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사망탑

2023.10.01 10:54

돌도끼 조회 수:420

이소룡은 [사망적유희]라는 영화를 찍던 도중에 워너 브러더스에서 만드는 [용쟁호투] 출연 제의를 받았습니다. 이양반 평생의 꿈이 헐리우드에서 스타가 되는 거였는데 헐리우드에서 온 제의를 거절할 수는 없죠. [사망적유희]는 일시중단되고 [용쟁호투]가 먼저 만들어집니다. 그리고는 이세상 사람이 아니게되었기 때문에 일시중단되었던 [사망적유희]는 그대로 영구중단이 되어버렸습니다.

[용쟁호투] 덕에 이소룡은 평생의 꿈을 실현하고 세계는 이소룡이라는 슈퍼스타를 알게됩니다. 근데 어쩝니까. 이제 막 알게되었는데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랍니다. 더 보고싶은데 자꾸 보고싶은데 볼 방법이 없습니다.

여기서 생겨난 게 짝퉁이소룡사업(=브루스플로이테이션). 서양 사람들이 동양 사람 얼굴을 잘 구별 못한다는 걸 이용해서 이소룡이랑 어딘가 닮은(사실은 그렇게 닮지도 않은...) 사람을 데려다 브루스 어쩌고하는 이름을 붙이고는 영화를 찍어 서양에 팔아먹는 겁니다.
짝퉁 이소룡이 활개치고있는 세태에 골든 하베트스트의 추문회 사장님은 속이 부글거렸겠죠. 이소룡이랑 발가락만 닮아도 팔리는데, 골든 하베스트의 창고에는 이소룡 본인이 생전에 남긴 미완성작 필름이 있습니다. 이걸 이용하지 않을 수는 없는거지요.

추사장님은 이소룡을 월드스타로 만드는데 일조했던 미국측 제작 파트너들을 다시 불러서 영화를 마무리하게 했고 완성된 영화가 78년에 공개됩니다. 제목은 살짝 바뀌었어요. [사망유희].

[사망유희]에는 [사망적유희]의 장면이 대략 15분 정도쯤 편집되어 들어갔습니다. 이소룡이 남긴 [사망적유희] 푸티지는 전부 액션장면이고 두시간이 넘는 분량이었다고 해요. 단순 계산으로는 이 페이스면 시리즈 하나를 만들어도 될 정도로 푸티지가 남아있겠죠. 하지만 이소룡은 액션장면 하나하나를 길~게 찍어놨었고, [사망유희]에는 이런저런 사정상 그 장면들을 짧게 편집해서 집어넣었습니다. 그래서, 만들고 보니 더이상 써먹을 수 있는 필름이 남은게 없었다나.... 분량관리를 잘했더라면 속편도 생각해봄직했을듯 한데....

그래도 속편은 나왔습니다. [사망탑].

이 [사망탑]은 [사망유희]에서 이소룡의 대역을 했던 한국 배우 당룡(=김태정)을 주인공으로 해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각각 다른 목적을 가지고 (최소) 세가지 버전이 만들어졌습니다.

주연배우가 한국 사람이고 영화의 주요 촬영장소가 한국이라서 한국 영화사도 숟가락을 얹어서 한국판이 따로 나왔습니다. 홍콩보다 먼저 개봉했습니다.

이 한국판 [사망탑]은 걍 당룡 단독 주연의 액션영화입니다. 이소룡과도 [사망유희]와도 관계 없습니다. 극중 주인공 이름은 김태정.(배우의 본명을 캐릭터명으로 재활용...ㅎㅎ) 처음부터 끝까지 김태정 한사람이 극을 이끌어갑니다.

이듬해에 개봉된 홍콩판 [사망탑]은 이소룡의 유작...입니다. 이소룡의 생전 모습이 담긴 마지막 영화. 물론 이소룡이 진짜로 나왔을리는 없고, 더이상 쓸수 있는 [사망적유희] 푸티지도 남은 게 없어, 삭제장면 같은 당시에는 미공개였던 영상 이런저런 이소룡 관련 그림들을 주워모아 만들었습니다. 전작은 이소룡이 남긴 푸티지라도 있었지... 이 영화는 그조차도 없는, 걍 짝퉁 이소룡 영화입니다.

스토리가 한국판과는 달라서 여기선 이소룡과 당룡 공동주연입니다. 영화 초반은 이진강(이소룡의 얼굴을 뒤집어씌운 당룡), 후반은 이진강의 동생 이진국(본인 얼굴로 나오는 당룡)이 주인공입니다.

