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사회가 임계점에 도달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하나가 아니라, 둘, 혹은 셋, 그리고 넷, 다섯으로 늘어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내용과 방향은 다를지라도,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썩어빠진 세상, 다 때려 엎어주겠어'라는 중얼거림을 입 밖에 낸 적이 있겠죠, 그리고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이러한 불만이 팽배한 사회가 '증오사회'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간과하지 않을 겁니다, 그것은 좌익과 우익을 떠나서, 온건한 사회를 유지시키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고, 가져야만 하는 예민한 감각입니다, 그래서 "혁명을 막기 위해 더 큰 개혁을 준비한다"라는 기치 아래 영국 보수당은 유구한 세월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이 글을 쓰는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신용등급 하락, 런던 폭동, 일련의 현상은 무엇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찻잔속의 폭풍일 수도 있고, 대격변을 준비하는 어떤 태동 현상일 수도 있지만, 확실한 것은 우리가 무시하고 지나갈 만한 사회 현상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 우리에게 패권주의와 신자유주의, 그리고 기독교근본주의의 국가로 인식되는 미국입니다만, 그곳에도 넓은 땅만큼이나 다양한 목소리를 가진 사람들이 예나 지금이나 자신들이 믿는 가치를 위해 싸웠었거나 싸우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사코와 반제티가 있었고, 엠마 골드만이 있었으며, 말콤엑스, 지미 호파, 존 리드가 있었고, 포레스트 검프, 그 외 이름 없는 민중들이 지금도 역동적인 흐름을 만들어 내고 있는 애증의 공간이라고 할 만한 곳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는 상기한 인물들과는 매우 다른 지점에서, 논란을 불러일으킬 여지를 가지고 있는 지킬박사와 하이드씨, 일명 유나바머(Unabomber, university and airline bomber)라 불리우는 남자를 읽어보려 합니다,

 

- '유나바머'-시어도어 존 카진스키는 이제 영화 속 농담으로나 화자되는 인물입니다('슛뎀업-거침없이쏴라' 참조), 하지만 그의 등장 당시 그가 미국 및 전세계에 던져 준 충격은 대단했습니다, 그를 단지 '사회부적응자'로 치부해버리는 주류의 시선이 있었지만, 그의 배경과 그의 주장을 보면 노르웨이의 어떤 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어떤 어둠의 포스를 느끼게 하는 면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실제로 브레이빅은 그의 성명서를 카피했다고도 하죠), 그는 16살에 하버드에 들어가 수학을 전공해 박사학위까지 초고속으로 취득하고, 젊은 나이에 교수 자리를 꿰찬, 말 그대로 '천재형'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1969년 갑자기 교수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이런 저런 일을 전전하다가 세상을 등지고 몬타나 주의 시골 야산에 오두막을 짓고 은둔 생활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몇 년을 자기 안에 침잠하면서 이 고독한 천재는 인간과 문명에 대한 분노를 차곡차곡 쌓아갑니다, 그 분노가 외부로 분출되기 시작한 것이 바로 1978년, 최초의 폭탄테러가 노스웨스턴대학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뒤이어 1979년 아메리칸 에어라인 747기와 그 사장을 대상으로, 1987년까지 미국 각지의 대학과 항공사에 우편물폭탄을 발송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뒤 몇 년의 소강기를 거쳐 1993년 다시 나타난 유나바머는 더욱 업그레이드 된 성능의 폭탄과 명확한 의도를 가진 행동 등으로 미국 전역을 긴장에 빠뜨립니다,

 

