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머 호러는 처음 나올 당시만해도 대단히 컬러풀하고 신선하고 자극적인 영화였습니다. 그치만 뭐 10여년쯤 지나고 보니 그 신선했던 해머 호러도 매너리즘에 빠진 올드한 영화가 되어버렸습니다.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끼고 있을 즈음, [용쟁호투]라는 영화가 갑툭튀합니다.
쿵후영화, 아시아 일부지역에선 이미 흥하고 있는 장르였지만 그외 지역, 특히 서양에서는 진짜 이전까지 듣도보도 못한 새로운 영화였죠. 그 임팩트가 너무 강렬해 [용쟁호투]의 주인공 이소룡은 신화가 되었고 세계적으로 쿵후붐이 불게됩니다.

그걸 본 해머의 높으신 분이 '우리도 이런거 함 만들어볼까....'라는 생각을 하게되고, 바로 홍콩으로 가서는 쇼부라다스의 소씨 형제들과 상의를 해 양측은 두편의 합작 영화를 만듭니다. 적룡이 나오는 [섀터]와 강대위가 나오는 [7 황금 흡혈귀 전설](중국어 제목으로 [7금시]).

이중에 [섀터]는 현대 배경의 첩보물이라 해머 브랜드와 바로 매치가 되지는 않는 영화이지만, [7금시]는 해머가 자랑하는 드라큐라 시리즈의 9번째 작품입니다.
호러 영화의 대명사인 해머와 쿵후영화의 대명사인 소씨가 합작해서 만든 하이브리드, 세계최초의 호러 쿵후영화입니다. 장르팬이라면 이 사실만으로 환장...관심이 쏠릴 영화죠.

해머와 소씨가 제작비 반띵해서 홍콩에서 촬영했다고 하고 74년에 공개되었습니다.


해머 드라큐라 영화 중에선 처음으로 제목에 드라큐라가 들어가지 않는 영화이자 처음으로 크리스토퍼 리가 드라큐라로 나오지 않는 영화입니다. 뒤로 갈수록 품질이 저하되는 드라큐라 시리즈에 이미 정나미가 떨어져있던 리 선생님은 결국 이 영화 대본을 보고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때려치웠다고 합니다. 그리곤 친구인 피터 쿠싱 선생님께도 출연하지 말것을 적극 권장했지만 당시 심리적 안정이 필요했던 쿠싱은 '홍콩 관광가는 셈치고' 영화를 찍었다고 하네요.

감독인 로이 워드 베이커는 홍콩 영화계의 다른 환경과 작업방식 때문에 촬영도중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홍콩에선 영화촬영현장에서 아예 대사녹음을 안한다는 걸 알고는 충격을 받기도 했다고...ㅎㅎ 특히나 액션 장면은 감독이 아니라 무술감독이 전권을 가지고 연출하는 홍콩영화 방식 때문에 액션을 연출한 유가량/당가와도 사이가 좋지는 않았었다고 하고요.

아옘디비를 비롯한 해외 데이터베이스에는 공동감독으로 장철의 이름도 올라있습니다. 장철이 홍콩 공개용 액션장면을 따로 찍었다는 소문도 있고요. 뭐... 영화에 나오는 액션이 살짝 장철 분위기가 나긴 해요. 그치만 유가량/당가가 장철의 (사실상) 전속 무술팀이었으니 그리 이상할 것도 없고... 정작 홍콩쪽 기록이나 홍보물에는 장철의 이름이 안올라있는 것 같거든요. 그시기 홍콩에서 장철의 위상을 생각하자면, 장철이 관여했다면 대대적으로 홍보를 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싶은데... 확실한 건 모르겠습니다.
셀레스쳘의 쇼부라다스 리마스터 출시 목록에서 유럽과의 합작영화들은 대부분 빠졌기 때문에 지금 홍콩판을 구경할 방법도 없습니다.


이야기는 1804년, 한 중국 도사가 머나먼 트란실바니아까지 터벅터벅 걸어오면서 시작합니다. 이 도사는 한 시골마을에서 일곱구의 강시, 칠금시를 부리며 왕초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마을사람들 반격을 받아 쫓겨났답니다. 복수하기 위해 강시(=뱀파이어)의 왕으로 알려진 드라큐라의 도움을 받으려 먼길을 찾아온 거였습니다.
이말을 들은 드라큐라는, 유럽에선 너무 얼굴이 팔려서 운신이 어려워졌으니 자길 아무도 모르는 중국에 가면 편하게 살 수있을 거라 생각하고는, 도사의 신체를 빼앗아 중국으로 갑니다.

그리고나서 딱 백년이 지난 1904년, 흡혈귀 전문가이자 드라큐라를 퇴치한 걸로 유명한 반헬싱 선생이 중국에 강연을 하러 옵니다.

