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상반기의 바쁜 일들도 다 끝나고 하루종일 아무 것도 안 하고 늘어져 있다가 기운을 내서 뭐라도 좀 읽어볼까 하고 


조르주 바타이유의 <에로티즘>(조한경 번역)과 <에로티즘의 역사>(조한경 번역)을 빌렸어요. 


이 책과 함께 유기환 씨가 지은 <조르주 바타이유: 저주의 몫, 에로티즘>이라는 책과 이 분이 번역한 바타이유의 


<에로스의 눈물>도 같이 빌렸죠. 


그런데 빌려온 책들을 뒤적이다 보니 <조르주 바타이유: 저주의 몫, 에로티즘>를 제일 먼저 읽는 게 좋겠더군요. 


바타이유에 열광했던 분이 공부해서 입문서로 낸 책이라 읽어볼 만할 것 같았어요. 


결과는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굉장히 재밌게 술술 읽혀서 3~4시간 동안 다 읽은 것 같아요. 


230페이지 정도의 작고 얇은 책이지만 소위 프랑스 철학 이론서로 이렇게 쉽고 재밌게 읽은 책이 또 있을까 싶네요. 


먼저 바타이유가 비생산적 소비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에 저는 적극 공감합니다. 


"인간과 세계가 존속하기 위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생산과 축적이 아니라 소비와 상실이다."라는 부분에서 


저는 삐리리~하고 이 책에 매력을 느꼈어요. 


비생산적 소비란 소비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소비인데 예를 들면 사치, 종교 예식, 기념물 건조, 장례, 축제, 도박, 


(생식이 아니라 쾌락을 목적으로 하는) 섹스 등이 이에 해당됩니다. (생산과 관계 없는 자원과 에너지의 소비)


이런 비생산적 소비를 통해 과잉 에너지의 해소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인간은 종종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과잉 에너지를 해소하려고 한다고 주장하네요. (뭐 별로 근거는 없는 것 같지만 심정적으로는 상당히 공감합니다. ^^)


그리고 그런 비생산적 소비의 하나로 소개된 고대 사회의 증여(포틀래치)에 대한 부분을 아주 재밌게 읽었어요. 


"재산을 증명하는 방법은 오직 그것을 분배하고 소비하는 것뿐이었다. .... 주기와 초대하기에 인색한 자가 


명예와 지위를 잃는 것은 당연한 귀결로 받아들여졌다. 부족은 후하게 베풀지 않는 지도자를 알아주지 않았으며


감사히 여기지 않았다." "사회적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개인적 재화를 분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이 얼마나 갸륵하고 정의로운 지혜인가." 


"포틀래치(증여)는 단순한 보시가 아니라 경쟁자에 대한 정복의 수단이며 궁극적으로는 명예와 권력 획득의 수단이다. 


경쟁자는 받은 것 이상으로 답례하지 않으면 패자가 된다." "증여자는 부를 상실함으로써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다." 


증여에 관한 부분을 읽으면서는 우리나라 부자들이 바타이유의 책을 좀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부자의 권력은 돈을 꽁꽁 싸매두고 있는 데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그 돈을 다른 사람에게 펑펑 쓸 때 생기는 거죠.  


그것도 뭔가 보답을 바라면서 주는 게 아니라 대가 없이 거저 줄 때 진정한 권력과 명예를 얻을 수 있고요. 


이런 비생산적 소비로서의 증여 얘기를 하고 나서 드디어 바타이유의 에로티즘 이론으로 나아갑니다. 


에로티즘이라는 내적 체험을, 인간이 죽음의 한계를 넘어 신성에 이르고자 하는 (어떤 면에서는 종교적인) 존재의 연속성의 추구, 


또한 고독하고 불연속적인 존재인 인간이 타자와의 연속성을 갈망하면서 그 연속성의 체험을 순간적으로 구현하는 것으로  


설명하는 부분은 저에겐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어요. 


폭력, 금기, 위반이 에로티즘과 어떻게 연결되는가에 대한 설명도 흥미진진했고요. 


인간은 폭력의 금기를 설정함으로써 동물로서의 자신을 부정하고 인간으로 나아가려 하는데, 희생 제의를 통해 그 금기를 


깨뜨림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부정하게 되지만 이 두 번째 부정이 애초에 부정했던 본능적 동물성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금기로써 성스럽게 만든 동물성, 즉 신성에의 돌입을 의미한다는 부분은 뭔가 이해가 갈 듯 말 듯 알쏭달쏭하네요. 


(희생 제의의 폭력을 동물적 폭력으로부터 구별지어주는 것, 그것은 바로 성스러움이라고 하는데... 뭐 성스럽다고 하니까 


성스러운가보다 하지 제가 보기엔 다 동물적인 폭력인 것 같은데... ^^??)


"희생 제의에서 희생 제물은 죽기 직전까지 불연속적 개체성에 갇혀 있지만 죽음의 순간, 공포와 고통 속에서 돌연 무한으로 향한다. 


