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 나홀로

2023.09.26 15:39

돌도끼 조회 수:269

프레데릭 레이날은 축복받은 아이였어요. 레이날의 아버지가 비디오 대여점을 하셨고, 그것만 해도 꿀인데 거기다 컴퓨터 매장까지 겸업하셨다고... 7,80년대에 성장한 아이들한테 이보다 더 꿈같은 환경이 어디 있겠어요. 레이날은 어려서부터 컴퓨터와 영화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눈과 귀에 문제가 생겨 의학의 도움을 받았을 정도라고... 영화중에서는 호러, 그중에서도 좀비 영화에 열광했다고 하네요.

10대 때 이미 게임을 만들어 아버지 가게에서 파는 등 프로그래머로 이름이 나있던 레이날은 군 제대 후 인포그램스에 입사했습니다.

인포그램스의 부르노 보넬 사장님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 성냥개비 하나만 들고는 탐색하는 게임의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이름하여 'In the Dark'
레이날은 3D로 표현한 인간이 집안을 돌아다니는 데모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그걸 본 사장님은 자기 아이디어를 구현하기에 적합한 물건이라 생각해 레이날에게 본격적으로 프로젝트를 맡깁니다.

러브크래프트에 관심이 있던 보넬은 이 게임을 크툴루 신화와 연동시키기로 마음 먹고 영화사에서 일하는 시나리오 작가를 섭외해서 러브크래프트풍의 이야기를 만듭니다.(이때 제목에 'Alone'이 추가됩니다.) 그리고 '크툴루의 부름' RGP를 만들고 있던 카오시움에 접촉해 라이센스 협상을 시도했습니다. 그치만 게임 샘플을 본 카오시움 측은 '이건 좀...'이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당시 SSI가 D&D 라이센스를 받아서 만든 골드박스 게임들이 잘나가는 걸 보고 부러워하던 카오시움은 자기들 나름으로 기대하던게 있었는데, 레이날이 만든 게임은 장르부터 RPG가 아닌데다, '크툴루의 부름' 룰을 적용할 수가 없는 형태의 게임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협상은 결렬되었고, '어둠'은 정식 크툴루 판권작은 아닌, 걍 러브크래프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게임이 되었습니다.(그치만 게임의 패키지 그림은 '크툴루의 부름'의 표지 그림 구도를 고대로 베꼈다는...ㅎㅎ)

카오시움으로선 정말 어리석은 선택을 한 거죠. 그때 걍 라이센스를 줬으면 엄청난 홍보효과를 보았을 텐데... 세상 일이 어떻게될지 누가 알겠습니까만... 뒤늦게 실수한 걸 깨달은 카오시움이 인포그램스와 계약해 이후에 '혜성의 그림자'같은 게임들이 카오시움 '크툴루의 부름' 태그를 달고 나왔지만 그렇게 열나게 크게 성공하진 못했죠.

92년 하반기에 유럽에 출시된 '어둠 속에 나홀로'는 나오기 몇달 전부터 언론의 찬사와 추천을 받았고 나오자 마자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이듬해 초에는 미국에도 출시되어 역시나 센세이션을. 정말로 혁신적인 게임이었으니까요. 어드벤처 장르 내로 한정한다면 아마도 시에라의 '킹스 퀘스트 1'편 이후 가장 크게 패러다임을 바꾼 게임일 겁니다.

일단 액션 어드벤처에 변혁을 가져왔죠. 그때까지 액션 어드벤쳐라고 부르던 게임들... '페르시아의 왕자'라거나 '어나더 월드'같은 게임들은 걍 스토리와 퍼즐 요소가 있는 액션 게임이었습니다. 어드벤처 게임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들이었죠. 정통 어드벤처 게임들도 액션 요소를 꾸준히 도입하고 있었지만 어드벤처에 포함된 액션 파트는 액션 게임이라고 보기엔 함량미달인 것들이었습니다(인디아나 존스 게임에 들어간 주먹질같은 것들...)