여기서 심각한 설정오류가 생기죠. 1804년이면 드라큐라가 유럽에서도 악명을 날리기 한참 전. 드라큐라가 유명해진 건 영국 가서 깽판쳤기 때문에고 반헬싱이 유명해진 건 그 드라큐라를 떄려잡았기 때문인데, 이 영화에선 드라큐라가 그보다 한참 전에, 아니 반헬싱의 나이가 한 120살이상 되는게 아니라면 그양반 태어나기도 전에 중국으로 가버린 겁니다. 그러니 이전작들에서 있었던 모든 이벤트를 다 엎고 리셋한 셈인데, 뭐 거기까진 문제가 아니더라도(이전에도 리셋했던 적이 있고), 이 영화 스토리가 반헬싱과 드라큐라가 서로 잘 아는 원수사이라는 전제로 진행된다는 겁니다. 간격이 백년인데 둘이 만날 일이 없는거잖아요. 아마 초기 각본과 최종 완성판 사이에 뭔가 아귀가 안맞게 되는 일이 있었나봐요.

메인 스토리는 [7인의 사무라이]의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나쁜놈들한테 시달리는 시골 마을을 구하려고 7명의 무사가 발벗고 나선다는 이야기. 근데 여기 나오는 7명은 다 형제간이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멤버들 모으러다닐 일은 없어서 상영시간이 절약됩니다.
7형제 중 첫째가 강대위. 나머지는 전부 당시에는 무명이었던 사람들입니다. 이사람들은 캐릭터 소개도 대~충하고는 개개인이 클로즈업 되는 일도 없고 대사조차 없어서 누가누군지 기억하기도 힘듭니다. 이왕이면 7명의 캐릭터를 좀 더 제대로 부각시켰더라면 좋았을텐데... 그저 액션이나 보여주라고 출연시킨, 거의 스턴트맨에 가까운 역할들입니다.

7명 말고 한명 더 있어요. (쇼부라다스에서 한때 포스트 정패패로 밀었던) 시사가 여동생역(서열이 몇번째인지는 모르겠음)으로 나와 서브 여주인공역도 겸하고 있습니다. 단검을 들고는 남자형제들과 같이 싸움에도 참여하고요. 그런데 시사도 유명 여배우이고 형제들 중 홍일점이라서 그나마 눈에 띄는 거지 대사가 거의 없기는 마찬가지예요.

각본이, 대사는 전부 서양 배우들한테만 주고 중국인 캐릭터중에 중에 말 좀 하는 건 강대위뿐입니다. 아무리 영국이 주도해서 만든 영어 영화라고 해도, 배경이 중국인데 중국인 캐릭터들에게도 역할을 좀 줬어야하지 않나 싶네요. 이 영화에서 중국인들이 하는 건 싸우는 것 아니면 괴물에게 당하는 역할뿐이라...

영화속에 나오는 괴물들은 영어 대사상으로는 뱀파이어, (몇마디 안나오는) 중국어 대사상으로는 강시입니다.
체계가 있는데 드라큐라가 대빵이고 그 아래에 간부급인 7금시. 그 밑으로 좀비처럼 보이는 잡몹(아마도 하급강시?)들이 있습니다. 얘들은 잡몹답게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머릿수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입니다.
7금시는 흡혈귀와 강시의 중간쯤 되는 존재인 것 같은데 외모는 살짝 강시같아 보이기도 하고 박쥐로 변하기도 하는 걸 보면 흡혈귀쪽에 더 가까운 것 같기도 하고...
강시라는 단어가 원래 뻣뻣한 시체란 의미라 일반적으로 강시가 허리를 굽히지 않고 반동으로 통통 튀어다니는 걸로 묘사하지만 여기 나오는 7금시는 아주 유연하고 운동신경이 좋아 펄펄 날아다닐 뿐 아니라 검술까지 구사합니다.

사실 해머 드라큐라 시리즈에 나오는 흡혈귀들이 스펙이 별로 좋지 않거든요. 흡혈귀의 초자연적인 능력들은 (아마도 제작비 문제로) 대부분 삭제해 버렸으면서 (표현하는데 딱히 돈이 들지 않는) 약점은 또 그대로 둬서... 별 대단한 능력도 없으면서 이런저런 제약만 많은, 지금 보자면 불쌍해 보이기까지 하는 존재였는데 7금시는 거기 비하면 기존에 알려진 흡혈귀의 약점들은 안보이고(있는지 없는지 확실히는 알수없습니다) 거기다 무술이라는 특수능력까지 갖추고 있으니 더 위협적이라고할 수 있고, 이전작들에 나왔던 드라큐라 보다도 더 쎄보입니다.

