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때는 보다 중요한 것들을 믿었습니다, 학문, 혁명, 사랑, 예술, 그런 것들. 안다고 이런 것들을 빼고 나면 삶에는 재밌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었죠. 

 

어렵다는 책들이나 난해하다는 영화들을 보고, 시간을 견뎌 냈다는 기쁨과 보람을 느꼈습니다. 미술관에 가면 작품 앞에 서서 시간을 보내며 폼도 잡았었네요.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라 작품 하나를 쳐다 보며 이런저런 책의 구절들과 영화의 장면들에 맞춰 나가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20 말이 되면 5 언어 정도는 하게 되리라고도 생각했었습니다. 라틴어니 불어니 독어니 그런 것들을 취미랍시고 공부했고, 그게 너무 서구 중심주의적인 같아 동남아에서 많이 쓴다는 말레이어를 공부하겠노라는 다짐을 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내게 특출난 재능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세상에 이렇게 위대한 것들이 많으니 그것을 좇으며 살면 좋은 삶을 사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었죠. 부나 명성에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위대한 것을 좇는다, 그런 거요.

 

지금도 보다 중요한 것들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학문, 혁명, 사랑, 예술, 그런 것에 돈 보다 큰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지금 꾸는 것은 따뜻한 바닷가의 선베드에 누워 마시는 맥주 잔이나 차를 몰고 교외로 나가 캠핑을 하며 마시는 커피 잔이지, 이상 위대한 것을 좇는다며 곯으며 하는 모험이 아니네요. 어떻게 보면 나의 20대는 나의 삶이 아니라 내가 되고 싶은 미래의 나를 흉내내며 보낸 시기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술을 좋아한 것이 아니라 예술을 좋아하고 예술을 이해할 미래의 나의 모습을 꿈꾸며 꿈을 실현하기 위해 예술을 감상하며 보낸 것이고, 공부도, 사랑도 마찬가지고요. 유치한 사랑 노래가 사랑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자신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는 노래인 것처럼 내가 공부와 예술과 혁명과 사랑 운운 했던 것은 그것을 논하는 모습이 멋져 보였기 때문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런 것이 무엇인지 아무 것도 모르면서 없이 뛰어들 있었던 같아요.

 

30대인 지금은 내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내가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다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삶은 내가 좋아하는 일과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을 하며 먹고 사는 것만으로도 버겁네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진짜 쉬기만 있는 시간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도 이제야 알겠고요. 무엇보다 이제 학문도, 혁명도, 사랑도, 예술도 그렇게 매혹적이지 않습니다. 학문과 예술을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친구들을 보면서 이젠 학문이나 예술도 누군가에겐 밥벌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 사랑의 소중함은 가족의 소중함이 되었고, 이젠 혁명이 아니라 세계가 부디 보다 관리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되었죠.

 

그래도 여전히 노력을 합니다. 지금까지 배운 가지 언어를 까먹지 않고 계속 쓰려고 노력하고 있고, 얼마 전에는 새로운 언어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전히 글을 읽고, 종종 글을 쓰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미술관에 가고, 이젠 돈이 있으니 공연도 보러 다닐 있게 됐습니다. 대학 친구들을 만나면 요즘도 가끔 학문이니 예술이니 정치니 하는 주제가 술안줏거리가 됩니다. 하지만 그저 뿐입니다. 재밌는 것이 딱히 없어 시간을 이렇게 쓰는 것일 , 내가 이렇게 시간을 쓴다는 사실에서 아무런 특별한 가치도 느끼지 않아요. 다른 중요한 일이 생기면 기꺼이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30대가 되고 나서 좋아진 것은 자신에게 보다 솔직해 졌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많이 읽고, 많이 보고, 많이 듣는 것이 중요했거든요. 남보다 똑똑하고 멋진 사람이 되고 싶었죠. 지금은 재밌게 읽고, 재밌게 보고, 재밌게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 이제라도 정신차려 다행이다, 20대의 나는 났었구나, 이렇게 생각합니다만, 문제는 30대가 뒤로는 읽고, 보고, 듣는 재미가 예전만 못하고 심드렁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아이를 가질 준비가 되어 있다고 느끼는 것은, 나에겐 이제 심드렁하기만 세상 만사에 매혹을 느낄 존재를 세상에 새로 들이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닐까, 어쩌면 아이를 가지고 아이에게 애정을 갖게 되면 나도 아이의 눈을 빌려 세상을 조금 재미있게 경험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종종 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낳으면 무척 힘들다던데 어쩌면 아이를 키우느라 지금 내가 심드렁하게 하고 있는 것들을 하기가 어렵게 되면, 그것들에서도 다시금 새롭게 소중함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싶네요. 물론 이런 것도 아이를 낳아도 괜찮지 않을까, 라고 막연한 공상이나 하고 있기에 있는 한가한 소리겠죠. 진짜로 아이를 낳으려고 생각하면 임신은 있을지, 무사히 낳을 수는 있을지, 내게 아이를 제대로 키워 능력이 있긴 할지, 그런 것을 걱정해야겠지요.

 

이렇게 늙어가는 건가 싶어 청승을 떨어 봤습니다. 원래 반말로 일기처럼 썼었는데 게시판에 올리려 높임말로 바꾸니 배는 오그라드네요. 주의 요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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