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호의 결투

2023.10.30 16:44

돌도끼 조회 수:189

1970년 왕우 감독 작품.
원제는 [용호투]이고 국내 개봉제목은 [용호의 결투]입니다.


원래 무슨무슨 결투 운운하는 건 서부영화에서 단골로 쓰던 제목이죠. 국내에 무협영화가 상륙할 무렵 최고의 오락물로 군림하고 있던 게 이태리제 서부극이었던 터라 그때 쓰던 작명법을 무협영화에도 그대로 썼습니다.
그래서 [대취협]이 [방랑의 결투], [금연자]가 [심야의 결투], [용문객잔]이 [용문의 결투] 이렇게 결투 시리즈(?)가 죽 이어지다 [용호의 결투]까지 와보니, [방랑의 결투]나 [심야의 결투]같은 경우는 제목이 원제와도 영화 내용과도 좀 거리가 있었습니다만 꾸준히 결투를 밀어붙인 결과 [용호의 결투]는 원제와 딱 맞아떨어지게 되었네요. (어쩌면 홍콩에서 한국 영화업자들을 배려해서 제목을 붙였을지도...?(클라이맥스 장면을 한국에서 찍기도 했고...)ㅎㅎ)


쿵후영화 팬덤에서는 최초의 현대쿵후영화로 간주하고있는 작품입니다. 이 영화 이전에도 (관덕흥의 황비홍 영화라든가) 쿵후영화라 할 수 있는 영화가 없었던 건 아니고 쿵후영화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지만, 이 영화 나오기 직전까지 맹렬히 유행하고 있던 '칼든 사람들이 허공을 막 날아다니던' 무협영화와는 색깔이 확연히 달라 구분이 되기도 하고, 쿵후-플로이테이션 영화로서는 최초의 작품이 맞을 것 같습니다.

시대적인 요구가 있었죠. 칼싸움 무협영화는 보통은 명나라 이전을 배경으로 하는 시대극이라 그에 따라 소품비 의상비 등의 기본적인 지출로 인한 제작비 부담이 있었고... 경제도 어려운데 제작비 좀 줄여볼까 하는 고심끝에 나온 아이디어가, 시대를 근대 이후로 옮기고 칼 대신 맨손을 쓰는 영화를 만들어보자는 거였다고 합니다. 최소한 도검류 소품을 관리하는 비용은 줄어들겠죠.

장철이 총대를 메고 시범삼아 [복수]를 만들었습니다. [복수]는 완전한 맨손싸움 영화는 아니고, 장검에서 단검으로 무기를 바꾼, 무협영화와 권격영화의 중간단계에 있는 영화였습니다. 체감상으로는 권격영화쪽에 더 가깝죠. 결과는 초대박.
그리고 나서 진짜로 맨손을 쓰는 영화인 [용호의 결투]가 나와 역시 초대박을 치면서, 사람들의 관심은 도포자락 휘날리며 장검을 휘두르는 사람들에서 핫바지 입고 맨주먹으로 사람을 패는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다음 해에 이소룡이 등장하면서 완전히 게임 셋.

[용호의 결투]는 처음엔 장철에게 연출의뢰가 갔던 기획이라고 하는데 도중에 장철은 빠졌다고 하고, 주연배우인 왕우 생각에 자기가 감독까지 하면 연출료까지 따로 챙길 수 있을 것 같아 직접 감독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당시 쇼부라다스 정책상 '천황거성' 왕우도 전속 배우 자격으로 월급받고 일하고 있었다고 하거든요. 뭐 다른 배우들보다 더 잘해주기야 했겠지만, 천황거성의 명성에 걸맞는 대우를 받고있다는 느낌은 아니었겠죠. 결국 이런 저런 불만이 쌓여 왕우는 이 영화 찍고 얼마 안있어 쇼부라다스를 떠납니다.



영화의 주제는 일본무술과 중국무술의 대결. 일본에서 쳐들어온 가라데 고수들을 중국 권법으로 물리치는 이야기입니다. 배경은 대략 중화민국 초기인 듯 하고... 국술, 교련등 현대적인 어휘들이 나옵니다. 뜬구름잡는 무협 환타지에서 벗어나 좀 더 현실적인 영화를 지향한다는 거겠죠.

재미있는 것은, 아마도 적을 치켜세움으로서 그걸 물리치는 주인공을 더욱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였겠지만, 이 영화가 은근히 중국무술을 디스하고 있다는 겁니다.
영화속 주인공의 사부님은 가라데가 중국 무술에서 파생되어 나온 거긴 해도 오랜 기간 독자적인 진화를 하고 실전성을 더해서 엄청 파워풀한 무술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니까 중국 무술이 실전에 도움이 안된다고 스스로 고백하는 거죠ㅎㅎ. 그리고 곧이어서 진짜로 가라데 고수들이 찾아와서는 중국무술 도장을 그냥 갈아버립니다.

일본인들이 악역으로 나오면서도 나중에 나온 영화들에 비하면 비교적 덜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해요. 70년대 홍콩 영화에 일본넘은 세상에 나쁜짓이라는 나쁜짓은 빼놓지 않고 다 하는 절대악으로 나오는데 여기서는 온갖 나쁜짓은 중국인 악역이 하고 있고, 같은 악역이라도 품위없는 짓거리는 중국인 악역의 몫이고 일본넘들은 개폼잡는 역할. 생명을 경시하는 자들이긴 합니다만.