그래도 퇴치방법은 똑같아서 가슴에 말뚝을 박으면 없앨 수 있는데... 서양 흡혈귀 영화 주인공들은 어디선가 말뚝(혹은 대용품)을 구해오지 않으면 속수무책이지만 이 영화는 쿵후영화니까요... 강대위는 걍 맨손으로 뱀파이어/강시의 가슴을 뚫어버립니다.ㅎㅎ

앞서서 설정 오류 이야기도 했지만 그런 중대한 오류를 걍 내비뒀단 건 애초에 스토리에 신경을 안썼단 소리겠죠. 이야기가 구멍투성이예요. 뭐 구성이, 뚜렷한 할 이야기가 있다기 보다는 몇군데 장소를 옮겨다니면서 계속해서 싸움이 벌어지는 형식이라 액션장면 늘어놓기 위해 대충 스토리를 끼워맞춘쪽인 것 같아요.
적어도 엑조틱한 그림과 액션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을 끌어모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나보죠.

그나마 영화에 무게를 잡아주는 건 역시 쿠싱 선생님의 존재죠. 아무리 허접한 소리라도 이분이 근엄한 목소리로 읊어주시면 뭔가 그럴듯하게 들리는 효과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시리즈 전체에서 가장 강인한 모습의 반헬싱을 보여줍니다. 직전에 나온 작품들에서는 쿠싱의 개인적 사정과 건강문제로 힘이 많이 빠진 모습이었는데 이 영화에서는 횟불들고 칼든 괴물들과 몸싸움까지 벌입니다. 진짜 뱀파이어 슬레이어같은 모습.

반면에 드라큐라의 존재감은 약합니다. 영화 내내 도사의 모습(쇼부라다스의 악역 전문 배우 첨삼. 이분도 역대 드라큐라 역할 배우들 중 한분으로 인정해 줘야겠죠)으로 주로 나오기 때문에 본모습으로 나오는게 몇분 되지도 않습니다만.
크리스토퍼 리 선생이 나간 뒤에 역할을 물려받은 해머의 제 2대 드라큐라는 존 포브스-로버트슨입니다. 미안한 말씀이지만... 이 영화의 드라큐라는 유원지에서 분장하고 있는 아재같아 보여요. 전임자가 크리스토퍼 리이니 너무 가혹한 비교이긴 해도... 리 선생의 그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사람 쫄리게 만드는 그런 위압감은 없습니다.

결국 이 영화가 마지막 해머 드라큐라 영화가 되어버렸으니 이왕이면 리 선생께서 몇분 되지도 않는 분량, 인심써서 까메오로 나오는 셈치고 나와주셨으면 하는 아쉬움이 어쩔수 없이 들어요. 시리즈 마지막을 쿠싱과 리 두사람이 함께 했더라면...

뭐... 해머로서는 이걸로 끝내겠다고 작정하고 만든 건 아니었으니까, 이왕 크리스토퍼 리는 더 붙잡을 수 없게 되었으니 걍 포기하고 쿠싱에게 집중해서 반헬싱이 온세상을 돌아다니며 온갖 요괴를 때려잡는다는 방향으로 가려고 했다나봐요. 실현되었다면 몇십년 후에 유행하게될 소위 퇴마장르를 한참 앞서서 시작하는 게 되었을 것 같은데...
근데 그럴 생각이었으면 아예 이 영화에서부터 드라큐라는 빼버리고(제목에선 뺐잖아요) 걍 반헬싱이 중국가서 강시를 때려잡는 이야기로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싶네요.

한편 해머는 [7금시]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유럽을 배경으로 해서 칼든 주인공이 흡혈귀를 썰고다니는 [(캡틴) 크로노스]도 시리즈화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걸 보면 액션/무술 호러영화쪽에 진심이었던 것 같지만... 결국은 회사가 망했죠.

[7금시] 혹은 [일곱 황금 흡혈귀 전설]은 걸작 소리 듣는 영화는 아닙니다. 괴작이라는 말이 더 맞겠죠. 일단 괴상하고 특이한 영화란건 분명해요ㅎㅎ
워낙에 이질적인 내용이어서 그런지 해머 드라큐라 시리즈 팬들도 8편까지만 이야기하고 이 영화는 슬쩍 빼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오히려 무술영화 팬덤쪽에서 더 많이 거론될지도...?

이 영화는 적어도 홍콩 영화계에는 꽤 큰 족적을 남긴 것 같습니다. 해머와 합작한 경험 덕에 이후 쇼부라다스 호러의 질이 향상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고요. 무엇보다 쿵후와 호러 장르를 믹스한다는 아이디어는 이후에 홍콩에서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게되어 나중에 [귀타귀]나 [강시선생]으로까지 이어지죠. 글고 이 영화도 어떻게 보면 강시영화이기도 하고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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