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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네이트판에 올라갔으면 이 이야기는 어떤 반응을 얻었을까요. 엄마인 수경은 죽도록 욕을 먹고 딸인 이정은 응원과 위로의 댓글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뻔한 이야기를 영화는 굳이 2시간 20분이나 보여줍니다. 그것은 아마 저 나쁜 엄마를 손가락질하고 저 불쌍한 딸을 토닥이라는 그런 단순한 도덕적 질의응답은 아닐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이야기가 누군가의 악함에 분노하고 피해자를 동정하는 그런 이야기일 것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간만에 독립영화를 보는 이유를 곱씹어보게 됐습니다. 이른바 '정상'의 테두리를 벗어난 어떤 사람들이나 관계가 자아내는 독특한 풍경이 있습니다. 그 안에서 여전히 꿈틀대는 유대감이나 애정이 있고 그것이 마침내 완전히 뒤틀리며 끊어져버리기도 합니다. 이 영화의 첫 티저가 올라왔을 때 어떤 사람들은 이 작품이 불행포르노라면서 손쉬운 평가를 내리기도 했는데, 그만큼 이 영화가 담고 있는 폭력의 결이 현실적이면서도 격렬했다는 반증이겠지요. (저는 이제 트위터가 이런 식으로 어떤 작품을 낙인찍는 걸 믿지 않습니다. 개인으로서의 불쾌감이 유일한 미학적 기준이 되는 사람들에게는 자기중심성 말고는 어떤 반응도 이끌어내지 못할 걸 아니까요)


영화는 속옷을 빨고 있는 이정을 보여주며 시작합니다. 이 장면부터 이 집의 뭔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인상을 줍니다. 이정이 빨고 있는 속옷은 아무리 봐도 본인의 속옷으로 보이지 않을만큼 중년여성 취향의 속옷입니다. 이정이 효녀라서 엄마 속옷까지 빨고 있을수도 있겠지만 이정의 표정은 유난히 어둡습니다. 이 때 통화를 하면서 화장실에 수경이 불쑥 들어와 이정이 빨고 있는 팬티 하나를 낚아채서 그걸 그대로 입습니다. 영화는 여기서 이 모녀관계의 모든 것을 압축해보여줍니다. 축축한 속옷을 그대로 입는 기행을 하면서도 엄마는 딸에게 이 행동을 전혀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엄마는 딸의 걱정도 눈치도 불만도 아무 것도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 늘 그랬다는듯이 이정은 그걸 그저 어이없이 바라만 봅니다. 


이 영화의 제목은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입니다. 그러니까 이정이 빨고 있던 속옷은 단순히 수경의 속옷이 아니라, 이정 자신의 속옷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수경은 이정의 속옷을 바로 뺏어서 입은 것이기도 합니다. 이건 좀 기괴한 장면입니다. 어지간히 친한 사람이 아니면 속옷을 공유하지는 않으니까요. 팬티는 제일 사적이면서 은밀하게 치부되는, 성기를 감싸는 의류이니까요. 그런데 이 두 사람은 같은 속옷을 입습니다. 이것이 억척스러운 절약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든, 혹은 두 모녀가 너무 가까워서 생기는 '싱크로'현상이라면 차라리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공유는 단순한 나눠입기가 아닙니다. 이정이 자신의 속옷이 없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자기 속옷이 있어야 하는데 이정한테는 자기 속옷이 없습니다. 그래서 딸이 엄마의 속옷을 구차하게 빌려입고 다닙니다. 


