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집단과 분석의 욕망

2020.09.25 13:06

Sonny 조회 수:429

얼마전 트위터에서 삼국지의 의의는 무엇인지 설문조사 비슷하게 돌아다니더군요. 저도 곰곰히 생각해봤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설령 그것이 신화시대의 이야기라 할 지라도 명백한 교훈을 담고 있는 그리스 신화에 비해 삼국지의 교훈이나 주제의식은 도무지 하나로 좁혀지지 않더군요. 아주 뛰어난 사람들이 치고박고 싸우는 그 과정 자체의 재미만 있지 이 이야기를 읽고 얻을 수 있는 성찰이나 깨달음 같은 게 있나 싶었습니다. 모든 것은 덧없고 그저 최선을 다해 살 뿐이라는 허무 속의 분투라는 교훈을 억지로 찾을려면 찾을 수 있겠지만... 글쎄요. 아무도 유비나 조조나 손권이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딱히 이야기하진 않습니다. 그들이 누린 번영과 권세를 기억하죠. 굳이 작품 바깥에서 그 의의를 찾자면 무협지의 스케일을 국가 수준으로 키우면 그것은 뭔가 교훈이 있는 것처럼 스스로 의미를 발생시킨다... 는 점일까요. 


삼국지의 재미를 이야기할 수는 있겠습니다. 그것은 국가라는 아주 거대한 집단이 망하고 태어나고 엉키면서 생기는 격변을 저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삼국지를 읽으면서 독자는 인간이 절대 한 생애에 온전히 실감할 수 없는 수백만명의 삶과 죽음을 나관중이라는 작가가 지은 이야기 안에서 압축시켜서 봅니다. 삼국지는 일종의 역사적 비바리움입니다. 유리관 안에서 개미굴을 관찰하듯이 사람의 삶이 일으키는 국가 규모의 부흥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삼국지를 보면서 독자는 역사를 통제하는 듯한 쾌감을 느낍니다. 삼국지는 인간의 전지의 욕망을 대변합니다. 어떤 일이 생겼고 그 귀추가 어떻게 되는지 저 끝에서 끝까지, "천하"라는 글자로 압축해서 싹 흝어내립니다. 원래 본다는 것, 안다는 것은 지배의 감각과 닮아있거든요. 삼국지를 읽는다는 건 그 전란의 시공을 다스린다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리스 신화에는 신이 직접 나오지만 삼국지에는 신이 나오지 않습니다. 페이지를 넘기는 독자가 신이 됩니다.


이것을 현실세계에 접목하면 어떻게 될까요. 자꾸 분석을 하게 됩니다. 여기는 이런 곳인데 실세는 누구이고 얼마전 충돌이 일어났으며 거기서 승자는 누구이고 다크호스가 있고 세력이 어떻게 나눠지고... 어떻게든 전지의 욕망을 실현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함정이 하나 있는데, 사람이 모이면 어느 곳에나 보이지 않는 세력이 생기고 호오에 따라 파가 갈립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고 그 안에서 여러 형태의 사회가 생기니까요. 그러니까 이건 새삼 떠들 필요도 없고 그냥 누구나 감각하는 것이며 딱히 알든 모르든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세계 속에서 개인의 삶과 투쟁에 딱히 상관도 없는 그냥 시시껍절한 여흥입니다. 학창시절을 예로 들어봅시다. 이 학교 짱이 누구이고 부짱은 누구인데 요새 둘이 사이가 별로다... 전학 온 누가 전에 있던 학교에서 좀 날렸는데 사고쳐서 지금은 조용히 있다더라, 그런데 붙으면 또 짱이 될 지도 모른다... 근데 저기 여고 퀸카가 누구랑 사귀는데 요새 부짱이 남친 있는 거 알면서도 그 여자애한테 들이댄다, 그 여자애 오빠가 용인대 유도 특기생이라 잘못 건들면 개 아작날지도 모른다... 쓰고 있자니 끝이 없네요! 이렇게 생생한 예시로 들어놓으니까 어떤가요. 나는 세계를 꿰뚫고 있다는 그 전지의 욕망은 순식간에 가십으로 전락합니다. 그냥 남의 일 가지고 대단한 것처럼 떠드는 거죠.


