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갈등의 환상

2023.10.21 12:39

Sonny 조회 수:247


정성일 평론가가 이전에 [랍스터]를 해설했던 내용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이 영화는 얼핏 보면 연애를 하며 머무르는 호텔이라는 공간과 연애를 안하면서 머무르는 숲이라는 공간이 같은 위상으로 존재하는 것 같지만 사실 숲은 호텔에 부속된 세계이고 호텔에서 숲으로 갈 수는 있어도 숲에서 호텔로는 갈 수가 없다고요. 메이저리티와 마이너리티의 세계를 서로 왕래가능한, 혹은 선택가능한 세계로 보는 것은 큰 오해라고 짚어줬었는데 저는 이것이 현실세계를 바라보는데도 유용하면서 핵심적인 시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적 지향성이 다를 때 우리는 이를 좌와 우로 표현합니다. x축 y축 z축의 방향성을 인용할 때 앞과 뒤, 위와 아래보다는 훨씬 더 공정하고 균등해보이죠. 그러나 좌와 우라는 방향성도 이미 어느정도 사회의 불균형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오른손에는 옳다라는 의미가 내재되어있지만 왼손에는 그런 의미가 없습니다. 왼손잡이는 오른손잡이로 교정을 당하곤 하지만 오른손잡이는 왼손잡이로 교정당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오른손잡이가 왼손잡이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좌와 우도 단지 방향의 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안에 숨어있는 불균형을 은폐하는 부작용이 함께 따라붙곤 합니다.


양측이 대립하는 현상은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양측이 나란히 존재하거나 대등하게 싸우는 상황이 아닙니다. 현재 일어나는 전쟁들이 그렇고, 대한민국에서는 검찰과 언론의 지원을 받는 극우정당과 그렇지 못한 현 야당의 충돌이 그렇습니다. 그보다 더 쉽게 관측되는, 00와 ㅁㅁ가 싸운다고 착시를 일으키는 장은 바로 성별일 것입니다. 이를테면 "남녀갈등"이란 표현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 투닥거리는 것처럼 사회현상을 왜곡시키는데 그 실상은 여성이 차별을 당하는 사회를 고발하면 그것을 남성들이 묵살하거나 인정하지 않으려고 트집을 잡는 것에 가깝습니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게임업계 페미니스트 사냥  등이 바로 그렇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럼에도 수많은 사람들은 민주당과 국힘당, 진보와 보수, 여자와 남자 등 단지 어떤 주체들이 함께 양립한다고 생각합니다. 좌와 우의 개념처럼 1차원에서 선의 방향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2차원에서의 폭을 더하고 3차원에서의 높이를 더하면 두 주체가 전혀 다른 권력과 사회적 압력에 처해있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도요. 이 양자갈등의 환상은 최종적으로 양비론에 빠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완벽한 주체는 없고, 아주 단순한 선의 영역에서만 두 주체를 판단하며 그렇게 판단하고 심판하는 사람들은 '오만한 관찰자'의 함정에 빠지게 되니까요. 양비론은 단순한 인간들의 유일한 결론이자 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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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와 남자가 있으니, 온라인 상에서도 여자와 남자의 영역이 구분됩니다. 그런데 양자갈등의 환상을 가진 사람들은 여자들 혹은 남자들이 온라인에서 어떻게 모여있는지도 단순하게 해석해버립니다. 남자들이 많이 모인 커뮤니티는 남초 커뮤니티, 여자들이 많이 모인 커뮤니티는 여초 커뮤니티로 구분하고 이 둘을 나란히 저울 위에 올려놓은 다음 다시 한번 양비론의 세계관을 가져오죠. 그럼에도 이 양비론은 완벽하게 작동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이 속해있지 않은 그룹을 향해 훨씬 더 편파적이고 지독한 비판을 하게 만들죠. 일베, 디씨, 펨코 등 수많은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커뮤니티라는 공간의 파시즘을 인정하는 듯 하면서도 항상 여초집단이 더 악랄하다고 자신들의 해석을 공유합니다. 


"여초 커뮤니티"라는 소재는 양자갈등의 환상을 부수기에 제일 적절한 소재입니다. 왜냐하면, 여초 커뮤니티는 남초 커뮤니티와 동일한 형태를 띄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온라인 지형에서 가장 크고 대표적인 여초 커뮤니티로 뽑히는 곳은 바로 여성시대, 줄여서 "여시"입니다. 이 곳은 다른 남초커뮤니티들처럼 개방적인 커뮤니티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이곳은 다음 까페입니다. 여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쭉빵, 쏘드, 레몬테라스 등 회원 수가 대규모인 여초 커뮤니티들은 다 까페입니다. 


