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밤운동 마치고 집으로 오는 동네 골목길에 두 개의 노래방이 있어요. 중간에 식당을 하나 끼고 있는 이 노래방들은 어쩌면 형제나 자매가 운영하는 곳 같아 보입니다. 두 번 방문해 본 바, 둘 중 한 곳으로 가면 옆의 곳으로 가라고 이르고 전화를 걸어주죠. 어쨌든, 저는 거의 밤마다 이곳을 지나는데 일전에 젖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걷다가 노래방 앞에서 이런 광경을 목격했어요. 몸과 발음이 거의 낙지가 된 여자가 남자에게 매달려 흐느끼듯 말하는 겁니다.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 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어?" 취한 발음을 들리는 대로 형상화하고 싶을 정도로 여자는 만취해 있었고, 따라서 최소한의 통제력도 없이 남자에게 매달려 있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여자를 매달고 있는 남자의 싸늘한 반응입니다. 대개의 경우 남녀가 이렇게나 맛이 갈 정도로 술을 먹고 저런 대사를 칠 때는 순전히 앙탈이거나, 곧 여관으로 직행하기 전의 최음제 같은 투정일 텐데, 보아하니 그날 밤 아마도 그들은 헤어지려는 모양이었습니다. 직감한 순간, 저는 그 장면이 무척 추하다고 느꼈습니다. 여자는 하나도 예쁘지 않았고 남자도 무척이나 지쳐 보였습니다. 둘 다 어리지도 젊지도 않았어요. 극한 상황에 처한 사람 풍경에 때로 이것은 무척 결정적인 조건이 되기도 하지요. 그리고 저는 이렇게 중얼거렸어요. 이번 가을이 지독한 사람들 꽤 여럿이구나. 평일엔 테레비를 전혀 보지 않는 고로 주말에 유일하게 봤던 드라마도 두 개나 끝나버리고, 그 중 하나는, 막판에 터진 대사 몇 마디가 진짜 후벼 팔 정도로 이입이 되어요. 석 달 열흘 동안 잠만 잤으면 좋겠어. 그러다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어쩌면 작가도 이번 가을 무척 힘들었나 싶어요.

 

  그러다가 오늘 비로소 겨울이 시작된 것 같아 다행이에요. 저에게도 이번 가을, 진짜 너무 길었어요…….

              

  2. 몇몇 분들께서 직장 생활 하면서 운동하는 것 대단하다고들 하셨는데, 저의 경우는 자연스러운 일과 중 하나로 자리잡은 터라 이게 그렇게 대단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어요(물론 저를 겨냥해서 말씀들 안하셨겠지만). 흔히들 밤늦게 야식을 먹거나, 정기적으로 드라마를 보듯 저는 일정한 시간이 되면 습관적으로 운동화끈을 묶고 머리카락을 질끈 묶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정말 운동은 진짜 지루하고 재미없고 힘든 반복의 반복에 의한 반복을 위한 중독입니다, 저에겐. 따라서 어디까지가 적당한 수준인가 하는 기준도 딱히 없습니다만……. 일주일에 평균 4~5회 정도 운동에 출석하는 저로선, 아프거나 그냥 쉬고 싶어서 가지 않는 것 말고(특별한 주기 하루 이틀 빼고는 이 경우도 거의 없습니다) 운동을 빠지고 저녁 약속을 잡게 될 때, 과연 그 만남이 운동을 째고서라도 만날 만큼의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가 가장 관건입니다. 대개는 저는 그냥 운동을 갑니다……(사실은 만날 사람이 없거나 만나자는 연락이 거의 없기 때문일지도).

 

  운동의 구성은 대략 반복된 행태이긴 하지만 유산소만큼이나 동등하게 웨이트에 주력을 둔 지는 몇 년이 되었어요. 사람들에게 듣는 칭찬대로 ‘뭘 해도 폼(만)은 좋다’ 는 믿음 하에 쑥스러움을 극복하고, 잘 하는 사람들 하는 거 예리하게 보고 따라하거나 정 안 되면 트레이너들에게 물어보고 하면서 꾸준히 나름 연구하고 연습하고 그런 제가 이젠 익숙해요. 그래봐야 제가 어느 날 갑자기 말근육이 되겠습니까만, 어떤 부위들엔 제법 자리가 잡혔어요. 물론 하는 거에 비해 진짜 근육이 안 생기는 편이라 힘을 주지 않으면 표가 나지 않지요. 지난 초여름에 종합검진을 했을 때, 은근히 걱정 되었던 몇 개의 내장들이 멀쩡하다는 진단을 받았고, 의사선생님께서 직접 밑줄을 그어가며 설명해 주시던 근육과 지방의 그래프가 이렇게 정반대로 나타나는 경우는 여자들에게 무척 드물다는 얘기가 당시엔 칭찬인 지도 모르고 눈만 끔뻑거리다가 왔으니까요. 그래도 얼굴이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여전히 운동과는 담쌓고 살 것 같은 분위기라니 이게 왠일인가만, 썩 나쁘지는 않아요……?

 

   운동을 하면서, 운동을 해야만 하는 수백 가지 이유를 타인에게 설파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알아요. 해서 좋은 걸 누가 모르나요? 그러나 지금 당장 움직이지 않으면 그것은 망한 국가의 지폐 같은 것입니다. 내 발목과 관절을 지켜줄 여러 켤레의 좋은 운동화들을 때에 맞춰 번갈아 가며 신고 조심조심 칫솔질 하며 빨고 말리고 끈을 꿰어 다시 신고 하는 것이 그동안 남들에게 말하지 않았던 제가 즐겁다 느끼는 비밀스러운 행복 중 하나입니다.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다고 황동규가 말했죠. 저는 언제나 나이키 로고를 보면 달리고 싶어집니다.

 

  3. 지난 주 금요일에 저는 어떤 일로 몹시 기분이 나빴어요. 살짝 건드리기만 하면 누구든 물어뜯을 기세였죠. 그러다가 저의 가장 친한 친구가 걸렸는데 저는 아주 사소한 오해로 이 친구와 절교까지 생각할 만큼 옹졸하고 잔뜩 화가 나 있었어요. 아마 그때까지 염병할 가을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겁니다. 그런 제 분위기를 알고 친구가 무리해서 만나자고 하는데 두 번 튕기다 못 이기는 척 하고 나가 삼겹살 구우며 소주 마셨어요. 저보다 더 빡세게 사는 친구의 얘기, 그보단 덜 빡센 것 같지만 여전히 방향을 찾지 못하는 제 얘기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차고 넘쳤죠. 그리고 저는 지난 한 달 동안 가슴 속에 너무 담아두어 병이 될 것 같았던 어떤 얘기를 힘겹게 했는데 친구가 그럽니다. 그거 아무렇지 않다고. 그게 바로 사람 사는 일이라고.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저는 울지는 않았지만 그 뻔한 말이 너무 크게 위로가 됐어요. 우리는 자연스레 자리를 옮겨 술을 더 마셨는데 어떤 술자리도 2차에 가서는 거의 마시지 않는 습관인데 이날의 맥주는 젖과 꿀같이 달고 착 감겼어요. 그리고 담담하게 저를 위로하다가 정작 어느 순간 울음을 터뜨리는 친구를 보면서 어쩌면 우리가 지금 가장 어려운 지점, 어떤 거점을 지나고 있구나 싶었어요. 세상은 어른들 차지라고 김형태가 말했지만 거짓말. 그래요, 나이 삼십 넘어서 즐거운 일은 진짜 드물어요. 그래도 저는 꾸역꾸역 살 겁니다. 중간에 죽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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