영화는 시작부터 이 설정으로 충격적인 현실을 전제로 던져놓습니다. 딸의 속옷 한벌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있다, 이런 집안에서 딸은 어떻게 자라났을 것이며 딸은 엄마에게서 얼마나 종속된 채로, 자기 영토 하나 없이 살아가고 있을까. 어쩌면 개인의 독립과 자율성은 국가 간의 수탈이나 기업과 노동자 사이에서만 벌어지는 거시적인 것들이 아니라 부모와 자식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사회단위에서부터 생기는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부모의 권력이 조금만 더 극한으로 치달으면 딸은 속옷 하나 장만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 장면을 보고서도 '그냥 엄마한테 사달라고 하면 안돼?'라거나 '자기가 쫌쫌따리로 돈 모아서 속옷 좀 사면 안돼?'라고 묻는다면 그건 이 영화 안에 들어가는데 시간이 더 걸린다는 뜻일 겁니다. 이정의 속옷이 없다는 건 개인적 가난이 아니라 어머니의 완전한 방치와 무관심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이 영화에 이입하는데 어려워할까봐 감독은 친절하게 다음 장면을 또 보여줍니다. 이정은 생리통 때문에 너무 배가 아픕니다. 그래서 밖에 있는 수경에게 생리통 약을 좀 사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수경은 자신이 썸을 타고 있는 남자와 꽁냥거리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문자는 당연히 확인못합니다. 이정은 수경에게 약을 물어보지만 수경은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그리고 수경은 이정에게 온갖 폭언을 쏟아냅니다. 저런 귀찮은 건 꼭 자길 닮아서 사람을 피곤하게 한다느니, 알아서 할 것이지 뭐하러 이렇게 들볶느니 하는 식입니다. 이정을 챙기지 못한 건 수경인데 수경이 이정에게 화를 냅니다. 이정은 수경에게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엄마로서 가질법한 최소한의 다정도 없습니다. 수경은, 그냥 그런 엄마입니다. 그래서 다음 장면에서도 본인이 운영하는 쑥뜸방에서 손님들과 모여서 자식 졸업식에 자기는 안갔다고 태연하게 말을 합니다. 그게 사람들의 야유나 질타를 받을거라는 일말의 긴장도 없습니다. 


관객의 입장에서 우리는 수경을 나쁘다면서 경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런닝타임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이정은 아마 이런 상황을 영화 속에서 몇천번이나 겪었을 것입니다. 오로지 바깥 사람에게만 이상하게 보이고 그 두 모녀에게는 자연스러워져버린 이 동거생활은 그보다 더 강한 충격으로 뒤틀립니다. 장을 보러 갔던 수경과 이정은 차에 탔다가 또 다투기 시작합니다. 수경은 이정의 머리통을 마구 후려칩니다. 참다 못한 이정이 차 밖으로 나와 정면에서 차 안에 있는 수경을 노려봅니다. 수경은 죽어버리라면서 악셀을 밟습니다. 차는 그대로 나아가고 이정을 칩니다. 만약 이 것이 집안에서 일어난 일이었다면 둘 사이의 흔한 일상으로 은폐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경이 이정을 차로 치어버린 곳은 마트 주차장이고 목격자가 신고를 했습니다. 보험사 직원이 출동해서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캐묻기 시작하고 수경은 급발진이라면서 계속 둘러댑니다. 


이정은 수경을 고소해버립니다. 이것은 급발진이 아니고 수경이 의도적으로 자신을 치었다고 법정에서 증언을 해버립니다. 이제 이 두 모녀는 그 균열이 훨씬 더 커지기 시작합니다. 이정은 계속해서 요구합니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를 못하냐고. 수경은 절대 사과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키워줬더니 어떻게 엄마를 고소하냐면서 기막혀합니다. '사이다'를 원하는 관객들의 말이라도 들은 듯 이정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복수를 합니다. 그러나 영화는 끝나지 않습니다. 런닝타임은 아직도 한참 남았습니다. 둘은 아직도 한 집에서 같이 삽니다. 수경이 좀 기가 죽고 뭔가를 반성하면 좋겠지만 딸을 치었다가 고소당한 정도로는 바뀔리가 없습니다. 원래 그렇게 살아왔으니까요. 삶은 연속됩니다. 네이트판의 댓글을 다는 우리에게는 한 사건의 시작과 끝만 보이지만, 그 이후로도 억울한 누군가의 삶은 이어집니다. 수경과 이정은 한 집에서 엄마와 딸로 지독하게 얽혀있습니다. 수경의 억울함은 끝날 줄 모릅니다. 