글고, 그외 다수 나라에서 개봉된 버전. 이건 제목부터 [사망유희 2]입니다. 스토리는 홍콩판과 같고 주인공 이름만 바꿨어요. 초반 주인공 이름은 빌리 로.(즉 [사망유희]의 주인공과 같은 이름) 후반 주인공은 바비 로.
애초에 스토리가 [사망유희]와는 관련도 없는 이야기고 주인공도 이름만 같지 동일인물이라고 보긴 어렵습니다. '억지로' 속편을 만든 거죠.
외국팬들을 겨냥한 버전이라 홍콩판 보다 이소룡 관련 영상을 더 많이 집어넣었습니다. 보너스로 [사망유희] 홍콩판에만 있던 결투장면(왕호 출연)도 갖다붙였습니다. 이것저것 갖다붙여 상영시간이 제일 깁니다.

몇몇 장면들이 추가된 것 빼면 홍콩판과 큰 차이는 없습니다.



문제의 한국판...
먼저 나왔으니 이쪽이 오리지날이고 해외판 버전들이 이것저것 갖다붙인게 아닌가싶은 생각도 들지만... 아니었습니다.

해외판은 이소룡이 나오는 것처럼 위장하려고 이런저런 꼼수를 써서 초반에 나오는 당룡의 본래 얼굴을 가렸는데, 한국판에도 그런 트릭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겁니다. 그뿐 아니라 한국판은 그렇게 짜깁기된 이소룡의 얼굴을 잘라내느라 또 노력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소룡의 얼굴을 써서 클로즈업된 부분들은 안나오고, 당룡의 본래 얼굴은 처음부터 안나왔고... 그덕에 초반 30분은 주인공이 이유도 없이 얼굴을 숨기고 다니는게 되어버립니다.

여기서 이 영화가 정상적인 합작물은 아닐거란 의심을 해볼 수 있습니다. 한국영화사가 본격적으로 참여한 작품이라면 주인공 얼굴을 숨길 이유가 대체 뭐가 있겠어요.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부분은 한국판 전용 장면들을 따로 찍어서 넣으면 끝입니다. 근데 그냥 홍콩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이소룡 짜깁기 영상에서 삭제만 한 거예요.(게다가 이소룡 얼굴을 완전히 다 지우지도 못했어요. 정면 클로즈업이 아닌 경우는 그대로 나옵니다.ㅎㅎ) 그덕에 원래도 개판이던 편집이 더 개판이 됩니다. 그리고는 중간쯤부터 아무 맥락도 없이 당룡의 얼굴을 제대로 보여주기 시작하죠.

내용상으로도 합이 안맞아서 주인공이 중간에 자기 절친 얼굴도 못알아보고 저게 누구냐고 물어보는 장면이 나오기도...(원래 두사람이었다 하나로 합쳐진 걸 제대로 수습못한 결과)


영화의 앞부분은 한국판과 해외판이 주인공도 다르고 장면배치된 순서도 차이가 좀 나다가, 해외판에서 형에서 동생으로 주인공이 교체되는 장면 뒤로는 거의 동일하게 진행됩니다. 한국판이 검열상의 문제로 몇군데 잘린 정도의 차이.

글구... 영화의 후반을 한국에서 찍어서 용인자연농원, 불국사, 범어사 같은 데가 배경이고 해외판에서는 '금정산 범어사'같은 간판까지 그대로 노출됩니다. 한국에서는 그래선 곤란하니까 그런건 삭제... 그런데 그걸로 끝난게 아니라, 한국판의 배경은 '시실리'...랍니다. 아니... 간판 없어도 어디라는 거 뻔히 알겠는데, 어딘지 못알아 보더라도 한국 절간인 거 다 보이는데... 시실리...랍니다ㅎㅎㅎ


왜 한국판 [사망탑]에서 이소룡을 삭제해버렸는지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이소룡은 한국에서도 엄~~청 잘 먹히잖아요. 이소룡 영화라고 홍보했으면 사람이 한명이라도 더 왔을텐데...
한국 영화업자들이 더 양심적이어서...는 당연히 아닐테고... 한국에서 자체생산한 짝퉁 이소룡 영화들 숫자만해도 얼만데...
당룡을 본격적인 액션스타로 키우기 위해 당룡에게만 집중한 거라고 쳐도, 제대로된 당룡 주연으로 완성시킨 것도 아니고 홍콩판에서 이리저리 잘라내서 너덜하게 만들어놓은 게 다라서 뭔 의미가 있나 모르겠습니다.

뭐 어쨌든, 한국판 [사망탑]은 원래 괴작이었던 영화에 칼을 대서 더욱 괴작으로 만들어놓은 물건입니다. 뭐 원본부터가 무술 장면 때문에 팔리는 영화니까(무술지도 원화평에 끝판왕이 황정리니까 확실히 볼만한 가치가 있죠ㅎㅎ), 적어도 무술장면은 그대로인 한국판 [사망탑]도 그점은 다를 바 없고, 오히려 더욱 괴작이 된 한국판이 나름 가치가 있지않을까... 싶기도 해요. 한국판은 짜가 이소룡 영화도 아니고... 이것저것 잘라내면서 더 추가한 건 거의 없다보니 상영시간도 (많이ㅎㅎ)짧아서 부담없고...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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