- 그를 더욱 더 유명하게 해 준, 그리고 이 글에서 다룰 성명서, '기술사회와 미래'라는 소논문(...이걸 뭐라고 불러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소고라고 칭하겠습니다)은 그가 대담하게도 1995년 주요언론사에 배포한 보도자료(!?)입니다, 그는 이 성명서를 1996년 1월까지 개제해주지 않으면 폭탄테러를 계속하겠다고 발표합니다, 수사본부는 심각한 고민끝에 결국 이 제안(?)을 수락하게 됩니다(별로 중요하지 않은 헛소리라고 생각했는지도;) 뉴욕타임즈와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이 소고는 '정신병자의 허무맹랑한 자기 합리화'라는 평과 '현대문명에 대한 첨예한 비판'이라는 양 극단의 평을 동시에 들으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게 되죠, 그러나 동생의 신고로 결국 꼬리가 잡힌 그는 체포되고 재판과정에서도 자신은 미치지 않았다며 장광설을 쏟아내는 후세인스러운 모습을 보여줍니다만, 미국 법정이 그에게 설득될리 만무하죠(...), 결국 종신형을 선고받은 그는 지금도 교도소에서 복역중입니다,

 

- 분명 이 소고는 그의 테러행위와 밀접한 연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나 중립적으로 읽기가 매우 어려운 글입니다, 그의 열정과 주장이 그의 성격적인 면이나, 동료들과 주변으로부터 핍박을 받고 있었다는 것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그의 날카로운 지성과 신념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우리는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가 이 소고를 객관적으로 읽는 길은 양자를 절충해 취합하는 회색적인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겉핥기가 될 수도 있고, 이도 저도 아닌 무의미한 글자의 나열이 될 수도 있겠지만, 10년후도 아니고, 100년 후도 아닌, 동시대인이 희생자들에게 최대한 애도를 표하면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읽기가 아닐까, 그렇게 개인적으로는 생각합니다,

 

- '유나바머 선언문 - 산업사회와 그 미래' http://arirang.snu.ac.kr/~saturn/unabomber/una_kr.html

 

- 서문은 5개의 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인류에게 있어 산업 혁명과 그 결과는 재앙이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서문은, 자연의 파괴, 심리적 불안과 고통, 사회 불안 등을 모두 '산업-테크놀로지'사회의 탓으로 돌립니다, 이 체제가 살아남든, 파국으로 치닫든, 결과는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말한 뒤, 이러한 산업체제에 항거하는 혁명을 카진스키는 주장합니다, 특이하게도 그는 이 혁명이 '정치적 혁명'으로 끝나서는 안되며, 현존 사회의 '경제적', '테크놀로지적' 토대를 제거해야 한다는, 래디컬한 매드사이언티스가 할 법한 주장을 펼칩니다, 이미 과격한 환경주의자의 입장에 익숙해진 우리는 이러한 선언도 그러한 류와 동일한 입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서문에서 주목한 것은 그것이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산업-테크놀로지'에 촛점을 맞추고 그것을 비난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정치적 좌파의 입장 중에서도 여기까지 나아가는 극좌파는 소수입니다, 흔히 우리가 급진좌파 하면 떠올리는 편견 가득한  상인 '폭탄마-아나키스트'들도 원시사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는 자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나키스트 이론가로서 유명한 크로포트킨도 테크놀로지와 결합하는 자본주의를 거부했지, 테크놀로지 자체는 오히려 잘만 운용되면 인간을 노동에서 해방시킬 유용한 도구로서 보았죠, 여기서 우리는 카진스키의 이론 토대 자체가 위험한 행동 원리를 동반한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산업-테크놀로지'에 대한 거부는 결국 그에 기반한 정치-사회-문화-역사 전부를 무너뜨리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결국 '행동'에 나서는 것은 시간문제였던 셈이죠,

 