같은 속옷을 입었듯이, 이정은 수경과 같은 차를 탑니다. 자신의 엄마가 자신을 치어버린 그 차를 타고 출퇴근을 합니다. 이정은 깁스를 하고 삐그덕거리며 회사를 다닙니다. 딱 봐도 그다지 탄탄하지는 않아보이는 회사에서 이정은 팍팍한 상사와 영업을 다닙니다. 엄마와의 모진 관계만을 겪은 그가 영업을 잘 해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회식 자리에서, 자기 엄마가 자기를 치었다고 조심스레 입을 엽니다. 못된 운전사를 욕하려던 사람들은 이정의 이 고백에 어찌할 줄을 모릅니다. 그리고 뻥치지 말라면서 이야기를 뭉개버립니다. 그 순간 회사의 다른 무뚝뚝한 직원인 소희와 눈이 마주칩니다. 그는 웃으며 흘려넘기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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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경은 이정에게 기막힌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자신은 쑥뜸방을 운영하며 손님들에게서 온갖 더러운 이야기들을 다 듣는다, 그거 다 소음공해다, 그 소음공해를 풀어내려면 딸인 너라도 엄마인 자신의 이야기들을 들어줘야 한다... 수경에게는 엄마와 딸이라는 애착관계가 없습니다. 그는 딸을 자신이 은혜를 베풀어주는 상대이면서, 그에 보답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감내해야하는 그런 존재로 봅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가장 압도적인 권력자가 됩니다. 집을 나오면 되지 않냐고 하겠지만 그건 어떤 사람에게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경제적 조건도 다 채워지지 않았을뿐더러, 어떤 폭력은 그 자체로 관계를 접착시켜놓기 때문입니다. 이정은 수경을 지긋지긋해하지만 그에게서 떨어져지내는 삶을 쉽게 상상하지 못합니다. 


이정은 집을 나와서 소희의 집에 잠시 머뭅니다. 소희는 이정의 하소연을 다 들어줍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정은 수경의 악덕을 그대로 실천합니다. 타인에게 받은 모진 상처와 지리멸렬함을 소희에게 쏟아내면서, 소희가 그걸 얼마나 불편해하는지 신경을 쓰지 못합니다. 이정은 소희에게 점점 집착합니다. 자신의 상처를 알고 이해해준 것 같았던 유일한 타인이니까요. 그러나 자신의 오지랖 때문에 소희가 상사에게 질책을 받는 순간 이정은 소희를 두둔한다면서 대들었다가 소희를 더 난처하게 만듭니다. 소희는 회사를 무단으로 그만둡니다. 이정에게서 오는 연락도 다 끊어버립니다. 이정은 죽을 싸들고 가지만 소희는 이정에게 질렸다는 듯이 화를 냅니다. 딸은 엄마의 폭력을 그대로 유전받습니다. 자신이 당하던 그 끔찍한 짓을 어느샌가 자신이 남에게 똑같이 하고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쉽게 가지 않습니다. 어떤 영화라면 여기서 여성의 연대라거나 환상적인 타인의 친절을 이야기하며 주인공을 보듬어주고 정치성이 실현되는 것을 보여줬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절대로 쉬운 구원을 마련해주지 않습니다. 소희와 이정의 에피소드는 아주 중요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상대방이 나와 같은 상처를 갖고 있다고 해서, 그 상처를 공유하며 자신에게 또 다른 안식처가 되어주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 상처를 입은 사람은 여전히 자신의 상처와 싸우고 있습니다. 거기에 남의 상처까지 보듬어가며 같이 싸워줄 여유가 없습니다. 이정이 소희를 얼마나 애달프게 생각했든간에 소희는 이정의 접근이 어느샌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다는 것을 느끼고 그게 불편했을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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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늘 쉽지 않습니다. 피해자인 자신이 어느새 가해자의 위치에 가기도 하고, 자신의 피해에 세상은 정말 무심합니다. 이야기가 길어져서 일단 여기까지만 쓰고 나머지는 나중에 덧붙이겠습니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현실의 밑바닥으로 우리를 끌어내린다는 점에서 반드시 필요한 중력을 갖고 있는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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