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말씀

2020.10.18 18:11

어디로갈까 조회 수:1055

카톨릭 신도가 아님에도 일 년에 한두 번 마음이 심산할 때 성당에 가 미사에 참례합니다. "미사가 끝났으니 이제 세상으로 나가 복음을 전합시다"는 신부님의 말이 마음에 얹힐 때 열리는 환한 세상이 좋아서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바람은 여일하게 조용히 불지만 그 속에는 돌이킬 수 없이 변해버린 무엇인가가 담겨 있기 마련이죠. 언제나 그것이면 족했습니다. '한 말씀만 하소서. 내 슬픔이 나으리이다.'

닷새 전, 고딩 때 저를 많이 예뻐해주셨던 은사님이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고통의 끝판이라는 췌장암이었다고 해요. 고 1때 담임선생님이었고 국어 담당이셨어요. 단아하고 고운 모습에다 수녀원에서 유기서원까지 받은 후 환속한 분이라는 게 알려지면서 신비로운 이미지가 더해져 교내에서 인기가 높았던 분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수업을 듣던 첫 어버이 날, 우리에게 부모님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오라는 과제를 내셨더랬어요. '아, 싫어라~'라는 기분으로 괴발개발 써서 제출했는데, 다음날 종례 때 저를 콕 찝어 교무실로 부르시더군요. 그날 교무실에서 벌 서는 자세로 선생님에게 들었던 놀라운 한 말씀. "부모님에 대한 이토록 아찔하고 멋있는 글을 난생 처음 읽어봤단다." (그 말씀에 에?  갸우뚱~ 했던 느낌을 지금도 기억해요. - -)
 
미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누구나 선생님의 그 '한 말씀'과 같은 무엇을 기다리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말씀 말이란 우리가 이정표 삼아 걷다가 지나쳐온  모든 순간들을 의미해요. 더 이상 말이 아닌 무엇이 될 때에야 완성되는 것, 그것이 한 말씀입니다. 그 말 너머에서 비로소 꽃은 피고, 사람들은 걷기 시작하며,  마주보는 얼굴들은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섬광이며 암흑인 한 말씀은 언젠가 제 안의 A가 닫고 나간 문이며 또 제 안의 B가 열고 들어왔던 문입니다. 되돌이킬 수 없이 삶을 변화시키는 계기들은 모두가 하나씩의 한 말씀인 것 아닐까요. 한 말씀 이후에도 여전히 '말'이 부족하다는 생각 또한 하나의 말씀일 것입니다.
많고도 다양한 한 말씀들을 모두 모아 하나의 얼굴로 보고자 할 때, 사람들은 불현듯 무릎을 꿇고 기쁨과 절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한 말씀들로 가득찬 삶이란 결국 우리가 살아왔고 살아갈 시간들이지만, 그것은 애초에 얼마나 아름다운 긴장이며 또 얼마나 흔적없이 위대했던 것일까요.

덧: 선생님은 평생 비혼자로 사셨어요. 팔순 노모가 장례를 주관하셨는데, 아침에 이런 문자를 받았습니다. " 학창시절 네가 쓴 글들을 ##이가 다 보관해뒀으니 언제든 와서 가져가시게." 
여태 심장이 쿵쿵 내려앉고 있어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6424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5017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3996
114067 세계여자배구선수권 한일전 보시는분 없나요? [3] 황재균균 2010.11.09 1248
114066 (깨달음) 내가 중2병에 빠지지 않았던 이유 [5] 파라파라 2010.11.09 2560
114065 G20 경제효과가 450조????? [15] magnolia 2010.11.09 2704
114064 문득 추억 하나 [2] 닥호 2010.11.09 1052
114063 [바낭자랑] 아이폰 받아왔어요! 유후! [10] 로즈마리 2010.11.09 1862
114062 Braid 라는 게임 해보신분 계신가요?(게임 스포일러) [4] 윤보현 2010.11.09 1406
114061 통계로 본 남녀의 적 [5] 푸케코히 2010.11.09 2502
114060 고양이 시체 어떻게 처리하나요 [14] like5078 2010.11.09 6464
114059 혀에 휩싸인 그 어릿 광대의 세 아들들에 대하여 [4] 쥐는너야(pedestrian) 2010.11.09 2730
114058 잭블랙의 걸리버 여행기 [6] 자두맛사탕 2010.11.09 1883
114057 여러 가지... [14] DJUNA 2010.11.09 3361
114056 [듀나in] 문화싸이트 and MP3 추천 희망요 ! [4] sent & rara 2010.11.09 1136
114055 영화 '하녀'에서 하녀역을 주증녀라고 소개한 신문사.. [4] 지루박 2010.11.09 2577
114054 [듀나in] 공주 마곡사 근처의 맛집과 찻집을 아시나요? [1] 낭랑 2010.11.09 3700
114053 듀게분들은 모터스포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10] 이름없엉 2010.11.09 1450
114052 지금 듀게에서 나타나는 에러... [6] nishi 2010.11.09 1692
114051 [초바낭] 11월 11일 11시 11분 11초 - 5개의 11인가 10개의 1인가 [7] soboo 2010.11.09 1756
114050 듀9] 포토샵 [7] 응응응예예예 2010.11.09 1473
114049 성경 왜곡의 역사 - 바트 어만 [5] catgotmy 2010.11.09 1843
114048 조금 웃기는 광고 [2] 가끔영화 2010.11.09 1559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