- 다음 단락의 제목인 '현대 좌파주의 심리'부터가, 바로 그가 전통적 좌파 전통으로부터 일탈하거나,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그는 '우리 세계가 안고 있는 광기 중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드러난 광기가 바로 좌파주의(leftism)다.'라고 씁니다!(...) 카진스키는 '좌파'의 의미와 범위를 상당히 넓게 잡은 것 같지만, 스스로 인정하듯이 이 정의는 상당히 모호하게 드러납니다, 따라서 그가 지칭하는 '좌파'는 우리가 정치적 입장을 구분하며 나누는 그러한 우-좌의 등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최근 광범위하게 벌어지는 사회적 움직임과 관련된 어떤 운동의 총체(혹은 현상)를 지칭하려는 것이 카진스키의 의도인 것 같은데, 아니라면 굳이 '현대'의 좌파들로만 국한할 이유가 없었겠죠, 어쨌든 그는 현대 좌파주의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두 가지 심리적 경향이 '열등감'과 '지나친 사회화'라고 합니다, 연결되는 단락인 '열등감'에서 그는, '자기 비하, 무력감, 비관적 성향, 패배주의, 죄의식, 자기 혐오 등과 같이 열등감과 관계 있는 모든 속성을 포괄적으로 뜻하는 것'이라고 열등감을 정의합니다, 이하 카진스키가 열거하는 내용은 'PC함의 강박증'에 대한 비판에 같다 붙이면, 제법 그럴싸해 보이는 내용입니다, 즉, 차별적 언어에 대한 좌파의 히스테리적 반응은 바로 좌파 자신이 그들을 '열등하게' 보고 있다는 심리적 징후에 다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단어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이들은 정작 당사자들이 아니라 '안정된 봉급의 직장을 가지고 있는 대학 교수 사이' 혹은 '중상 계층 이상의 백인 이성애주의자들'이라는 것이죠, 이들이 열등하게 보이는 자들과 자신들을 동일시하게 된다는 것, 바로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열등감'이 그들을 좌파와 운동가로 만든다는 것이 카진스키의 주장입니다('좌파가 경쟁이라는 개념을 거부하는 것은 그가 마음 속 깊이 스스로를 패배자라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좌파는 성공한 것과 강한 것을 증오하게 되고, 그들과의 투쟁에서 마조히즘적인 방법을 택하게 됩니다, 이러한 좌파의 행동은 윤리적 동기가 아니라, '열등감'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호전적 경향을 띄게 되고, 그 투쟁 과정 자체가 사회를 낫게 만들긴 커녕 그들의 욕구 충족에나 도움이 되게 된다는 것입니다,

 

- 충격적입니까? 아니요, 저는 읽으면서 '이 양반 니체를 좀 어설프게 읽었는데?'하는 우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단락의 주장을 살짝만 바꿔보면, 전세기의 파시스트들이 니체를 잘못 숭앙하며 벌인 착각의 향연 같습니다, 바로 니체가 사회주의를 혐오한 것 또한, 그들이 개인으로서 '강함'을 가지지 못하고, 오로지 '집단'에서 위안을 찾는 '약자'들의 발버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어쨌든 이러한 주장이 원용되는 것은 그다지 놀라울 것이 없습니다, 많은 급진주의자들이 니체에게서 영감을 받으며(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정통적 좌파의 위선을 혐오하는 것을 숨기지 않고, 얼핏 보면 극우로 보일 만한 발언도 서슴지 않기 때문입니다(드물게 이 세 특징을 다 가지고 있는 급진주의자도 있습니다), 초기 파시스트들이 극좌 운동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는 사실 또한 우연이 아닙니다, 이것은 서문에 대한 평에서 말했듯이, 모든 '토대'에 대한 공격 시도는 파괴적이고, 무차별적이고, 토대로부터 파생된 모든 것에 대한 거부, 불신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카진스키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러한 계보에 속해있다고 보여집니다,

 