가라데에 대항하는 중국 무술의 자존심은 철사장과 경공.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가라데는 실제로 현대에 실전 무술로 애용되고 있지만 철사장과 경공은 무협지를 기반으로 하는 환타지 무술이라는 거죠. 철사장 비슷한 수련법이 실제로 있긴 해도 굉장히 비효율적인, 몸이 더 축나는 수련법이고, 그거 수련한다고 해서 이 영화에서처럼 손가락으로 사람 몸에 구멍을 뻥뻥 뚫고 그러는 건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결국 현실의 중국무술로는 가라데를 못이기는 거예요. 뭐 이 영화 만든 사람들이 거기까지 생각해보지는 않았을 것 같지만요.ㅎㅎ

그래서 이 영화는 무협 환타지에서 벗어난 좀 더 현실적인 영화를 지향하긴 했어도 아직은 그 테두리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가라데의 위력도 상당히 과장되어 있어 뭐든 스치기만 하면 박살-수준으로 나오고... 그러니 [용호의 결투]도 아직은 과도기적 작품이고, '진짜' 쿵후영화는 이소룡에게서 시작한다고 봐야겠죠.(그 이소룡의 첫 쿵후영화인 [당산대형]에도 맨손으로 사람 몸 뚫는 게 나오니까요 뭐...ㅎㅎ)

장검을 들고 싸울 때에 비해 맨주먹으로 싸우는 게 리치가 훨씬 짧아지니 그만큼 속도감과 박진감이 올라가게 되고 더 자극적으로 느껴지게 되죠. 도시에 사는 현대인은 검 같은걸 실제로 구경할 일도 거의 없지만 주먹싸움이라면 훨씬 더 현실적으로 느끼게 되고, 영화속에 나오는 그 말도 안되는 수련장면들을 따라하면 나도 그런 고수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환상에 젖게 되잖아요. 그러니 권격 영화가 인기를 끌지 않을 수가 없겠죠.



[용호의 결투]가 없었다고 해도 결국 맨주먹 싸움 영화가 나오기는 했겠지만, 그걸 맨처음 한게 왕우라는 겁니다.

지금 보면 영화가 낡기도 했고 이런저런 문제점들도 있고 까려고 들면 엄청 많은 건수가 있습니다. 괴작 취향인 사람들이 아니면 오글거려서 못볼 영화일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나왔던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영화였고, 지금의 기준을 들이대서 무시할 수 있는 영화는 아닙니다. 이 영화가 스타트를 성공적으로 끊었기 때문에 우리가 아는 쿵후영화라는 장르가 번성할 수 있었던 거고, 이소룡, 이연걸, 견자단 같은 사람도 나올 수 있었던 걸테고...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영화들도 많아서, [당산대형]으로 성공적인 신고식을 치룬 이소룡이 본격적으로 각잡고 만든 첫 작품인 [정무문]은 [용호의 결투]의 데드카피라고 할 수 있는 영화이고... [용호의 결투]의 스토리 구조나 장면들을 모방한 작품은 수도 없고, 90년대에는 주성치 영화의 패러디 재료로도 활용됩니다. 그니까 뭐 쿵후영화/홍콩영화 팬이면 교양삼아서라도 알아두면 손해보지는 않을...지도...ㅎㅎ



전설처럼 전해오는 이야기로, 이 영화 나올 당시에 미국에 있던 이소룡이 차이나 타운에서 [용호의 결투]를 봤다고 합니다. 왕우는 운동선수 출신에 스트리트 파이트로 단련된 실제 싸움꾼이었다고 합니다만 무술 전공자는 아닙니다. 당시 일반관객들이 보기에는 충분히 무림고수처럼 보였지만 이소룡은 왕우의 무술실력이 별볼일 없다는 걸 바로 간파합니다. 영화를 본 이소룡은 'Siva 내가 해도 이거보다 잘하겠다' 하고는 박차고 일어서서 홍콩행을 결심하게 되었더라는.... 이 소문이 사실이라면 이소룡을 홍콩 영화판에 끌어들였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용호의 결투]는 중요한 영화가 되겠죠.ㅎㅎ


-일각에서는 이 영화의 진짜 감독은 오사원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왕우로선 처음하는 감독일이니까 도움 받은 사람은 있겠죠.

-대충 20년쯤 전에 셀레스챨에서 리마스터판 DVD가 나왔습니다. 원래 부터 이름높은 클래식이었어서 리마스터에 대한 기대가 높았지만 출시된 후 팬들 사이에서 아주 대차게 욕을 먹었습니다. 5.1채널 리마스터라는 미명하에 영화의 소리를 완전히 조져놓는 바람에.... 심지어 국내 잡지에 실린 평론가의 DVD 리뷰에도 사운드가 오버의 극치라는 코멘트가 실렸을 정도...
다행히도 (근래에 해외에 출시된) 블루레이는 오리지날 모노 사운드를 복원한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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