이 순간 그는 제의 집행자와 혼연일체가 되어 신성 속으로, 즉 경계도 한계도 없는 연속성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성행위도 희생 제의와 비슷하게 희생 제물인 여자가 제의 집행자인 남자와 함께 연속성의 세계로 가는 걸로 보는 것 같아요. ^^


폭력 금기의 위반을 신성 체험의 계기로 본다는 것에 대해서는 다른 책을 좀 더 읽어봐야 될 것 같네요. 


그리고 일상 생활에서 폭력과 살인은 금지되지만 고대 사회에서 희생 제의를 통해 그런 금기를 깨뜨림으로써 폭력에 대한 


억압된 욕망을 해소시켰다는 것은 이해가 가는데... 폭력 금기의 위반이 지극한 관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잘 이해가 안 가요. (액션 영화 볼 때의 쾌감을 떠올려 보면 폭력의 쾌감까지는 이해가 가는데... 


폭력이 관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부분은 좀 더 생각을 해봐야겠어요.)


어쨌든 참 쉽고 재미있게 읽히는 책이고 에로티시즘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한 번 읽어볼 만한 책이에요. 


(참고로 '에로티즘'은 불어 제목에서 왔더군요.)  


유기환이라는 이름이 어쩐지 낯익어서 기억을 더듬어 보니 카뮈의 <반항인>을 번역했던 분이네요. 


옛날에 이 책을 읽을 때 쩌릿쩌릿 전율을 느꼈던 기억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대한 카뮈의 해설서로 강력 추천합니다. 


유기환 씨의 책을 재밌게 읽어서 다음으로 유기환 씨가 번역한 <에로스의 눈물>을 읽으려고 해요. 


이 책은 바타이유가 썼으니 좀 더 어려울 것 같지만 바타이유 책 중에서는 제일 쉬운 편이라고 유기환 씨가 소개했네요. 


일단 에로틱한 그림이 많아서 재밌을 것 같아요. ^^


이 책을 읽은 후에는 <에로티즘>을 읽고 그 다음으로 <에로티즘의 역사>를 읽어서 7월 중순까지 에로티즘을 마스터할 계획인데 


잘 진행될지는 물론 알 수 없지만 주제가 주제이니 만큼 기운을 내서 읽지 않을까 싶네요. ^^ 



혹시 이런 책들 말고도 에로티시즘에 관한 읽을 만한 철학 서적이 있으면 소개해 주세요. 


일단 생각나는 건 프로이트의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와 푸코의 <성의 역사>인데 


<성의 역사>는 옛날에 1권 읽다가 엄청 재미 없었던 기억이... 


들뢰즈의 <매저키즘>은 아주 재미있게 읽었어요. 다 이해가 가는 건 아니었지만 별로 힘들이지 않고 순식간에 읽었던 기억이... 


이 책에 부록으로 추가되었으나 분량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매저키즘의 원조,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의 소설 


<모피를 입은 비너스>도 재미있었고요. ^^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5258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808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2309
124579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에 나온 이탈리아/스페인 어 daviddain 2023.10.26 157
124578 (정보,에 후기 추가 했어요.) 데이빗 핀처의 <더 킬러 The Killer, 2023>가 개봉했네요. [1] jeremy 2023.10.26 380
124577 외계+인 2부 개봉확정 포스터 [3] 상수 2023.10.26 509
124576 [왓챠바낭] 아무 욕심 없이 평범해도 잘 만들면 재밌습니다. '살인 소설' 잡담 [8] 로이배티 2023.10.26 451
124575 너와 나를 보고 [4] 상수 2023.10.25 403
124574 더 킬러 [2] daviddain 2023.10.25 378
124573 술을 안마신지 3년이 지나고 catgotmy 2023.10.25 222
124572 프레임드 #593 [2] Lunagazer 2023.10.25 79
124571 Richard Roundtree 1942-2023 R.I.P. [2] 조성용 2023.10.25 136
124570 미야자키 하야오의 은퇴작이 될 뻔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보고 [1] 상수 2023.10.25 696
124569 100만유튜버 어퍼컷이 이태원참사 다큐 '크러시'를 리뷰했네요. [2] 사막여우 2023.10.25 648
124568 요즘 본 영화들에 대한 짧은 잡담... [8] 조성용 2023.10.25 609
124567 [왓챠바낭] 허술한데 묘하게 잘 만든 그 시절 B급 무비, '엘리게이터' 잡담입니다 [12] 로이배티 2023.10.25 357
124566 추억의 축구 선수 나카타 [4] daviddain 2023.10.24 223
124565 무라카미 하루키와 아다치 미츠루는 이제 catgotmy 2023.10.24 367
124564 바낭ㅡ 메시 샤이닝 야구 daviddain 2023.10.24 87
124563 에피소드 #60 [2] Lunagazer 2023.10.24 69
124562 프레임드 #592 [2] Lunagazer 2023.10.24 75
124561 (정치바낭)공동정권,,,괴이합니다. [7] 왜냐하면 2023.10.24 619
124560 곽재식 단편선 표지 디자이너님은 못 찾았지만 텀블벅을 오픈했습니다 [3] 쑤우 2023.10.24 277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