- 본문으로 돌아가서, 다음 단락에서는 또 다른 좌파(주의)의 심리, '지나친 사회화'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카진스키는 좌파가 일반적으로 보이는 것처럼 '반항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지나치게 사회화된'이라는 말뜻은, 사회가 요구하는 여러가지 윤리적 요구들을 완벽하게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려, 그것을 피하려는 여러가지 가짜 동기를 만들어내고 진짜 동기를 속이려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파생되는 것은 사회가 부과하는 윤리에 대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고통과 불안입니다, 이러한 구속감을 벗어던지기 위해 좌파는 이러한 윤리적 원칙들을 받아들이고, 대신 사회가 그것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고 공격한다는 것입니다, 카진스키에 따르면, '지나치게 사회화된 좌파'는 대부분 '지식인'과 '중상계층'입니다, 이들은 그래서 말로는 흑인들을 지원한다고 하면서, 사실 그들을 '중상계층의 백인'으로 만들려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사회의 윤리적 원칙에 따르라고!), 이러한 체제에의 통합 열망이 그들(좌파)의 목적이라고 그는 주장합니다, 카진스키는 자신의 분석이 가진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한 발 물러서는 면도 보이는데, 이 단락 마지막에서 '실제의 상황은 매우 복합적이며, 그것을 완벽하게 설명하려면, 설령 필요한 자료를 다 구할 수 있다고 해도, 몇권의 책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다만 현대 좌파주의의 심리 안에 두 가지 매우 중요한 성향이 자리잡고 있음을 극히 개략적이나마 지적하려 했을 뿐이다.', '좌파의 문제는 우리 사회 전체가 지닌 문제를 고스란히 보여 주고 있다. 자기 비하, 비관적 성향, 패배주의는 좌파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좌파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눈에 띈다는 것뿐이지, 문제는 우리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라고 자신의 주장을 마무리합니다,

 

- 카진스키는 이러한 분석의 원인이 '산업-테크놀로지'에 있다고 보았는데, 그것에 대한 보완 설명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알아서' 이해하자면, 근대세계의 사회 변화의 출발점이 산업 혁명에 있고, 그로부터 파생된 기술 발전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모든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지배하고 있다는 지극히 역사 유물론적인 관점을 받아들여야겠지요, 사실 앞서도 말했듯이 카진스키가 지적하고 있는 부분은 좌파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이 가지고 있는 어떤 특성으로 확장시킨다면 차라리 더 잘 받아들여질 수 있는 내용입니다, 단어에만 집착해 '좌파'를 까고 있는 글이라고 착각하신다면 곤란합니다; 제가 보기에 이러한 정신분석스러운 글이 가지고 있는 핵심은, 기존 사회 운동에 대한 강한 불신입니다, 카진스키가 열거한 징후-우리가 가지고 있는 심리적 불안과 고통이 외부로 표출된 것-는 결국 '산업-테크놀로지'사회가 만들어 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할 대안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겠지요, 또한 그러한 운동의 실행자로서 반복해 언급되는, '백인-중산층-지식인'에 대한 증오와 혐오는 유념해 볼 만합니다, 실제로 그의 폭탄 테러가 목표로 삼았던 것이 바로 이 '백인-중산층-지식인'이었다는 것, 그것이 이 소고의 첫 부분을 이해하는 것에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다음 단락인 '권력 과정'에 와서는 더욱 '속류 니체주의'와 유사한 논리가 펼쳐집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권력 과정'이라 부르게 될 어떤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권력 과정'은 권력 욕구와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동일한 것은 아니며, 목표, 노력, 목표 달성, 자율성의 네 가지 구성 요소로 이루어집니다, 카진스키는 권력에 목표가 없다면, 인간은 타락한다- 라는 것을 유한 귀족의 예를 들며 설명합니다, 목표 달성에 실패할 때 사람은 좌절하게 되고, '그 결과는 패배주의, 자기 비하, 우울증이다.'입니다, 연결되는 단락, '대리 만족을 위한 활동들'에서는 그에 대한 부가설명을 추가합니다, '우리가 '대리 만족을 위한 활동'이라고 할 때, 그것은 사람들이 단순히 어떤 지행할 목표를 갖기 위해, 아니면 그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충족감'을 얻기 위해 만들어 낸 인위적 목표를 지향하는 활동을 뜻한다.'라고 카진스키는 말하는데,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목표X의 추구를 위해 자신의 정신적, 신체적 능력을 활용해 시간과 에너지를 투입했다면, 그는 비록 목표X를 달성하지 못했더라도 심각한 박탈감은 느끼지 않을 것이라는 거죠('과학적 연구작업, 스포츠 기록 경쟁, 인도주의 활동, 예술 및 문학 창작, 회사 내에서의 직위 상승, 신체적 필요를 한참 넘어서는 돈과 물질적 재화의 획득, 그리고 소수 유색 인종의 권리를 위해 일하는 백인 운동가처럼 운동가 자신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슈를 떠들어대는 사회 운동'등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활동들 역시 카진스키에게는 '산업-테크놀로지'사회의 부작용이라는 것, 보다 근본적인 생물학적 욕구에 대해서는 자율성을 누리지 못하지만, 대신 대리 만족을 위한 활동에는 엄청난 자율권을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 카진스키가 중요하게 여기는 자율성은 다음 단락, '자율성'에서 이야기됩니다, 자율성은 본문에서 그다지 엄밀하게 정의되지는 않고, '자유' 정도로 해석되어도 무방할 듯 합니다, 핵심은 자율성의 충족인데, 공동 작업의 경우라도 자신의 주도권이 어느 정도 인정된다면 권력 과정에 대한 욕구는 채워질 수 있지만, '일체의 자율적인 결정권과 주도권을 허용치 않는 엄격한 상부의 명령에 따라 일한다면,' 자율성(즉 권력 과정의 욕구)은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좌절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 또한 현대 사회의 병폐입니다('권태, 타락, 자기 비하, 열등감, 패배주의, 절망, 불안, 죄책감, 좌절, 적대감, 배우자 또는 자녀 학대, 탐욕스러운 쾌락주의, 변태적 성 행동, 불면증, 과식 또는 거식증 등으로 나타난다.'),