그 시선, gaze를 뒤집어보면 어떨까요.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요. 짱과 부짱과 용인대 체육 특기생 오빠가 있는 퀸카를 다 꿰고 있는 그런 사람들은 학창시절에 어떤 사람이었던가요. 다 맞지는 않겠지만 제 경험상 딱히 싸움을 잘하거나 잘 나가는 사람들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 일진의 세계와 거리가 멀었던 것만은 확실해요. 뭐 제잘난맛에 짱이 누구고 얼마전 누구랑 싸웠고 이런 이야기 떠드는 사람들도 없진 않겠습니다만 막 그런 걸 세세하게 막 분석하고 그러진 않죠. 결국 자기 이야기가 친구 이야기고 우리들 이야기잖아요. 그런 식으로는 이야기를 안합니다. 가상의 세계와 캐릭터들처럼, 장기말을 두듯이 이야기를 하진 않죠. 당사자는 자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남이 알아서 떠들어주잖아요. 나관중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는 삼국지의 세계를 매우 동경하지만 거기서 멀리 떨어져있던 사람인 건 분명합니다. 원래 이야기의 욕망이라는 것은 그 세계에 실제로 편입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관찰하고 말하면서 만들어낸 스토리를 그 세계에 소속된 것처럼 느끼는 것입니다. 위대한 개츠비를 봅시다. 이 이야기의 화자인 닉 캐러웨이는 개츠비의 세계에서 멀리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개츠비나 뷰캐넌이나 데이지와 친분이 있지만 그 세계의 사람은 되지 못합니다. 그걸 자각하고 있으니 관찰자로서의 임무를 다하는 것일수도 있구요. 그럼에도 그는 끊임없이 그 호사롭고 덧없는 세계를 이야기합니다. 그 세계 안에 자기 자리를 두고, 그 세계를 어떤 식으로든 만끽하고 싶은 것입니다. 설령 환멸의 형태로라도요. 그 모든 노력은 결국 Out of league를 이야기합니다. 이야기의 욕망은 세계라는 궁전문 바깥에 놓인다는 걸 뜻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하나 있습니다. 너무 작은 세계의 쓸모없는 디테일을 분석하는 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시야를 역으로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옆집 누가 바람이 났고 교회 권사님 누가 장을 보다가 싸움이 났고 사돈의 팔촌 아들이 교통사고가 났고 누가 누구를 만나는데 그 만나는 사람 차가 중고차 시장에서 싸게 산 비엠더블유더라 이런 이야기들은 화자를 평가하게 만듭니다. 그게 뭐가 어쨌다는 것인가... 이야기가 이야기로서 기능하려면 어떤 기본적인 조건들이 필요합니다. 삼국지는 어떻게 이야기로 기능할까요. 우리의 작은 세계보다 훨씬 더 장대한 세계를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범인이 아닌 초인들, 초인들이 건립하는 국가, 그 국가를 움직이는 지략 혹은 인망... 개츠비도 마찬가지죠. 매일 호화찬란한 파티를 벌이고 시장에 갱스터에 영화배우에 재벌들이 나옵니다. 그렇지만 이것만으로 이야기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규모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들이 인간 내면을 향한 통찰과 사유를 유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흥미로운 사건 사고를 떠드는 정보의 조각으로만 떠돌게 됩니다. 그 정보들을 연결했을 때 어떤 세계가 생겨나고 이야기 속의 사람들이 이야기 바깥의 사람들과 어떻게 이어지는가. 많은 조건들을 초월하는 보편적 인간성의 공유라는 지점을 담지 않으면 작은 세계에 대한 통찰은 지리멸렬한 가십이 됩니다. 세상 모든 타블로이드는 딱 하나의 목표를 지향합니다. 세계의 변화와 성장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하는 자신들에 대한 관심입니다. 남의 이야기를 할 테니 나를 봐줘! 조금은 슬픈 욕망입니다.


세계 안에서 자리를 꿰차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자기가 들어갈 수 있는 세계를 질투하고 억지로 내려다보려는 대신 세계 안에서 자신의 세계를 만들고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자기 이야기를 하면 됩니다. 어떤 논쟁이 있으면 그 안에 끼어들어서 자기 의견을 개진하면 되고, 어떤 이슈가 있으면 그에 대한 입장을 명료하게 펼치면 됩니다. 아무튼 보따리를 펼치면 되는 것입니다. 인터넷 세계는 그 보따리 펼치기가 되게 쉽고 기회가 평등한 곳입니다. 그냥 논리와 근거를 맞춰서 적당히 재미있게만 쓰면 되니까요. 인터넷은 궁극적으로 소통을 위한 공간이고 관계맺음을 실현하는 곳입니다. 삼국지나 그리스 신화는 영웅이라는 조건이 있어야 하지만 여기서는 안그래도 됩니다. 그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둘러싼 작은 세계를 분석씩이나 하고 있을 필요가 없죠.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것보다 훨씬 재미있고 의미가 많은 이야깃거리가 가득한 세계잖아요. 원래 세계가 좁은 사람들에게는 그게 힘들어서 자꾸 작은 세계에 갇히고 그 세계의 표면을 정신없이 흝어대는 우물 안이라는 저주에 빠질지도 모르겠지만.


사람 사이의 관계가 곧 생존과 사회적 존속에 연결되는 정치판이라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하는 일도 다르고 만날 일도 거의 없고 그저 생각과 말빨을 나누는 작은 커뮤니티에서 별 거없는 사람들을 띄워주면서 그걸 레슬링판처럼 꾸며줄 필요는 없겠죠. 아마 그렇게 남의 이야기에서 의미심장한 캐릭터로 등장하는 사람들은 어리둥절해할 것입니다. 난 그냥... 놀고 살고 있는데...? 한편으로는 좀 이해해줘야 할 인간의 본능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커뮤니티를 가니까 아프리카 인방의 비제이들이 서로 사귄다 싸움 났다 저격했다 이러면서 막 판세를 분석하고 있더라구요... 그게 재미있나 봅니다. 그런 거라면 더 정교하게 짜여진 픽션을 보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지만 우리에게 타인의 좁은 세계를 깨트려줄 방법은 많지 않습니다. 자시 자신의 세계를 깨트리고 넓혀가는 것만 해도 바쁘니까요. 그러다보면 어느새 누군가의 이야기에서 등장인물로 데뷔를 하기도 하는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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