거기 비해 '어둠'은 분명히 액션 게임이면서 또 분명히 어드벤처 게임입니다. 주인공을 직접 조작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온갖 괴물들을 때려잡아야 하는 한편, 그 괴물들의 거의 대부분은 회피하거나 처치할 수 있는 다른 방법(퍼즐)이 있습니다. 그거 말고도 풀어야할 미스테리도 있고...
게임에 대사 한마디도 없고 설명하는 나레이션 텍스트도 안나오지만 게임 진행 도중에 얻게되는 각종 문서들의 내용을 조합하면 스토리가 나옵니다. 그렇게해서 어떤 형태로도 명령어를 입력할 일이 없고 순전히 액션조작으로만 어드벤처 게임을 진행하는 거죠.

3D를 도입함으로 해서 어드벤처와 액션이라는, 좀처럼 조화되기 어려웠던 상반된 장르를 제대로 융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3D는 게임플레이를 새로운 방향으로 끌었습니다. 캐릭터의 이동과 조작에 이전과는 비교가 안되는 자유가 생기며 제대로된 액션을 구사할 수 있게되기도 했지만, 어드벤처 게임의 첫 시작이 동굴탐험이었고, 이 게임은 하면서 정말로 동굴(저택) 속을 직접 싸돌아다니며 탐험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전까지는 순전히 머리속으로 상상하거나 그림과 그림 배경 사이를 단순하게 왔다갔다 하는 정도에 그쳤죠. 그러니 어드벤처의 가장 초심으로 돌아간 게임이라고 할 수도...

3D... 당시로서는 3D 보다는 폴리곤이라고 부르는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는데... 사실 이 폴리곤 그래픽의 도입이란 부분은 경제적인 측면의 이점도 있었습니다. 이보다 1년 앞서 나왔던 델핀의 액션 어드벤처 '어나더 월드'도 폴리곤 그래픽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더랬고, '어둠'도 '...월드'도 다 프랑스, 즉 유럽 게임이죠.
게임에서 보여주는 애니메이션이라는 게 결국 한장한장 다 그려야하는 거니까, 결국 돈 많은 사람이 유리한 판이었죠. 상대적으로 경제 규모가 작았던 유럽 회사들은 미국 게임 회사들 만큼 자금이나 인력을 투입할 여유가 없었다고 하거든요.
폴리곤을 도입하면서 만들어야할 그림 장수를 대폭 줄일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소규모 인원에 적은 투자로 만들어낼 수 있죠.('어나더 월드'는 에릭 샤이가 혼자서 만들었다고 하고요.) 그 결과물은 도트 그래픽은 상대도 안되게 유려한 애니메이션을 보여줄 수 있고 훨씬 더 다양한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단점은 그림이 도트 그래픽과는 상대도 안되게 조악해 보인다는 거지만. 당시로서는 그림이 조악하다는 것 보다는 그전까지 게임에서 본적이 없는 자연스럽고 다양한 동작을 보여준다는 쪽에 사람들이 더 주목했어요. 쇼킹했죠.

그러니까 뭐 '어둠'의 그래픽도, 당시로서도 '좋다'기 보다는 '신기하다'는 쪽이었습니다. '어둠'이 처음으로 3D로 사람을 묘사한 게임은 아니지만, 이보다 앞섰던 게임들, '4D 복싱'이나 베데스다의 '터미네이터'같은 것들은 사람이라기 보다는 아이콘에 더 가까운 형태였어요. 그냥 '저건 사람이다'라고 자기최면을 걸고(ㅎㅎ) 했던 것들이죠. 그런데 '어둠'은 어쨌든 사람처럼 보이는 캐릭터들이 나와서 돌아다녔으니 정말 실감나보였죠.

전체 실루엣은 사람같이 보인다 해도 부분을 확대하면 아주 그로테스크해지는 문제는 있었어요.
'게임에 나오는 모든 것들 중에 여주인공 얼굴이 제일 무섭다!'

이 게임이 처음 나왔을 때부터 떠돌던 말이고, 사실입니다.

진짜로 무서워야할 애들은 오히려 귀여워보이기까지 하죠. 좀비는 마치 개구리처럼 보이고...
뭐... 만든 사람들이 일부러 그랬겠습니까. 당연히 좀비는 위협적이고(레이날은 좀비영화 팬이라니까요) 여주인공은 미인으로 그리고싶었겠죠. 그치만 기술적인 한계... '어둠'은 램 640KB의 16비트 AT 컴퓨터에서 돌아가는 걸 전제로 만들어진 게임입니다. 그런 제약 안에서 이렇게 해내다니, 놀라움이 더 앞서서 단점을 가릴수 있었죠. 적어도 당시에는 그런 게 게임 몰입을 방해하는 요인이 되진 않았습니다. 그 조악해 보이는 좀비도 당시로서는 충분히 위협적이었습니다. 게임의 연출도 한몫했고.