 

- '사회 문제의 근원'이라는 다음 단락에서, 그는 서두에 깔아둔 포석을 펼쳐내기 시작합니다, 현대 산업 사회에서 열거한 증상(징후)들은 엄청나게 만연해 있으며, 이는 결코 인간 사회에서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카진스키는 지적하죠,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현대 사회가 지금까지 인류가 그 안에서 이제껏 진회해 왔던 환경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가도록 사람들에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또 과거의 환경에서 살면서 발전시켜 온 행동 양식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기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죠, 얼핏 듣기에 '진화심리학'스러운 이러한 주장은 핀커가 "인간의 마음은, 오랜 수렵/채집기 동안 우리 조상들에게 끊임없이 부과됐던 적응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자연선택에 의해 설계된 계산 기관들의 체계"라고 말했던 것과 유사하게 들립니다, 앞서 얘기했듯 제가 보기에 카진스키는 우리가 가진 문제를 관념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계몽가는 아닙니다, 오히려 철저하게 유물론적인 토대 위에서 사고하는 엔지니어에 가깝죠, 그에게 있어 사회적 병폐는 하드웨어를 들어내서 교체하거나, 업그레이를 해여하는 류의 병상입니다,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인간의 마음이 그럭저럭 현대 산업 사회에 적응하고 있다고 말하는 학자들과, '저런 병폐와 심리적 병적 증상이 나타나는 데 개뿔은 무슨 적응이냐!'라고 말하는 비관론자 카진스키의 관점의 차이겠죠;

 

- 어쨌든 그가 계속해 지적하는 현대 산업 사회의 병폐-'과도한 인구 밀도, 자연으로부터의 인간 소외,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사회 변동, 대가족이나 마을, 부족 등과 같은 자연스러운 소규모 공동체의 붕괴' 또한 이미 많은 학자들이 지적해왔던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카진스키의 지적을 말만 조금 바꿔서 내놓는다면, 비판이론가들이 해 놓은 작업의 결과물과 그다지 큰 차이는 나지 않을 겝니다, 중요한 것은 아니겠지만, 아도르노의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인류가 집단적 자기 보존을 위해 시작한 자연 지배 및 이에 따른 사회적 지배의 총체적 산물, 지배를 목적으로 자연과 사회, 인간의 완전한 조작과 정비가 생겨난다)은 계속해 카진스키가 이야기하는 바와 매우 유사하다고 보여집니다, 물론 카진스키도 이러한 증상들이 어떤 문명 사회든 있어왔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유독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증상이 극심한 것에 대한 의문을 그는 계속해 개진합니다,

