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을 맞이하여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적은 글을 여기에도 올려봅니다.)

벌써 꽤 시간이 지났다. 지인이 올린 올해 마리 끌레르 영화제와 관련된 게시물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스톰 인사이드>라는 제목의 영화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 영화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여름날의 저녁 열시 반'을 원작으로 한다는 부분을 읽는 순간 나는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곧바로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결국 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여름날의 저녁 열시 반'은 어머니가 번역하신 소설의 제목이었기 때문이다.

'여름날의 저녁 열시 반'이라는 소설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나는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전혀 알지 못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얼마 후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모 집에서 명절을 보내던 나는 정말 우연하게도 책장에 꽂혀있던 '여름날의 저녁 열시 반'을 발견했다. 나는 그 책을 살펴보다가 '박인선 역'이라는 부분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박인선'은 바로 나의 어머니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동명이인인가 싶기도 했는데 책의 뒤 쪽에 아주대 교수라고 써 있는 것을 보고 이 소설의 번역자가 어머니인 것을 알았다. 울컥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는 그 책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서 '여름날의 저녁 열시 반'을 다 읽었다. 읽은 지 오래되어서 지금은 어렴풋하게만 내용이 기억나는데 쫓기고 있는 살인범과 한 여성의 내밀한 심리 묘사가 어우러지는 작품이었다. 서사의 전개보다는 무드가 중심에 있었다. 다소 관능적인 묘사의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이 책은 중앙일보사에서 출간된 것인데 '오늘의 세계문학' 시리즈 중 12번째 권이었다. 이 책에는 쥘리앙 그린의 '미친 사랑의 노래'가 함께 실려 있었는데 번역자는 어머니를 통해 나도 잘 아는 김동현 교수님이셨다. 책의 말미에는 어머니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작품 세계에 대해 쓰신 글도 실려 있었다. 나는 그 글을 읽으며 감격할 수밖에 없었는데 내 기억으로 어머니 생전에 어머니가 쓰신 글을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나는 왜 어머니의 글을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었을까. 나는 그런 놈이다. 불효자였던 것이다. 어머니가 늘 누우셔서 책을 읽으시던 모습이 기억이 난다. 어머니는 책을 읽으시다가 졸리시면 스탠드의 불을 끄고 주무시곤 하셨다. 어머니와 함께 재미있게 보았던 MBC 드라마 중에 김원일 원작의 '마당 깊은 집'이 있었는데 그 원작 소설이 집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번도 읽지 않았다. 내가 평소에 영화에만 미쳐 있었지 책을 가까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머니의 글을 읽을 생각을 하지 못 했던 것은 아닐까. 플로베르에 관한 어머니의 석사 논문도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야 발견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번역하신 '여름날의 저녁 열시 반'은 집에 없었다. 고모 집에 있던 책이 원래 어머니가 가지고 계시던 거였을까. 고모에게 물어보지는 않았었고 그 책이 집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 아직까지는 알지 못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야 어머니가 번역하신 책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다니 이 무슨 영화 같은 일이란 말인가. 이런 류의 이야기를 영화 속에서 많이 보지 않았던가. 내가 마치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 든다. 어머니가 뒤라스를 좋아하셨다는 사실에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에 보았던 어머니를 떠올려보면 어머니가 뒤라스를 좋아하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의 세계문학' 12권의 앞쪽에는 뒤라스와 관련된 사진들이 실려 있었는데 뒤라스가 연출한 <인디아 송>, <나탈리 그랑제>를 비롯한 영화들과 관련된 것들도 있었다. 인디아 송. 나에게도 친숙한 이름이다. 내가 뒤라스를 좋아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작품이다. 지금도 흥얼거릴 수 있는 주제곡의 그 멜로디, 델핀 세리그의 우아한 자태, 시종일관 관능적인 그 무드... 처음에는 잘 알지 못했으나 몇 년 전에 이 영화를 다시 봤을 때 감각의 측면에서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같은 감독의 미학을 선취한 대단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관능적인 작가를 어머니가 좋아하셨다니 나에게는 솔직히 정말 충격이었다. 나는 어머니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후회가 파도같이 밀려온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을 때 왜 어머니와 문학에 대해서 진지한 대화를 한번 할 수 없었을까. 대화를 나누다가 보면 자연스럽게 뒤라스에 대한 얘기가 나올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럼 '여름날의 저녁 열시 반'에 대해서도 알게 되지 않았을까. 영화를 좋아하셨던 어머니와 <인디아 송>에 대해 즐겁게 대화를 나눌 수도 있지 않았을까. 어머니는 왜 나에게 '여름날의 저녁 열시 반'의 존재에 대해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을까. 영화를 좀 덜 보더라도 어머니와 대화를 더 많이 나누고 어머니와 같이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었는데 너무 후회스럽고 아쉽기만 하다. 영화가 나에게 별로 해주는 것도 없고 애증의 대상이자 애물단지로 전락한 현재를 살아가고 있기에 더욱 더 그렇다. '여름날의 저녁 열시 반'을 보고 더 가슴에 사무치는 것은 내가 알기로 현재까지 어머니의 번역본이 국내에는 유일하기 때문이다. 우연히 발견된 한 권의 소설은 그렇게 소중한 책이었던 것이다.