다음 까페나 네이버 까페는 가입이 훨씬 번거롭고 글이 공개되거나 공유될 때 훨씬 더 제한적입니다. 그런데 많은 대형 여초 커뮤니티들은 이렇게 까다롭고 폐쇄적인 까페를 굳이 커뮤니티로 삼습니다. 왜? 여자들이 더 은밀한 대화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대답은 간단합니다. 여초 커뮤니티를 만들면 꼭 거기에서 성희롱을 하거나 성매매를 제안하거나 스토킹을 하거나 하는 등 남자들이 분란을 일으키거든요. 아빠들도 육아를 하고 온라인에서 정보를 공유하고 싶지만 어지간한 육아 까페에서는 남자의 회원가입을 받지 않습니다. 거기에서도 비슷한 양상의 성폭력적 사건들을 남자가 일으키거든요. (이렇게 말하면 꼭 또 모든 여초커뮤니티가 그런 것은 아니라고 어줍짢은 반론이 달릴텐데, 그러면 왜 굳이 까페 형식으로 대형 여초 커뮤니티들이 유지되고 있는지 그 필연적인 이유를 설명을 좀 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여초 커뮤니티들을 볼까요. 이곳도 사정이 크게 다르진 않습니다. 인스티즈는 회원가입을 아무 때나 안받습니다. 원하는 때에 바로 가입을 하려면 돈을 내야됩니다. 드미트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회원 가입을 하는 것 자체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더쿠는 얼마 전에 다른 분에게 듣고 안 사실인데 이제 더 이상 회원가입 자체를 안받는다고 합니다. 더쿠는 실시간으로 바로 댓글을 볼 수 없습니다. 드미트리는 회원이 아니면 아예 댓글 열람이 불가합니다. 여초커뮤니티들은 기본적으로 남초 커뮤니티에 비해 훨씬 더 폐쇄적이고 그 글의 공개나 전파에 있어서 여러 걸림돌이 있습니다.


자유롭게 회원가입을 하고, 자기 글이 자유롭게 열람가능하도록 개시를 하고, 어떤 글을 써도 익명성으로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남초 커뮤니티는 여초 커뮤니티와 동등한 비교대상이 아닙니다. 남초가 어떻고, 여초가 어떻고를 떠들기 전에 왜 남자들은 자유롭게 커뮤니티를 만들고 공개적으로 본인들의 글을 전시하는데 여자들은 커뮤니티를 만들고 글을 공개하는데 더 깐깐하게 굴 수 밖에 없는지, 그 근본적인 차이점부터 이해를 해야합니다. 자유와 보안을 가지고 이야기를 한다면 남초 커뮤니티와 여초 커뮤니티는 여기엔 남초 커뮤니티가 있고 저기엔 여초 커뮤니티가 있는 그런 구도가 아닙니다. 모두가 익명성으로 공개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글을 쓰는데 그 인터넷의 근본적인 자유를 여자만 제한당하고 있는 상황이죠. 달리 말하면 인터넷 전체가 남초인데 거기에서 여초만 비밀스럽게 유지되고 있는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남자는 여초커뮤니티를 남초 커뮤니티 보듯이 볼 수가 없습니다. 회원 가입도 안되고 게시물이나 댓글 열람도 안되고 대화를 나누는 것도 불가능한데 어떻게 여초 커뮤니티를 남자가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까? 여초 커뮤니티와 남초 커뮤니티가 있다고 하지만, 남자는 관찰자의 권한을 제대로 얻을 수도 없습니다. 이 근본적인 한계를 인지하지 못할 때 다시 한번 양자갈등의 환상이 동원됩니다. 남자는 이런데, 여자는 이렇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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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와 '부'의 개념을 이해해야 남초 커뮤니티에서 여초 커뮤니티의 금기를 싫어하는 것도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남자들은 커뮤니티를 이용할 때 원래 그냥 아무 말이나 했거든요. 본인들에게 주어진 자유 자체를 기본값으로 여깁니다. 그러니까 여자들이 제시하는 금기는 남자들에게 원래 갖고 있던 걸 못하게 되는 겁니다. 어떤 언어가 타인에게 어떻게 들릴 수 있고 어떤 상처를 주며 그것이 얼마나 예의에 어긋나는지~~ 이런 거 남자들은 생각 안합니다. 자기한테 주어진 발화의 권력을 온전하게 누리겠다는 건데 이 특유의 오만함은 남초 커뮤니티의 주류문화 상당수가 익명성으로 사회성 자체를 엄청나게 희미하게 만드는 디시인사이드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모 욕을 해도 되고~ 노무현을 운지했다고 해도 되고~ 유족들을 희롱하거나 모독해도 되고~ 그런 곳에서 자유를 학습했으니 그보다 더 한 사회성을 기반으로 한 여초 커뮤니티의 금기를 이해할 길이 없죠. 어떻게 이해합니까? 


여초 커뮤니티에서 금기를 받아들이고 그걸 따르고자 하는 것도 당연한 현상입니다. 그게 사회적 약자의 포지션에 속한 자신들의 생존과 안위에 훨씬 더 도움이 되니까요. 익명성에 기대서 아무 말이나 하고 다녀도 딱히 걱정이 없는 남자들에게는 그게 이해가 안되죠. 남자가 신상 까는 것보다 여자가 신상 까는 게 훨씬 더 위험합니다. 남자가 자기 일화를 공유하는 것보다 여자가 자기 일화를 공유하는 게 훨씬 더 위험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자들이 자신을 보호하고 존중받을 규칙을 적극적으로 수입하며 적용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강자는 논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원칙이란 건 약자를 위한 발명품입니다.


여자는 화장품 같은 걸 사는데 돈을 낭비하고 남자는 그런데 돈 안쓰고 절약한다, 이러면 다들 미친 소리라고 하겠죠. 여자가 화장을 하는 게 하나의 예의인 것처럼 사회적 압력이 따로 작동하니까요. 서로 다른 두 대상이 있을 때 그 대상을 아주 단순한 기준으로 비교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결론을 정리하자면 양자갈등의 환상은 세상의 구조를 너무 단순하게 해석하는 사람들이 양비론을 위해 만들어낸 가장 간편한 틀입니다. 물론 그 양비론은 정말로 두 대상을 공평하게 회의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지배하거나 착취하는 책임을 무마시키는 용도의 도구에 더 가깝습니다. 그 양비론으로는 어떤 타인에 대한 이해도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도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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