 

- 다음 단락 '현대 사회에서의 권력 과정 붕괴'에서 그는 좀 더 자세히 이 현상을 관찰합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욕망은 세 부류<(1)최소한의 노력으로 충족시킬 수 있는 욕망 (2)상당한 노력을 치러야만 충족시킬 수 있는 욕망 (3)아무리 노력해도 충족시킬 수 없는 욕망>로 나뉘어집니다, 카진스키에게 문제는 (1)의 욕망이 현대 산업 사회에서는 너무 쉽게 충족되기 때문에 (2)에 속하는 인위적 욕구들이 만들어집니다(광고와 마케팅 산업이 바로 그에 속합니다,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쇼핑하면서 만족감을 느끼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떠올려 보세요!), 그러나 여전히, 이 욕구 충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카진스키에 따르면 20세기 초 나온 수 많은 허무주의적, 실존주의적 이론들, '정체성의 위기'는 바로 이러한 목적 상실에서 나온 것입니다, 게다가 이러한 목표를 추구할 때 우리의 입장은 '자율성'을 가지고 있지조차 못합니다, 우리 대다수는 노동자이기 때문입니다('대개의 노동자들은 우리가 문단 61에서 지적했듯이 피고용자의 신분이며, 그저 누군가가 시킨 대로 따라 하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야만 한다.'),  그는 선언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권력 과정은 진정한 목표의 부재, 그리고 목표 추구에서의 자율성의 부재로 인해 붕괴되고 있다.' 우리의 삶은 극소수의 어떤 자들이 내리는 결정들로 인해 유지되고, 이어져 간다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가 가지는 욕망들은 상당수 (3)으로 편입되게 되며, 그것을 통제하는 것은 현대 사회의 규칙, 규제, 법률과 정부입니다, 카진스키는 단호하게 그것의 사회적 해결을 반대합니다,

 

누군가 우리의 주장에 대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사회는 사람들에게 권력 과정을 통과하기 위한 기회를 제공해 줄 방법을 찾아낼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문제는 사회가 기회를 제공해 준다는 바로 그 사실때문에 기회의 가치가 훼손된다는 점이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 기회를 찾거나 만들어 내는 것이다. 체제가 사람들에게 기회를 제공해 주는 한, 사람들은 여전히 체제의 사슬에 묶일 수 밖에 없다. 자율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그 사슬을 벗어 던져야 한다.(본격 공산당 선언 표절) 

 