하드웨어 한계 때문에 배경까지 3D로 때릴 수는 없어서, 비트맵 그림을 여러장 준비했다 그때그때 바꿔주는 형식으로 처리했는데 이게 적어도 이 게임의 분위기와 플레이 스타일에는 잘 어울렸습니다. 그전까지 비디오 게임에서는 볼 수없었던, 소위 영화적인 구도와 시점이 화제가 되었고 게임 분위기 살리는 데 적절하게 작용했습니다(종종 난해한 시점에 갖히기도 했지만ㅎㅎ) 나중에 완전 3D가 가능해진 뒤에도 일부러 이런 방식을 따라한 게임들도 꽤 있었죠.

어드벤처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방면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해요. 거의 대고 베끼다시피한 게임이 나와 콘솔에서 초대박을 치면서 서바이벌 호러라는 장르가 생겨났다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을테고, 캐릭터는 3D 배경은 2D(혹은 고정화면으)로 처리한다는 방법론을 따라한 게임도 많고 3D 액션 게임으로서도 어지간한 오락실, 콘솔 게임기 보다 앞서있으니 여러방면에서 대단히 선구적인 게임이었죠.

근데 그런 거에 비해서는 현재 인지도가 썩 높지는 않은것 같습니다. 후속작들이 제대로 분발해주지 못한 탓에...

보넬 사장님은 크게 대인배였던 것 같지는 않고요... 직원인 레이날이 사장보다 잘나가게 될까봐 경계를 했다나봐요. 그렇게 레이날이 불만이 쌓이고 있던 중에 (에릭 샤이가 퇴사하면서 새로운 스타 개발자가 필요했던) 델핀이 레이날을 꼬셔서, '어둠속에 나홀로 2' 제작이 시작될 무렵 레이날은 핵심 개발인원들을 데리고는 델핀으로 날라버립니다.
델핀은 레이날의 체면을 세워주려고 아들린이라는 자회사를 세웠고, 레이날의 팀은 여기서 '리틀 빅 어드벤처', '타임 코만도'등을 만들었습니다.

1편의 주요 제작진들이 빠져버린 상황에서 보넬은 부랴부랴 다른 팀을 조직해 속편을 진행시켰는데, 이 속편은 소재도 크툴루가 아닌 부두교로 바꾸고 호러나 미스테리 보다는 액션을 강조하는쪽으로 방향을 틉니다. 나름 성공하긴 했지만 전작이 우주명작 대우를 받았던 거에 비해선 호불호가 갈리는 쪽이었고, 3편도 냈는데... 1,2,3편이 같은 엔진에 아주 약간의 개선이 있었을 뿐 거의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때는, 컴퓨터 하드웨어와 게임 제작 기술이 미친속도로 발전하던 시기라, 1편이 제아무리 혁신적이었다지만 3편이 나왔을 무렵엔 다른 회사들이 각자 나름의 기술을 뽐내며 비슷한 유형의 게임을 내놓았을 때이고, 이미 '어둠3'는 원시적으로 보이는 물건이 되어있었습니다. 결국은 그걸로 시리즈가 중단되고.... 2000년대 이후 몇번 후속작들이 나왔지만 1편만한 반향을 얻지는 못하거나 개망작 취급을 받거나 해서... 그래도 현재 신작이 작업중이라니까 뭐 기다려봐야할듯...





1992년에 IBM PC 용으로 처음 나오고, 나중에 매킨토시와 에이콘 아르키메데스로 이식되었습니다.

93년에는 PC-98, 타운즈 등 일본 컴퓨터로도 이식되어 그쪽에서도 화제가 되었고,

한국에서는 동서게임채널이 한글판을 내면서 IBM PC 최초의 (제대로된) 한국어 로컬라이징 게임이란 기록을 남겼습니다.

게임기로는 유일하게 3DO로만 나왔는데 3DO 자체가 망한 물건이라 묻혔습니다.

CD롬 버전도 나와 게임속 모든 문서들이 남녀 주인공(및 기타인물(들)) 목소리로 더빙되었는데 과장된 연기때문에 호불호가 갈릴 물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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