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딩 시절, 한글을 제대로 공부해볼 요량으로 학교 도서관에서 <한국 신화> 시리즈를 찾아 읽곤 했습니다. 그 전집 어느 편엔가 나온 한 남자가 기억의 수면 위에 떠올라 있어요. 
그는 이 세상 모든 것에 미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죠. 선인이 그에게 돈 천냥을 주면, 시장에 가서 반나절만에 함부로 다 써버리고 터덜터덜 빈손으로 돌아옵니다. 선인이 놀라면서 다시 돈 만냥을 주지만, 역시 하루만에 동내버리고 빈털털이가 되고 말아요.
그는 그저 게으름뱅이에 타고난 허무주의자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심상치 않은 면모였죠. 남자의 이상한 생활 패턴에 골똘해진 선인은 그에게 특별한 기회를 주기로 결정합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아름다운 여인과 사랑을 나누게 도와주고 그리하여 그는 예쁜 아이를  둘이나 가지게 돼요. 그래도  그는 여전히 바깥으로 돌았습니다. 돈의 마력에도 녹아나지 않았고 쾌락의 극단에도 물러지지 않았으며 자신을  닮은 생명의 신비에도 눈감았습니다.

마침내 지켜보던 선인이 다시 등장해서 그의 부를 회수하고 아내를 이유없이 떠나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래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어요. 다만 둘째 아이의 가랑이가 속절없이 두쪽 나려고 했을 때, '아아~ ' 라고 짧게 비명을 질렀을 뿐입니다. 
그에게도 드디어 미련이라는 것이 생겼던 걸까요? 그 짧은 비명과 함께 그가 선인에게 부탁한 것은 '재생'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아내가 돌아오고, 이미 두쪽 난 아이가 포동포동한 살을 뽐내며 되돌아오는 것. 즉 거부의 삶을 마감할 것을 맹세합니다.
선인은 고개를 가만히 저으며, 그러나 미소를 머금고 그에게 물었어요.
"너는 왜 마지막 집착을 떨쳐내지 못하느냐?"
"저에게는 본래 집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를 닮은 아이에 대한 기억이 새록새록 자라나는 건 막을 수 없군요."

그 남자는 그후로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지만, 그건 일반적인 평범한 삶에 다름아니었습니다. 굳이 구별해보자면 익명의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야기의 끝부분이 기억 안나는데, 아마 그는 평범한 사람보다 더 평범한 사람으로 그냥저냥 사는 걸로 이야기가 끝났던 것 같아요. 우리말에 '나중 된 사람이 더 된다'는표현이 있는데 그것과는 다른 평범함이었어요.

2.  누군가가 기록한 -이라고 쓰고 도촬이라고 느끼는-  저의 영상 두 점이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걸 한달 전쯤 알게 됐습니다. 그때부터 이 남자의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맴맴돌고 있어요. (무슨 연관성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하나는 3년 전 밀라노에서 PT했던  50분을 전체 촬영한 것이고, (계단식 강당에서 70명 정도 참석했던  대규모 PT) 다른 하나는 한겨울에 샬랄라 드레스를 입고 친구 결혼식에 둘러리 섰던 장면을 촬영한 것이더군요. 두 게시자의 아이디가 다릅니다. (구글 아이디는 한 사람이 몇 개라도 만들 수 있으니 같은 사람일런지도.) 조횟수는두 영상 다  이백 명 근처고 댓글은 하나도 안 달렸더군요.

제 한글 이름은 평범하지만 영문으로는 알파벳 둘을 살짝 뒤틀어 표기한 희귀한 이름입니다. 온라인에서 저는 주목받을 일 없는 익명의 존재인지라 한번도 그 이름을 검색해보지 않았어요. 근데 한달 전쯤 동료가 유튜브에서 제 이름을 검색했더니 그런 영상이 올라와 있더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굉장히 의아했죠. 영상을 찍고 올려놓은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알고 싶지 않기도 하고 양갈래의 마음입니다.
그 영상 아래에다 누구냐?고 댓글을 달아볼까 하다가 모른 척 가만히 있는 게 익명의 존재로 남는 길인 것 같아서 무시하고 있는 중입니다.

니체의 주장에 의하면 잊는 것도 일종의 재능이고 그 뛰어남의 끝은 결국 신성성에 가닿게 되는 법이라죠. 뒤끝없이 망각해주는 것이 신의 근처까지 가는 능력인데. 인간은 기억과 집착 때문에 초월하지 못하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건강하게 잊을 줄 아는 동물이 인간보다 앞선 존재라고도 했죠.

covid- 19를 필두로 정치계며 집값 문제며 뒤숭숭한 요즘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이미 한 재앙이 다른 재앙으로 잊혀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재앙들끼리 경쟁하는 시대임을 절감해요.
제 영상 두 개가 유튜브를 떠돌고 있는 것 정도는 눈감고 망각해버리는 게 재앙의 경쟁에서 건강하게 살아남는 방법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드는데 어리석은 판단일지 어떨지... (?!)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6566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5105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4493
113180 Detroit become human을 하고 싶었는데 [6] 산호초2010 2020.08.19 496
113179 Ben Cross 1947-2020 R.I.P. 조성용 2020.08.19 248
113178 표현의 자유와 기안 [15] Sonny 2020.08.19 1515
113177 자격증 컬렉터 [11] 칼리토 2020.08.19 834
113176 ‘100명 규모’ 믿었다 [3] 사팍 2020.08.19 933
113175 미분귀신을 만나서 [5] 어디로갈까 2020.08.19 777
113174 헬보이 리부트, 기대(?)보다는 괜찮았지만 [1] 노리 2020.08.18 406
113173 호텔 행사 또 줄줄이 취소 되네요 신천지 교훈을 잊었는지? [3] 하아 2020.08.18 1111
113172 저는 지금 플라이트 시뮬레이터를 다운로드 중입니다. [3] Lunagazer 2020.08.18 466
113171 오늘의 잡담...(거짓말과 대중의 속성) [2] 안유미 2020.08.18 712
113170 [조국 기사 펌]검찰이 유도하고 조장한 "고대논문 제출" 허위 보도 [48] 집중30분 2020.08.18 1387
113169 남산의 부장들을 넷플릭스에서 보았습니다 [13] Sonny 2020.08.18 1108
113168 You 1 시즌 [6] daviddain 2020.08.18 408
113167 요즘 본 영화들에 대한 짧은 잡담... [2] 조성용 2020.08.18 678
113166 두사람 누구일까요 [7] 가끔영화 2020.08.18 450
113165 (바낭) 전광훈의 꽃놀이패 [8] 가라 2020.08.18 1107
113164 [영화바낭] 올해 나온 블룸하우스 영화 헌트(The Hunt)를 재밌게 봤어요 [8] 로이배티 2020.08.18 658
113163 대물, 복학왕, 지은이, 현실 [42] 겨자 2020.08.18 1785
113162 이토준지의 인간실격 보신 분? [3] 하워드휴즈 2020.08.18 857
113161 [넷플릭스바낭] 그동안 열심히 보던 '리타'의 마지막 시즌을 끝냈어요 [8] 로이배티 2020.08.17 559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