳곳에 군벌이 울쑥불쑥 일어나고 그랬지요, 그랬으니 외국인 노동자 한 사람을 신경 쓸 겨를이 있을 리 없겠지요... 뭐 최치원의 아버지가 그런 사정을 알고 유학 보냈을 리 만무하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눈물 쏙 빠지게 고생하다가, 최치원은 당시 회남군의 군벌 중 한 사람이었던 고변에게 취직 좀 시켜주셈- 이라는 자소서를 보냅니다. 고 씨라는 성씨에서 짐작했을 지도 모르지만, 그는 바로 발해계였습니다. 최치원은 같은 삼한출신 아니냐고 고변에게 비벼댔습니다... 당시 신라와 발해가 라이벌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또 최치원 자신이 장원급제하고 나서 "발해 꺾었다, 아싸!" 하고 썼던 걸 생각하면 너무 배고프고 취직이 안 된 나머지 눈이 홰까닥 뒤집어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최치원의 자소서는 굉장히 잘 써진 명문입니다만, 그 이상으로 비굴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글로 이렇게 불쌍하게 쓰는 것도 참 재주다 싶을 정도입니다.
저 삐쩍 말랐지만 아직 어려요, 빗자루 질이라도 해도 좋으니 일 좀 시켜주세요... 라고.
뭐 그렇게 해서 비서로 취직이 되긴했는데... 최치원 하면 토황소격문으로 유명하지만, 정작 최치원의 상관인 고변은 황소랑 싸우지도 않고 이리 빼고 저리 빼면서 머리 굴리다가 잡혀서 처형당합니다. 물론 최치원은 그 전에 사표를 내고 짐 싸들고 신라로 둥기둥둥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이건 신의 타이밍.

그렇게 터덜터덜 신라에 돌아가게 된 최치원이었습니다만. 이 때 그의 나이 28세.


16년만에 돌아온 고향에서 이미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참으로 낯설었을 거여요. 다만 골품제는 여전히 남아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좌절하고 해인사로 들어갔다... 라곤 하지만.

 

그래도 돌아온 그가 아주 찬밥이었던 건 아닙니다.
당시 신라는 한학을 도입했지만 아직 어설픈 상태. 본토에서 구르고 온 최치원의 글솜씨는- 당연하게도 신라의 모두를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외교문서는 물론, 사찰 낙성식 등 각종 행사에 필요한 글을 작성하는 글셔틀로 역사에 크게 기여했지요.
그의 글은 당나라 말기의 글들이 그러하듯 아주 우아하고 화려하면서도 글맛이 납니다. 문장과 단어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 지를 아는 달인의 느낌이지요. 그 좋은 글로 삽질하고 자학개그해서 그렇지...
요즘 발굴이 진행되면서 최치원이 지은 비석들이 쏙쏙 발견되어 만성자료부족에 시달리는 고대사 전공자들에게 한 줄기 광명을 주곤 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최치원은 결국 자기가 원하던 세상을 만들어낼 순 없었고, 결국 절망한 끝에 벼슬을 버리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소식이 끊겼다고 하죠.
최치원이 인정받은 것은 살아서보다 죽은 다음이었을 거여요. 유학이 유행하면서, 그는 우리나라 유학의 선구자인 최느님으로 대거 인기몰이를 하게 됩니다. 고려는 "최치원이 우리 정권을 지지했다!" 라고 프로파간다로 이용해먹었지요.
 
얼음이 얼 정도로 추운 고시원 골방에서 알바를 할 때, 최치원은 자신이 천 년 뒤 교과서에 자기 이름이 실릴 줄은 상상도 못했을 거여요. 실린다는 걸 알아도, 그보다 당장 먹을 거리나 충분하면 좋겠다라고 생각했겠죠. 물론, 사람이 꼭 역사에 이름 남길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아주 훌륭하고 걱정 하나 없을 것 같은 사람조차 일생을 보면 올라가는 때가 있고 내려가는 때가 있으며, 아주 밑바닥에 철퍽 주저앉아 좌절때리고 있을 때도 있어요. 지금 당장 접시물에 코 박고 콱 죽어버리고 싶더라도 조금 머리를 식히고 기다려 보면 그게 '제일 깊은 바닥'일지도 몰라요.

 

생각해보세요. 만약 유학생활이 힘들어서 때려쳤다면, 그냥 동사무소 직원에 만족해서 살았다면, 자존심 때문에 신라에 돌아가지 않으려 했다면.우리가 알고 있는 최치원은 없었을 거여요. 

그러니까 동서고금의 모든 고시생들을 위하여 건배.

 

p.s :
선거부정과 정치깡패 이야기나 할려고 했는데... 아직은 자료가 부족해서 이야기 풀 정도가 아니네요. 정보 수집중 킁킁.
ez pdf는 누가 개발했는지 모르겠어요. 아이패드에 넣어서 읽을 수 없는 포맷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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