'여름날의 저녁 열시 반'과 나와의 인연은 신기하게도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파브리스 카모인 감독의 <스톰 인사이드>는 5월 11일에 국내에 개봉을 앞두고 있는데 이 영화를 수입한 지인은 나의 오랜 영화 친구이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알고서 나는 깜짝 놀랐다. 이 또한 영화 같지 않은가. 나는 어머니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지인을 만나서 '여름날의 저녁 열시 반'을 빌려드렸다. 조금이라도 그 책이 영화 홍보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아쉽게도 이 영화는 많은 극장에서 개봉을 하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나는 한 명이라도 이 영화를 더 봐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극장에서 내린 다음에라도 2차 매체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봐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이건 어디까지나 사적인 바램일 뿐이다. 어머니와 나의 이런 사연을 누가 알게 된다고 해서 이 영화를 볼 사람은 없다고 본다. 그냥 이건 내가 어머니를 기억하면서 어머니를 위해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라고 보기 때문에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이다. 이것이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많이 후회하면서 불효자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라고 생각한다. 논리적으로 오류가 있는 생각일지라도 내 마음은 현재 이것을 굳게 믿고 있다. 이렇게 해서라도 뭔가 만회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지금의 나로서는 어찌 할 도리가 없다. <스톰 인사이드>가 개봉하면 나는 이 영화를 바로 볼 것이고 영화를 보면서 어머니를 떠올리고 싶다. 그리고 이 영화에 대해서 있는 힘껏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

어머니 생전에 내가 어머니와 가장 갈등을 겪었던 이유가 영화였다. 예전에 글에서 이미 밝힌 적이 있었듯이 매일 같이 영화만 보러 다니는 나를 어머니는 늘 걱정하셨던 것이다. 영화 보러 다니는 것 때문에 어머니와 많이 싸웠다. 그때 영화에 미치지 않고 어머니와 더 많은 시간을 가졌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머니와 나 사이에 그렇게 영화가 있었는데 우연한 계기로 한 영화를 통해서 다시 어머니를 떠올리게 되고 다시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그 영화를 홍보하고 싶어하는 나를 보니 참 아이러니하다. 인생이란 게 이런 것일까. 이탈리아의 거장 루키노 비스콘티에 관한 다큐에서 비스콘티는 평생 어머니를 잊지 못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아마도 나도 평생 어머니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 같다. 나는 어머니에 대한 다큐를 꼭 만들고 싶다. 아직 어떤 내용으로 만들지 정리가 안 되어서 시작도 못 하고 있지만 죽기 전에 꼭 만들고 싶다. 기왕 만들 거라면 많은 사람들도 공감할 수 있는 어떤 것이 되면 좋을텐데 그게 걱정이다. 그 다큐를 만드는 과정을 통해서 어머니에 대해서 몰랐던 사실들을 많이 알고 싶다. 소르본 대학교에 가서 어머니의 재학 기록도 찾아보고 싶고 어머니가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할 정도로 좋아하셨던 프랑스 파리에 가서 어머니가 걸어 다니셨을 거리와 풍경들을 찍고 싶다. 그리고 그 다큐의 마지막을 16미리로 촬영된 어머니 결혼식 장면으로 끝마치고 싶다. 어머니에 대한 다큐를 만들 수 있도록 응원해주시기를. 반드시 이루리라.

(쓰고 보니 변변치 않은 글이 되었다. 어머니에 대한 내 마음이 제대로 표현이 안 된 것 같아서 많이 아쉽다. 긴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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