- 다음 단락, '일부 사람들이 체제에 적응하는 방법'은 패스해도 될 것 같습니다, 노예 신분, 광고와 마케팅에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 강력한 조직이나 대규모 운동에 자신을 동일화시키는 사람들(파시즘, 공산주의, 애국주의, 종교, 기업체, 정당, 등등), 개인의 취미 활동들에 대한 비판적 시선들을 나열한 것인데, 어쨌든 카진스키에 따르면 완전한 충족은 결코 그런 방식으로는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죠;('우리는 진정한 목표의 추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대리 만족을 위한 활동이나 조직과의 동일화를 통해서 권력 과정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천박한 행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다음으로 '과학자의 동기' 단락은 꽤 흥미롭습니다, 이미 과학사나 과학철학에서도 사회적 영향력에서 단절된 순수 과학의 이미지는 많이 깨지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죠, 얼마나 많은 과학자들이 전쟁과 환경파괴, 대량학살에 기여했는지, 또 그것들이 역으로 과학 발전에 얼마나 많이 기여를 했는지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당연하게도 카진스키에게 일단 이러한 활동의 동기는 '대리만족을 위한 활동'에 불과합니다, 그에게 '호기심'이나 '인류의 복지'같은 과학의 테제는 헛소리에 불과합니다('핵발전소 건설을 추진하는 데 온 마음을 다 바쳤던 에드워드 텔러(Edward Teller) 박사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가 그렇게 온 마음을 바친 것은 인류의 행복을 위한 열망 때문이었는가? 만약에 그렇다면, 텔러 박사는 왜 다른 '인도주의적' 문제들에 대해서는 전혀 흥분하지 않았는가? 그가 그렇게 인도주의자였다면, 도대체 왜 수소폭탄의 개발을 도왔던 것인가? 다른 수많은 과학적 업적과 마찬가지로, 핵발전소가 과연 인류 복지를 위한 것이냐 하는 질문에는 서로 상이한 대답들이 나올 수 있다. 값싼 전기가 쌓여 가는 핵 폐기물과 핵 사고의 위험을 능가할 정도로 값어치 있는 것인가? 텔러 박사는 질문의 오직 한 측면만을 보았다. 분명히 그가 핵발전소에 온 마음을 다 바친 것은 '인류의 복지'를 위한 열망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연구에서 얻어지는, 그리고 연구 결과가 실제 사용되는 것을 보면서 얻어지는 개인적 충족감 때문이었다. '), 물론 카진스키는 항상 한 발 더 나아갑니다, '과학과 테크놀로지는 거대한 권력 운동을 구성하며, 많은 과학자들은 이 거대한 운동에 자신을 동일화함으로써 권력 욕구를 충족시킨다.'라는 부분이나, '과학은 과학자들과 연구 기금을 제공하는 정부 관료 및 기업체 중역들이 지닌 심리적 욕구에만 복종하는 맹목적인 행진일 뿐이다. 그들은 인류의 진정한 행복이라든가 그 밖의 다른 기준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라는 부분에 쉽사리 동의할 만한 분은 극소수이겠지요;
 
- 서두에서 말했지만, 저는 이 소고를 최대한 회색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마 이 소고에서 동감하는 부분이 있다면, '임계점에 도달해 보이는' 사회에 대한 분노와 염려, 그 해결책에 대한 진지한 탐구, 그리고 이제껏 사회와 역사를 비슷한 방식으로 비판적으로 보아온 이론가들의 작업의 면면이 엿보이는 행간에서의 동의라고 할 수 있겠지요, 다만, 그의 이러한 일견 '정당해 보이는' 의견을 왜 그렇게 폭력적인 방법으로 표출해야 했는가, 에 있어선 여전히 아쉬움이 남습니다, 테러가 아니었다면 그 누가 카진스키의 의견에 관심 1g이나 기울였겠는가? 하는 지적은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폭탄은 사람을 죽이라고만 있는 것은 아니지요, 인명을 살상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이 사회의 중추-상징을 공격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한나라당 당사 폭파라던가),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라는 명제에 원칙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으로서, 이러한 희생을 낳는 '혁명 활동'은 오히려 혁명이 오는 순간을 늦추게 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언제나 큰 고통을 피하려 하기 때문이죠,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찬성과 반대, 아니면 그 중간, 하지만 제가 원하는 것은 이제 이러한 '선언문'이 낯설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우리는 파국적 전환기에 살고 있다는 인식의 전환입니다,
 
- 원래는 이 소고를 한 번에 다 끝내려 했지만, 상상 외로 글이 길어지는군요; 후반부는 이제 본격적으로 '혁명적' 선언문에 가까운 내용이 될텐데... 부득이하게 둘로 나눠 올립니다, 물론 제가 이 절반을 빠른 시일 안에 끝마칠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입니다('스카라베 살인 사건'을 읽고 있어서), 이렇게 고질적으로 글을 쪼개는 버릇을 고쳐야 할텐데 말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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